메뉴 건너뛰기

close

작가 유시연 작가 유시연(51)이 첫 장편소설 <부용꽃 여름>을 우편으로 보내왔다
▲ 작가 유시연 작가 유시연(51)이 첫 장편소설 <부용꽃 여름>을 우편으로 보내왔다
ⓒ 이종찬

관련사진보기


오래오래 지치지 않고 소설을 쓰는 것, 지금으로서는 그 일 밖에는 생각한 것이 없다고 여기는 지천명에 접어든 여자. 저물녘이면 느리게 흘러가는 생을 가만히 바라보는 버릇을 즐기는 여자. 어두워지는 대지를 바라보며 불안을 잠재우고 삶이 그, 혹은 그녀에게 좀 더 관대해지기를 간절하게 염원하는 여자.

시인, 소설가, 화가, 가수, 춤꾼 등이 한데 모여 왁자지껄하게 술잔을 주고받는 출판기념회에 가면 그저 저만치 한곳에 무릎을 다소곳이 꿇고 앉아 여러 가지 살아가는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만 있는 50대 여자. 여러 문인들이 내뱉는 구라(?)에 잠시 한눈을 팔다 다시 쳐다보면 어느새 바람처럼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는 여자. 

그 여자가 소설가 유시연이다. 유시연은 글쓴이와 같은 59 돼지띠다. 지난해 가을 그가 태어나 자란 고향 정선에 갔을 때 우연찮게 그 아버지가 식의주를 해결하며 오래 꾸리고 있는, 담배를 파는 조그만 구멍가게에 들른 때가 있었다. 그때 착각이었을까. 그 아버지 주름진 이마에서 작가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래서일까. 그가 이번에 펴낸 첫 장편소설 <부용꽃 여름>을 보자 글쓴이는 다시 한번 유시연은 고향 정선에서 피어난 부용꽃 같은 여자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이 소설에서 그리고 있는 이야기도 그 부용꽃 같은 사랑이니 말이다. 부용꽃은 아침에 피고 저녁에 사그라드는 하루살이 꽃이다. 하지만 오랜 날에 걸쳐 매일 차례차례로 피어난다. 작가 유시연이 멈추지 않고 쓰는 소설처럼 말이다.

사랑에 상처받았으나 그 사랑에 목말라 허덕이는 영혼들

유시연 첫 장편소설 <부용꽃 여름> 이 소설은 사랑에 목말라 하면서도 그 사랑을 밖으로 한껏 드러내지 못하고 속으로 삭이며 살아가는 영혼들이 그리는 아픈 자화상이다
▲ 유시연 첫 장편소설 <부용꽃 여름> 이 소설은 사랑에 목말라 하면서도 그 사랑을 밖으로 한껏 드러내지 못하고 속으로 삭이며 살아가는 영혼들이 그리는 아픈 자화상이다
ⓒ 이종찬

관련사진보기

"소설 속 주인공들은 사랑과 상처를 간직한 채 살아가는 인물들이다. 삶의 비루함과 상실감을 안은 채 플라톤에 나오는 '동굴의 비유'처럼 한 가닥 빛을 찾아 열정을 쏟아낸다. 길 위에서 서성이는 그들이 어느 순간 삼천 년쯤 전, 전생에서 옷깃을 스쳤던 것처럼 익숙하고 낯익다."-'작가의 말' 몇 토막  

작가 유시연(51)이 첫 장편소설 <부용꽃 여름>을 우편으로 보내왔다. 4월 허리춤께 이 책을 받았으니 지금으로부터 한 달이 조금 넘은 듯싶다. 근데도 글쓴이는 여러 가지 바쁜 핑계를 대면서 이 소설을 찔끔찔끔 읽었다. 이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 주연과 몇 차례 살을 섞은 뒤 가정을 꾸리자 해놓고 감감 무소식인 신기루 같은 남자 지오처럼.

시작도 끝도 없이 가슴 쿡 찌르는 슬픈 실루엣, 사랑을 찾아 떠도는 영혼들 속내를 발가벗긴 이 소설은 작가가 지금으로부터 일 년 반쯤 앞에 백담사 '만해마을'에서 처음 썼다. 작가는 그 뒤 한동안 이 소설을 가슴 저 밑바닥 가장 깊은 곳에 발효시키고 있다가 얼마 앞 '연희문학창작촌'에서 걸렀다.

유시연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생의 나침반을 잃어버리는 순간이 있다"며 "그건 의지로도 어찌할 수 없는 신의 영역, 이 세상이 아닌 경계 저 너머 세상일인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는 "사랑도 마찬가지"라며 "폭풍우 속에서 안개가 끼고 시야를 분간할 수 없을 때 주저앉아 절망할 것인가, 일어나 걸음을 내딛을 것인가"는 "당신들의 몫"이라고 말했다.  

이 소설은 사랑에 목말라 하면서도 그 사랑을 밖으로 한껏 드러내지 못하고 속으로 삭이며 살아가는 영혼들이 그리는 아픈 자화상이다. '피정의 집'에서 주인공 주연과 지오가 나누는 뜨거운 욕망. 오로지 무상 스님 한 분만을 가슴에 담고 평생 내색 한번 않다가 눈길에서 발을 헛디뎌 골짜기에 처박혀 눈에 덮여 얼어 죽은 공양주 보살.

어린 소녀와 불륜을 저지른 뒤 이혼을 당하고서도 교회법 상 이혼을 거부하며 주연에게는 그냥 혼자 살라고 뻔뻔스럽게 말하는 주연 전 남편 선우. 사제로 살아가지만 첫 사랑 주연을 잊지 못하다가, 주연을 찾아온 혜원과 키스를 나누는 안드레아. '불교에서는 단절이 없다'면서도 눈밭에서 얼어 죽은 공양주 보살을 생각하는 무상 스님 등이 그러하다.

