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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다시 정상으로 올라가야한다고 뭐 이런 산악회가 다 있어?”

“미리 답사도 해보지 않고 우리들을 이끌고 왔단 말이야?”

“이거 다시 정상에 올라갔다가 내려가려면 엄청 힘들겠는 걸.”

 

목표했던 정상에 올랐다가 하산길로 나서 40여분을 내려갔는데 길을 잘 못 들었다는 것이었다. 뒤돌아본 정상이 까마득하다. 내려가다가 뒤돌아선 사람들은 10여명이나 되었다. 몇 사람이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강원도 화천에 있는 해발 1055미터 재안산에 오른 것은 지난 화요일(6월 24일)이었다. 어느 산악회를 따라 관광버스를 타고 간 등산객은 45명, 서울을 출발한 버스는 북한강을 끼고 달려 춘천호반을 훌쩍 지나쳤다.

 

여전히 북한강 줄기를 따라 달리는 길은 눈 가득 창밖에 펼쳐진 풍광이 시원하기 짝이 없었다. 장마가 소강상태를 보이고 있어서 구름이 높게 드리우고 있었지만 녹음이 우거진 산은 짙푸르고, 짙푸른 산 그림자가 잠긴 강물도 검푸르렀다.

 

버스는 화천읍내를 왼쪽으로 비껴 강변을 따라 계속 달렸다. 화천 댐 밑을 통과한 버스는 다시 구불구불 이어진 고갯길을 힘차게 달려 불빛이 희미한 터널을 통과했다.

 

산행대장들을 잘 따르라는 산악회장의 당부가 있었지만

 

“자! 내리십시오, 이곳에서부터 산행이 시작됩니다. 이곳도 오지산행이라 길이 어긋나면 위험 할 수 있으니 산행대장들을 잘 따라 주시기 바랍니다.”

버스가 정차하기 전에 산악회장이 당부의 말을 잊지 않는다. 선두와 후미, 그리고 중간에서 인도하는 4명으로 구성된 산행대장들의 뒤를 잘 따르라는 것이었다.

 

버스가 정차한 곳은 해산령 터널입구였다. 고갯길에서 조금 비껴서있는 해산령 쉼터는 철조망 울타리 출입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등산로는 그 울타리 입구 근처에서 왼쪽 골짜기를 타고 오르도록 되어 있었다.

 

골짜기에 접어들자 콸콸 흐르는 물소리가 시원하다. 골짜기를 흐르는 수량이 많은 걸보니 이곳엔 엊그제 상당히 많은 비가 내렸던 모양이었다. 산길은 걷기가 불편했다. 등산로는 나있었지만 사람들이 많이 다닌 길이 아니었다. 길을 가로막고 누워있는 쓰러진 나무들과 등산로를 뒤덮은 나뭇가지들이 사람들의 통행을 어렵게 하고 있었다.

 

“아얏! 또 귀싸대기 한 대 맞았네.”

내 뒤를 따르던 일행이 가벼운 비명을 지른다. 나뭇가지가 얼굴을 때린 모양이었다. 앞사람을 가까이 따르다보면 앞사람에게 걸렸던 나뭇가지가 바른 위치로 돌아가며 뒷사람의 얼굴을 가격하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일은 등산 시작 시점부터 마지막 하산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나뭇가지에 귀싸대기 얻어맞으며 걷는 산길

 

“아얏! 어, 잠깐 내 눈 아래 좀 살펴봐? 상처가 난 것 같은데”

앞서 걷던 일행이 또 나뭇가지에 얻어맞은 다음 상처가 났는지 살펴보라고 얼굴을 내게로 돌린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다행히 상처는 나지 않았지만 피부가 긁힌 자국이 희미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오늘 이거 하산할 때까지 얼마나 더 귀싸대기를 얻어맞아야 할는지 모르겠군.”

“각오하고 걸어야지 별 수 있겠어, 눈을 다치면 안 되니까 안경을 꼭 끼라고.”

 

그랬다. 얼굴이야 나뭇가지와 나뭇잎에 맞아서 그리 대단할 것 없겠지만 눈을 다치면 매우 곤란할 것이었다. 흐르는 땀 때문에 안경을 끼고 걷기도 쉽지 않았지만 눈을 보호하기 위해서 수시로 안경알을 닦으며 걸을 수밖에 없었다.

