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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2월 30일 '2008 헤이리 송년회'자리에서 자하재의 박돈서 교수님께서 연단에 서셨습니다. 그날의 드레스 코드에 따라 붉은 스웨터와 베레모를 눌러쓰신 박 교수님은 단 1분간의 스피치로 파티의 현장을 웃음바다로 만드셨습니다.

박 교수님은 이 송년회 자리의 '헤이리 어르신 덕담 한마디'에 초대받아 연단에 나오셨고 2008년과 2009년의 경계에서 경쾌한 희망의 한마디로 좌중을 즐겁게 했습니다.

 '2008 헤이리 송년회'자리에서 스타일리쉬한 박돈서교수님
 '2008 헤이리 송년회'자리에서 스타일리쉬한 박돈서교수님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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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헤이리가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상상과 발상이 거침없이 종횡으로 누비는 경계 없는 마을이면서도 '어른이 존경받고 어른의 지혜가 최고로 숭상되는 마을'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저는 마을 분들과 함께 헤이리 송년회를 준비하면서 '이사장님 인사'나 '공로자 포상'같은 의례적인 식순으로 일관하는 대신 '헤이리 어르신의 덕담 한마디' 코너를 건의했고 그것이 받아들여졌던 것입니다.

박 교수님은 현재 헤이리 거주자들 중에서도 가장 연세가 많은 분이시지만 나이를 느낄 수 없을 만큼 젊게 사고하시는 분이며 헤이리 주민들 사이에서 어느 젊은이보다도 인기 있는 분입니다.

박 교수님께서는 제가 아프리카로 가기 전부터 소엽 선생님과 더불어 식사하는 자리를 원했습니다. 제가 아프리카에서 돌아오자 바로 전화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희 셋은 박 교수님의 초대로 헤이리 인근의 '묵집'에서 저녁식사를 겸한 자리를 함께했습니다. 묵수제비와 묵밥 등 모두 유기농 묵으로만 상을 차린다는 그 집의 메뉴하나하나를 설명을 곁들여서 권했습니다. 박 교수님과 함께하는 자리는 맛있고 건강한 그 먹거리 메뉴보다도 해학에 버무린 박 교수님의 말씀들이 더욱 귀하고 맛있습니다.

이날 저녁에도 박 교수님의 철학이 담긴 재담에 몇 시간이 금방 지나갔습니다.

"옛날에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누릴 수 있는 귀한 다섯 가지를 오복이라 했지요.  첫째는 '수'로서 천명을 누리는 장수이고 두 번째는 '부'로서 적당히 풍요로운 재력이며, 세 번째는 '강녕'으로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건강하게 사는 것이며 네 번째는 '유호덕'으로 덕을 쌓는 일이며 다섯 번째는 '고종명'으로 천수를 누리고 고통 없이 편안하게 죽는 것을 꼽았습니다. 삼경인 '서경' 1편의 '홍범'에 나오는 말이지요. 그런데 현대에 와서는 이 오복의 의미가 약간 바뀌었답니다. 그 첫째는 '건'으로 건강이며 둘째는 '처'로 같이 해로할 수 있는 배우자, 셋째는 '재'로서 자식에게 손을 벌리지 않고도 친구들에게 저녁 한 끼 살 수 있을 만큼의 경제적 여유, 넷째는 '사'로서 보람을 가질 수 있는 적당한 일거리 다섯째는 '붕'으로서 이심전심할 수 있는 친구를 갖는 것입니다. 오늘 이렇게 좋은 사람을 위해 저녁을 살 수 있으니 저는 지금 다섯 가지 복 중에서 세 번째 복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박 교수님은 저녁을 사고도 이렇게 본인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박교수님과 함께하는 식사는 늘 차려진 음식보다 박교수님의 얘기가 더 맛납니다. 친구를 위해 밥을 살 수 있는 경제적 여유를 갖는 것은 현대판 오복의 하나입니다. 분명 베풀수 있는 여유는 큰 보람입니다.
 박교수님과 함께하는 식사는 늘 차려진 음식보다 박교수님의 얘기가 더 맛납니다. 친구를 위해 밥을 살 수 있는 경제적 여유를 갖는 것은 현대판 오복의 하나입니다. 분명 베풀수 있는 여유는 큰 보람입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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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교수님은 평생을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보내신 만큼 제자들의 주례부탁을 많이 받습니다. 박 교수님은 주례사도 3분을 넘기지 않습니다. 박 교수님께서 신혼부부들에게 부탁하는 몇 편의 주례사 중에서 가장 많이 말씀하시는 것을 동동주를 권하시면서 소개해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죽을 때 후회하는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그 첫째는 '내가 왜 더 베풀고 살지 못했는가'하는 것이며 두 번째는 '그때 내가 왜 참지 못했는가'이며 세 번째는 '내가 왜 더 즐겁게 살지 못했는가'하는 것입니다. 부부가 함께 베풀고 순간의 감정을 이기고 늘 웃으면서 살 것을 당부합니다."