'피정의 집'과 연화암, 그 가깝고도 색다른 삶  

"적당히 탈색된 자연의 풍경은 멀리서 보기에 목가적이다. 하얀 돌들이 깔려 있는 계곡, 산자락의 작은 밭들, 휴식에 들어간 들이 두툼한 카펫처럼 펼쳐져 있는 산골 마을…. 번잡한 과거와 도시의 기억이 하찮게 느껴졌다.

주연은 여행용 트렁크 손잡이를 힘겹게 끌며 어깨에 숄더백이 자꾸 흘러내리는 것을 다른 손으로 끌어올렸다. 그녀는 숨을 고르며 지나가는 택시라도 붙잡으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 다시 시작하고 싶어. / 지오의 말이 바람처럼 다가왔다 사라졌다. 누구나 실수를 하는 거야. 아무렇게 않게 말하는 그의 표정이 낯설었다." - 9쪽, '피정의 집' 몇 토막

이 소설은 주인공 주연이 어린 여자애와 불륜을 저지른 남편 선우와 이혼한 뒤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안드레아가 사제로 있는 '피정의 집'으로 찾아가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주연이 찾아가는 어느 산골에 있는 '피정의 집'은 연화암이라는 암자와 마주 보고 있다. 때문에 보살들은 천주교당 '피정의 집'을 '천주암'이라 부른다.

주연은 '피정의 집'을 찾아가다가 우연찮게 그 산골짝으로 가는 감청색 트럭을 타게 된다. 감청색 트럭에는 경상도 사투리가 진한 남자가 운전을 하고 있고, 그 조수석에 50~60대로 보이는 회색 한복 여자가 앉아 있다. 주연은 '피정의 집'에 도착해 여장을 풀고, 그때부터 이모와 안드레아, 자신과 얽혔던 여러 가지 사연들이 미구 교차한다.
           
주연은 가끔 안드레아와 함께 맞은편에 있는 연화암을 찾아가 무상 스님과 공양주 보살을 만나 여러 가지 이야기도 나누고 음식도 나눠 먹는다. 술을 무척 좋아하는 공양주 보살은 어릴 때 아버지 손을 잡고 어느 섬으로 들어갔다가 외톨이가 된다. 그 뒤 공양주 보살은 해안가 보초를 서던 어린 초병과 눈이 맞았으나 초병이 제대를 하자 소식이 없고, 민박하던 낚시꾼을 따라 뭍으로 나오는데…. 

책 본문 이 소설은 주인공 주연이 어린 여자애와 불륜을 저지른 남편 선우와 이혼한 뒤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안드레아가 사제로 있는 ‘피정의 집’으로 찾아가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 책 본문 이 소설은 주인공 주연이 어린 여자애와 불륜을 저지른 남편 선우와 이혼한 뒤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안드레아가 사제로 있는 ‘피정의 집’으로 찾아가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 이종찬

관련사진보기


시작이 있으나 시작이 없고, 끝이 있으나 끝이 없는 장편소설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치러야 되는 기다림이나 조급증은 고통이고 괴로움이었다. 지오를 향한 감정의 굴곡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갈증은 더욱 갈망을 낳았다. 보고 싶어. 문자를 보내면 지오는 답장이 없거나 답을 해도 그래 혹은 그렇네 정도였다. 한 번도 지오 입에서 보고 싶다거나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 117~118쪽, '밤과 낮' 몇 토막

지오는 남편 선우와 이혼한 주연이 지닌 빈자리를 찾아 날아든 사내다. 하지만 지오는 펜션에서 일주일 동안 주연과 살을 섞을 때마다 습관처럼 부부연을 맺자고 말했지만 그 뒤로 소식이 없다. 주연은 "여자는 몸을 섞는 순간 이미 마음이 기울어지는 것"이지만 "남자들은 배설을 하고 나면 곧 관계를 잊어버린다"며 이를 비극이라 여기는데.    

글쓴이는 이 장편소설을 읽으며, 참 사랑을 찾아 여기 저기 헤매다 '피정의 집'과 '연화암'을 찾은 주인공 주연이 작가 유시연 자화상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왜? 작가 또한 소설을 쓰기 위해 이 소설에서 부용꽃처럼 떠도는 주인공들처럼 고향 정선에서 백담사로, 서울 연희문학창작촌에서 인천으로 마구 떠돌고 있기 때문이다. 

유시연 첫 장편소설 <부용꽃 여름>은 시작이 있으나 시작이 없고, 끝이 있으나 끝이 없다. 새로운 사랑인 지오와 함께 살아갈 날을 꿈꾸며 '피정의 집'과 연화암을 오가며 끝없이 기다리는 주연도, 바람 같은 사내 지오도, 전 남편 선우도, 사제가 된 안드레아도, 얼어 죽은 공양주 보살도 결국 자기 삶을 찾지 못하고 끝까지 방황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 유시연은 강원도 정선에서 태어나 2003년 <동서문학>에 단편소설 '당신의 장미'가 신인상에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으로는 <알래스카에는 눈이 내리지 않는다>가 있으며, 이번에 펴낸 <부용꽃 여름>은 첫 장편소설이다. 한국작가회의, 한국소설가협회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인천작가회의 사무차장을 맡고 있다. '2008 인천문화재단 창작지원금' 받음.


부용꽃 여름

유시연 지음, 개미(2010)


#작가 유시연#부용꽃 여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