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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한한 일이다.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책 읽어주는 남자>를 읽고 나니 여러 곳에 소개가 되어 있는 걸 발견한다. 아무래도 영화 개봉을 앞두고 있는 탓일게다.
 
창원에 온 뒤 큰 마음을 먹고 찾아간 창원시립도서관에서 빌린 첫 책이어서인지 내게도 의미가 각별하다. 소설의 울림 또한 작지 않아 토요일에 읽고 일요일에 한 번 더 읽었다. 늘 다음을 기약하며 정독 대신 속독에 가까운 소설 읽기를 해온 나로서는 연거푸 두 번 읽었다는 것이 그런대로 하나의 사건이다.

 

<책 읽어주는 남자>는 소년과 여인의 사랑을 모티브로 하지만, 그 이면에는 전후 독일의 세대 간 갈등과 전후 세대가 이전 세대의 죄의식에서 어떻게 벗어나려 하는 지를 보여주는 알레고리가 자리하고 있다.

 

주인공 미하엘 베링크는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분신이면서 -베른하르트 슐링크는 베를린 대학의 법학교수이며, 미하엘 역시 후에 법학교수의 길을 걷는다. 따라서 미하엘은 그 자신의 개인적 경험의 집합체가 아닐까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전후 세대를 대표한다. 하지만 미하엘은 전쟁의 죄의식에서 벗어나려 했던 전후 세대들과 차이를 보인다. 미하엘이 자신의 동세대와 다른 점은 그가 나치활동을 하면서 유대인 수용소의 감시관이었던 한나라는 여인을 사랑했고 그로 인해 그녀의 '죄'와 분리될 수 없다는 자각에서 나온다.

 

... 이 모든 사실은 비록 우리가 손가락으로 죄를 저지른 당사자들을 가리킬 수 있다고 해도 우리 가슴속을 수치심으로 가득 채웠다. 죄를 지은 사람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고 해서 우리가 수치심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손가락질을 함으로써 적어도 수치심으로 인한 고통을 극복할 수 있었다. 손가락질은 수치심의 수동적인 고통을 에너지와 행동과 공격심으로 전환시켜 주었다. 그리고 죄를 저지른 우리 부모님들과의 대결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되었다. -p.202.

 

많은 전후 세대가 부모 세대와의 대결에서 자신의 성을 지키려했고, 그 대결에 열을 올린 데 반해 미하엘은 그것이, 그들을 향한 손가락질이 과연 그들 자신의 죄의식을 해결할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는지에 의문을 가진다. 그리고 미하엘에게만큼은 그 손가락질이 결국 자신에게 돌아오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자명해 보인다.

 

나는 지금도 스스로에게 묻고 있고 이미 당시에도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한 질문을 갖고 있다. 우리 2세대들은 유태인 박멸에 대한 끔찍한 정보들을 실제로 어떻게 대해야 했으며 또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해서도 안되고,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을 비교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도 안되며, 자꾸만 물어봐서도 안된다. 왜냐하면 질문자는 그 끔찍한 사건들 자체를 문제시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 앞에 다만 경악과 수치와 죄책감으로 침묵할 수밖에 없는 그것들을 의사소통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만 경악과 수치와 죄책감을 느끼면서 그것들 앞에 침묵해야 하는가? 무엇을 위해? ... 그러나 몇몇 사람이 판결을 받고 형을 살고, 제2세대인 우리들은 경악과 수치심과 죄책감으로 입을 다무는 것, 그것이 지금 할 수 있는 모든 일인가? - p.127.

 

미하엘은 전후 세대 대부분이 열을 올렸던 부모 세대에 대한 손가락질을 자신에게 돌리면서 그들 제 2세대가 할 수 있는 일을 묻는다. 다만, 그것 앞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침묵하는 것만이 지금 할 수 있는 모든 일인가? 하고 말이다. 그리고 그는 한나와의 이야기를 글로 쓰기로 마음 먹는다.

 

애당초 내가 우리의 이야기를 글로 쓰려고 한 까닭은 이 이야기로부터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글로 쓰려고 하니 기억들이 제대로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던 중 나는 우리의 이야기가 내게서 빠져나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그것들을 어떻게든 글을 통해서 붙잡아두고 싶었다. -p.258.

 

글을 쓰는 동안 미하엘은 과거와 화해한다. 그리고 마냥 슬플 것이라 생각했던 그 이야기가 다만 진실된 이야기라는 데 확신을 갖고 그것이 슬픈 이야기냐, 행복한 이야기냐 하는 물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어쨌든, 나는 우리의 이야기를 생각할 때면 이 사실만을 생각한다. 그렇지만 내가 무언가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입을 때면, 당시에 겪었던 마음의 상처들이 떠오르고, 내가 죄책감을 느낄 때면, 당시의 죄책감이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내가 오늘날 무언가를 그리워하거나 향수를 느낄 때면 당시의 그리움과 향수가 되살아나곤 한다. 우리 인생의 층위들은 서로 밀집하여 차곡차곡 쌓여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나중의 것에서 늘 이전의 것을 만나게 된다. 이전의 것은 이미 떨어져 나가거나 제쳐둔 것이 아니며 늘 현재적인 것으로서 생동감 있게 다가오는 것이다. -p.259.