인생을 어떻게 살것인가하는 명제는 누구에게나 제일 절실한 문제이지만 또한 누구에게나 모호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확신을 줄 수 있는 철학이 부재하는 '불확실성의 시대'를 사는 현대인에게 더욱 절실한 덕목이 어른의 존재입니다.

모호한 것에 대하여 분명하고도 명확한 답변을 줄 수 있는 어른들의 경륜은 이처럼 누구에게나 중요합니다.

 모티프원을 찾으신 박돈서교수님, 박교수님께서는 헤이리의 모든 전시와 음악회 등의 오프닝에 빠짐없이 참여하시곤합니다. 마을의 대소사에 함께하는 것이 어른의 큰 덕목이니까요.
 모티프원을 찾으신 박돈서교수님, 박교수님께서는 헤이리의 모든 전시와 음악회 등의 오프닝에 빠짐없이 참여하시곤합니다. 마을의 대소사에 함께하는 것이 어른의 큰 덕목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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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돈서 교수님을 뵈면 권위를 앞세우지 않지만 존엄이 느껴지고,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늘 웃음을 멈출 수 없게 하지만 존경이 느껴집니다.

아주대학교 부총장의 보직을 끝으로 은퇴하신 박돈서 교수님은 이제 파주의 봉일천 고등학교의 특별활동 교사로서 새로운 봉사를 시작하십니다.

여러 특기적성교육에 많은 공을 들이고 있는 봉일천 고등학교의 교장선생님의 요청에 따라 일본어를 배우고 있는 학생들에게 일본어 문화를 일주일에 한 번씩 특강형식으로 강의하시게 된 것입니다.

"며칠 전에 학교에서 전화가 왔어요. 특강의 강의료를 지급할 통장의 계좌번호를 알려달라는 겁니다. 받을 생각이 없다고 말씀드려도 학교의 규정이니 어쩔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받아서 학교에 필요한 것들을 사서 기증하면 되겠구나하고 알려주었지요."

마음으로 부터의 '존경'이 우러나는 어른을 모신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헤이리가 자랑스러운 것은 이 시대에 더욱 절실하지만, 이미 실종된 '어른'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거주하고 계신 헤이리의 자하재를 설계하면서 스스로가 건축가이면서도 다른 젊은 건축가에게 설계를 맡겨서 후학들를 배려했습니다.

박교수님은 남을 웃게 만드는 것을 즐기시지만 스스로도 잘 웃습니다. 즐겁고 긍정적으로 삶을 향유하는 노력은 후일 후회를 줄일 수 있는 삶의 자세입니다.
 지금 거주하고 계신 헤이리의 자하재를 설계하면서 스스로가 건축가이면서도 다른 젊은 건축가에게 설계를 맡겨서 후학들를 배려했습니다. 박교수님은 남을 웃게 만드는 것을 즐기시지만 스스로도 잘 웃습니다. 즐겁고 긍정적으로 삶을 향유하는 노력은 후일 후회를 줄일 수 있는 삶의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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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돈서교수님은 '공동경비구역 JAS',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등의 창의력이 뛰어난 작품으로 세계의 영화계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영화감독 박찬욱과 서울대 미술대학과 캘리포니아 예술대학원에서 서양화와 사진을 전공하고 2004년 에르메스코리아 미술상을 수상한, 그리고 올해 초 갤러리 소소에서 '어떤 산'으로 개인전을 가진 미술가인 박찬경의 아버님이기도 합니다.

덧붙이는 글 | 모티프원의 블로그 www.travelog.co.kr 에도 포스팅됩니다.



#헤이리#자하재#박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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