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래된 물건을 좋아한다. 새벽 0시, 자정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모든 장난감들이 살아 움직이는 <호두까기 인형>처럼. 오래된 물건 속에는 '움직이는 시간'이 숨어있다. 낡고 닳았지만 손때 묻은 물건들, 가죽이나 은같이 흠집이 오히려 아름다워지는 물건이 좋다. 그래서 자석에 이끌리듯 '서울풍물시장'에 갔다. 거기서 물건을 사다 파산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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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풍물시장 간판 키스 헤링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춤추는 아이들이 귀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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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복원 공사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던 서울 풍물시장. 지금은 신설동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지하철 신설동역에 내려서 10번출구로 나가면, 표지판이 꽤나 친절하게 가는 길을 알려준다.
1층은 골동품 위주고 2층은 동대문 거리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생활용품들을 팔고있는데, 나는 로렐라이의 노랫소리에 홀려서 난파한다는 선원들처럼 1층을 떠나지 못했다. 내가 사고 싶은 물건은 오래된 라디오와 장식용품, 그리고 타자기. 하지만 왜 모든 아름다운 물건들은 비싼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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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공관 라디오 이 품격있는 외관을 보라. 격조가 뚝뚝 떨어진다. 30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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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동이 되는 오래된 라디오를 사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고장난 것이 많았다. 그러던 중 골동품 더미에서 이 귀여운 라디오를 발견했다. 온 몸으로 "내가 바로 라디오!"를 외치는, 정말 라디오 같은 라디오. 그렇게 오래된 건 아니지만 -내가 어릴때도 우리집에선 이런 라디오를 썼다- 그래도 만족스런 가격인 만원인 데다, 소리도 짱짱해서 얼른 주머니를 열었다. 라디오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어보고 있는데, 아저씨 왈. "이거 밖에 들고 놀러갈 땐, 밧데리 넣으면 잘 돌아가!"
푸핫! 왠지 커다란 라디오를 손에 들고 쿵짝쿵짝 엉덩이를 흔드는 내 모습이 생각났다.
오늘의 히든카드, 무쇠 팔, 무쇠 다리 강철 로보트도 구매했다. 기계부품으로 직접 만든 이 로보트는 희소성과 견고한 아름다움으로 감탄을 연발하게 만들었다. 혼자 사는 집 방범용으로도 제격인 강철 몸이 포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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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물시장 내 먹거리. 저렴한 가격, 다양한 메뉴. 머릿고기 작은 게 단돈 3000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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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다니다 보니, 배가 출출해졌다. 서울 풍물시장에는 시골 장터같은 음식점들이 있는데,생각만해도 군침도는 '비빔 국수'가 오늘의 선택메뉴. 주위를 둘러보니 밥을 먹는 사람보다, 나른한 오후 반주를 즐기는 사람들이 더 많은데, 아마도 저렴하고 군침도는 메뉴 때문일 듯하다.
풍물시장에서 만족스런 구경을 끝내고도 아쉬워서 풍물시장 주위를 어슬렁 거리다가 신설동역과 동묘앞역 중간 쯤에 위치한 또 다른 골동품 거리를 찾아냈다. 헌책방도 많고, 중고 가게들도 많은 골목 중간에 거의 기절할만큼 아름다운 물건들이 가득찬 가게에 들어갔는데 "사진 찍는 건 좋은데 팔지는 않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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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장 사람들. 바닥에 자판을 벌여놓은 아줌마와 그 주위를 둘러싸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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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이곳만 정지되어 있는 것 같았다. 남들보다 덜 가져도, 즐겁고 소박하게 사는 사람들. 물건 파는 것보다, 그늘에 쭈그리고 앉아서 이야기 하는 모습이 더 자연스러운 곳이다.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면서, 목마르면 시원한 생맥주 한 잔! 모든 근심이 훨훨 날아갔다.
세상엔 다른 사람들이 보면 쓸데없는 물건들이지만, 내 눈에는 보석처럼 빛나보이는 게 있다. 그럴 땐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문득, 남들과 똑같으려고 하니 행복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만의 삶이 있는데,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며 아득바득 살다보니 슬프고, 아팠다. 하고 싶은 걸 하고, 원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다.
맛있는 걸 먹고, 아름다운 물건을 보고, 사랑하는 사람과 눈맞추고 걷는 길. 서울 풍물시장에는 추억과 꿈과 사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