 

산은 특별한 모습이 아니었다. 등산로 주변에 빽빽한 나무들 때문에 시야도 매우 좁아서 조금은 답답한 느낌까지 들 정도였다. 그래도 시야가 시원하게 열린 헬기장을 가끔 만날 수 있는 것은 이곳이 전방지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나뭇가지와 나뭇잎에 얼굴을 수시로 얻어맞으며 두 시간 만에 정상에 올랐다.

 

정상도 초라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흔한 정상표지석 하나 세워져 있지 않고 누군가 공책 크기의 아크릴지에 <재안산 1055,3미터>라고 써서 걸어 놓은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모두들 그 표지글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재안산을 오른 기념으로 남기려는 것이리라. 선두 대장을 따르던 그룹과 중간그룹 30여명은 이미 내려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정상에서 여기저기 둘러 앉아 간식을 나누어 먹었다. 우리일행 네 사람도 간식을 들고 중간 산행대장을 따라 하산길로 나섰다. 정상에는 도시락을 먹고 있던 몇 사람이 아직 남아 있었다. 하산길에서는 항상 쓰레기를 줍는 일행이 또 비닐봉지를 꺼내 쓰레기를 줍기 시작한다. 길에는 플라스틱 페트병과 빈 술병 등 쓰레기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하산길도 험하지는 않았지만 경사가 상당히 급했다.

 

산행대장이 길을 잘 못 들어 다시 정상으로 되돌아가다

 

“저 하얗게 보이는 곳이 전통(全統)이 만든 거짓 수공 댐인지 평화의 댐인지 그거잖아, 오늘 산행은 너무 가벼울 것 같군.”

가끔씩 시야가 트인 곳에서는 우리가 내려가려고 하는 평화의 댐이 그리 멀어 보이지 않는 골짜기에 나타나곤 했다.

 

그렇게 40여분 쯤 내려갔을 때였다. 앞서가던 산행대장이 되돌아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길을 잘 못 든 것 같다는 것이었다. 선발대가 100미터 간격으로 놓고 간 표지가 한 개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곧 선발대장과 교신이 이루어졌다. 결과는 역시 길을 잘 못 든 것이었다. 지금 내려가는 길로는 목적지에 도착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뒤따르던 사람들이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별 수 없었다. 40여분을 내려온 길을 되짚어 올라가노라니 1시간이 넘게 걸리고 갑자기 지쳐버리는 것 같았다. 더구나 길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인도한 산악회에 대한 불만까지 터뜨리며 걷노라니 더욱 힘이 드는 것 같았다.

 

“아니, 도대체 무슨 산악회가 이래, 길도 모르면서 길안내를 한다는 것이 말이 돼?‘

“이건 도대체 참을 수가 없구먼, 내려가서 산악회장에게 단단히 따져야겠어.”

몇 사람이 산을 오르며 계속 불평을 늘어놓는다. 우리들을 이끈 산악회의 후미그룹 대장과 총무는 무안해서 어쩔 줄을 모르는 표정이다. 잘 못은 이들에게 있었다.

 

길도 정확히 모르면서 선발대가 남기고 간 표지를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무턱대고 40여분 동안이나 내려갔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래도 무안해 하는 그들이 안쓰러워 불평하는 사람들을 다독이며 힘들게 정상에 오르니 늦게까지 남아 점심을 먹던 사람들까지 10여명이 뒤쳐져 있었다.

 

끝인가 하면 다시 나타나는 봉우리들

 

이번에는 앞서간 선발대의 표지를 확인하며 내려가기 시작했다. 조금 전에 내려갔다가 올라온 능선과는 전혀 다른 능선이었다. 길은 여전히 희미했다. 나뭇가지와 나뭇잎들은 여전히 등산객들의 얼굴을 때리고 할퀴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했다. 그래서인지 등산로 곳곳에는 꺾인 나뭇가지가 자주 눈에 띄었다. 누군가 나뭇가지들을 꺾으며 앞서 내려간 모양이었다.

 

“아! 힘들어 못 걷겠구먼, 좀 쉬었다가 천천히 내려가는 수밖에...”

우리일행 중 한 사람이 길에 주저앉는다. 산행을 시작한지 다섯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래도 희망은 저 아래골짜기에 멀지 않게 내려다보이는 하얀 콘크리트 댐의 모습이었다.

 

조금 쉬었다가 다시 내려가기 시작했다. 앞쪽에 작은 봉우리가 하나 나타났다. 그 봉우리만 넘으며 곧장 댐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을 것 같았다. 너무 힘들어 하는 일행을 다독이며 걷노라니 덩달아 지치고 힘이 든다. 맨 뒤로 쳐진 사람은 일행 한 사람과 불평이 유난히 심했던 40대 후반 쯤으로 보이는 사람까지 세 사람이었다.