 

역사와의 조우. 그리고 그 안에서 현재성을 찾아내고자 했던 미하엘이 판사, 검사 등 탄탄한 법조인의 삶을 버리고 법제사 연구학자라는 직업을 선택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그에게 "역사를 한다는 것은 과거와 현재 사이에 다리를 놓고 양쪽 강가를 모두 관찰하고 그리고 양쪽에 다 관여하는 것을 의미"하기에 법제사 연구학자는 그 자신의 과업이면서 제2세대들의 몫이 무언인가를 암시해 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는 그것이 다만 반복되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나는 당시에 <오딧세이>를 다시 읽었다. 나는 <오딧세이>를 학교 다닐 때 처음으로 읽었으며 그것을 하나의 귀향 이야기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귀향을 다룬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은 똑같은 강물에 결코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그리스인들이 귀향을 믿겠는가. <오딧세이>는 머물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출발하기 위해서 귀향하는 것이다. <오딧세이>는 목표점이 확실하면서도 목표점이 없는, 성공적이면서도 헛된 운동의 이야기이다. -p.217.

 

그는 머물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출발하기 위해서 '귀향'하는 <오딧세이> 이야기처럼 독일 전후 세대들에게 남겨진 과제는 이 목표점이 확실하면서도 목표점이 없는, 성공적이면서도 헛된 운동을 하기 위한 '역사와의 조우'에 동참하는 일이 아닐까라고 일전의 물음에 답한다.

 

 

그러면 미하엘이 한 때 사랑했고, 평생에 걸쳐 영향을 끼친 한나 슈바츠는 어떤 인물인가?

열 다섯살 미하엘에게 첫 경험을 안겨준 그보다 스무살 가량이 많은 한나는 미하엘과의 짧은 사랑을 뒤로 하고 종적을 감춘다. 미하엘이 그녀를 다시 만난 것은 법정에서였다. 유대인 수용소의 감시자로서 법정에 선 한나는 독일군의 패전이 짙었을때 이동 중이던 유대인 여성들을 교회에 감금하고 불이 나고도 열어주지 않아 단 두 명 만이 살아남고 많은 수가 불타 죽게 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단지 그녀만의 잘못이 아니지만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이 알려질까 두려웠던 그녀는 모든 죄를 뒤집어 쓰고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처음에 한나는 재판장에서 과거를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려 노력한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과거에서 도망치려 하지 않았으나, 그로부터 도망치고자 했던 다른 피고인들로부터, 그리고 그를 빨리 봉인하고자 했던 재판장의 분위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종국에 그녀 자신조차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된 데에는 '문맹'을 밝히고 싶지 않았던 그녀만의 수치심이 자리하고 있었다. 자신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 너무나도 큰 대가를 치뤄야 했던 한나. 과연 그것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러한 판단을 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는 것일까?

 

그녀는 완전히 탈진된 상태에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녀는 법정에서만 싸운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을 할 수 없는지를 감추기 위해 늘 싸워왔고 또 싸웠다. 그것은 실제로는 힘찬 후퇴일 수밖에 없는 전진과 실제로는 은폐된 패배일 수밖에 없는 승리로 이루어진 삶이었다. -p.162.

 

여전히 과거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미하엘은 감방에서 세월을 보내는 한나에게 이전에 사랑을 나눴을 때처럼 책을 읽어주기로 하고 10년 동안 책을 읽고 녹음한 카세트 테이프를 그녀에게 보낸다. 미하엘은 여기에 어떤 사적인 내용도 담지 않았고, 한나가 짤막한 편지를 보내올 때조차 답장을 보낼 생각은 하지 않는다. 마침내 올 것 같지 않았던 한나의 석방을 며칠 앞두고 교도관의 부탁으로 한나의 뒷일을 봐주게 된 미하엘이 석방 전날 한나를 만나러 간다.

 

하지만 그것은 한나와의 마지막 만남이 된다. 석방일 아침, 한나가 자살하기 때문이다. 미하엘이 다시 교도소를 찾았을때, 교도관은 한나가 줄곧 그의 편지를 기다렸으며 그녀의 방 벽에 미하엘의 기사 사진이 붙어있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한나에게 미하엘은 현재였으며, 영원히 잊지 않았던 마지막 사랑이었음을 확인한 것이다. 그제서야 과거로만 치부해온 한나를 현재로 받아들이게 된 미하엘은 그때서야 죽은 한나의 얼굴에서 그녀의 젊은 시절, 중년, 노년 시절의 모습을 모두 본다.

 

문맹의 수치심으로부터 도망치기에 바빴던 한나. 그녀가 과거로부터도 동일한 수치심을 가졌는지는 모를 일이다. 오히려 그 둘을 비교할 수 있다고 얘기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일인지 모른다. 한나가 자신의 자존감을 잃지 않고자 남겨둔 최후의 보루로서 문맹을 감추듯 우리 모두 역시 그런 것 하나쯤 마음에 품고 있기 마련이다. 가치는 모두에게 동일할 수 없다. 과거의 수치심 역시 강요될 수는 없는 부분일 것이다. 다만, 문맹을 감추려 힘찬 후퇴와 은폐된 패배를 거듭해야 했던 한나가 치뤄야 했던 대가의 크기만큼, 치욕스러운 과거라 할 지라도 마주하지 않는다면 더 큰 대가를 요구할 것이라는 점은 잊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책 읽어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시공사(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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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어주는 남자#베른하르트 슐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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