 

“아니 저 앞에 또 봉우리잖아? 난 힘들고 다리가 풀려서 도저히 못 걷겠어, 늦어도 할 수 없지, 또 쉬어야겠어.”

일행이 또 주저앉았다. 그런데 그 작은 봉우리를 오르자 앞에 또 다른 봉우리가 나타난다. 힘들어하던 일행이 또다시 주저앉았다.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저렇게 힘들어 하다가 정말 아주 주저앉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이었다.

 

어렵사리 목적지 평화의 댐에 무사히 도착하다.

 

길은 점점 더 좋지 않았다. 가지치기를 해주지 않고 제멋대로 자란 소나무가지들이 길을 가로막고 있어서였다. 마른 소나무 가지들이 정말 아프게 팔과 얼굴을 때리고 할퀴었다. 이제는 끝이겠거니 하고 자위하다가 실망하며 그렇게 몇 개의 봉우리를 더 넘어선 다음에야 왼편 바로 아래쪽으로 평화의 댐이 나타났다.

 

평화의 댐 쪽으로 내려가는 갈림길에는 선발대장을 맡았던 산악회 간부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마지막 내려가는 길이 너무 급경사여서 위험하고, 뒤쳐진 사람들이 너무 늦어지고 있어서 안내를 겸하여 나와 있는 것 같았다.

 

내리막길은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도저히 등산로라고 믿어지지 않는 길은 밟으면 쭉쭉 미끄러져 아차, 구르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죽을 것 같은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길을 조심조심 내려가 드디어 댐 위에 발을 딛고 서니 감개가 무량하다.

 

“안 죽고 살아와줘서 고마워.”

내가 힘들어하던 일행에게 인사를 하자 그가 씨익 웃는다. 나 자신보다도 그가 무사히 내려온 것이 정말 고마웠다. 그도 감회가 깊은지 우리가 내려온 길을 뒤돌아본다.

 

“뭔 놈의 산이 오르기보다 내려오기가 이렇게 힘들담. 오늘 정말 죽을 뻔 했네.”

댐 위에 난 길을 걸어 주차장에 도착하자 사람들 몇이 못마땅하다는 듯 우리들을 흘겨본다. 우리들이 너무 늦었기 때문이다. 후미 산행대장의 실수로 잘못 내려갔다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 내려오느라 1시간 30분 이상이나 늦어진데다 지쳐서 쩔쩔매느라 결국 2시간 이상 그들을 기다리게 했기 때문이었다.

 

“왜 이렇게 늦나 했더니 나물 뜯어오느라 늦으셨구먼, 많이도 뜯어 오셨네.”

그들 중에 누군가 우리들에게 빈정거리듯 말한다. 일행과 내가 들고 내려온 커다란 쓰레기 비닐 주머니가 산나물 주머니로 보였던 모양이었다. 그러자 같이 내려간 다른 사람이 등산로에 버려진 쓰레기를 주워 내려온 곳이라고 말해주자 머쓱한 표정을 짓는다.

 

평화의 댐은 처음 보는 것이었지만 우리가 꼴찌로 내려가는 통에 찬찬히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여느 댐과는 달리 댐 양쪽에 저수된 물이 없어 어느 쪽이 안쪽이고 바깥쪽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좁은 협곡을 가로지르고 있는 제방이 한쪽은 콘크리트 구조물이어서 그 쪽이 안쪽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친구 두고 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주차장 아래쪽에서 등산객 한 사람이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며 올라온다.

 

“그러고 보니 내일이 6·25 기념일이네, 저 아래 쪽에 비목공원이 만들어져 있거든.”

“그렇지, 그나저나 정통성 없는 군사정권이 정권유지용으로 만들어 놓은 거짓 평화의 댐이 이렇게 버젓이 명소가 되어 있다니, 참 역사의 아이러니로구먼.”

 

일행들이 주변을 둘러보며 탄식을 한다. 주차장 옆 짙푸른 산자락 아래 새하얀 콘크리트 벽에는 크고 작은 몇 개의 형상이 만들어져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그런 조각그림을 잠깐 바라보고 있을 때 산악회 간부가 출발 하겠다며 버스에 승차하라고 재촉한다. 어느새 태양이 구름 갠 서쪽 산위에 많이 기울어져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승철#재안산#평화의 댐#산악회#귀싸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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