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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수능 수험표 나의 수능 시험표
▲ 나의 수능 수험표 나의 수능 시험표
ⓒ 송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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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1월 5일. '수능 보는 날이면 어김없이 춥다'는 '수능한파'를 입증하듯 아니나 다를까 하얀 입김이 절로 나올 정도로 무척이나 추웠다. 4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그때의 기억이 무척이나 생생하다. 어쩌면 다시 수능 기억을 떠올린다는 것 자체가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누구나 두려워하고 피하고 싶어하는 하나의 관문이기에 다시 생각한다는 것 이 자체만으로도 아찔하다.

수능 하나만을 준비하면서 기나긴 시간을 보내왔지만 그전까지는 오히려 담담했다. 친구들은 변비에 소화불량에 두통에 수험생 고질병을 달고 지내왔지만 나는 오히려 소화만 잘되고 밥맛만 좋았다.

그러나 수능 보는 전날 예비소집을 마치고 나서야 '진짜 시험을 보는구나'라는 부담감에 정신이 아찔하게 들었다. 예비소집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 이때부터 휴대폰은 불이 나기 시작했다. 시험 잘 보라는 친구들의 응원과 선배들의 문자와 전화는 지금까지도 참 고맙다. 또 집까지 찾아오셔서 찹쌀떡을 건네주신 교회 집사님, 장로님의 발걸음까지 진심으로 감사한다.

수능 시험 날 아침, 새벽 5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일어난 것 같다. 밖은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컴컴했고 며칠 전만 해도 포근하던 날씨는 사라진 채 칼바람이 부는 듯 무척이나 차가운 날씨였다. 몸을 챙긴다는 이유로 잘 입지 않던 내복을 껴입고 그렇게 옷을 주섬주섬 입고 있는데 옆에서 엄마의 시선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시험장에 가는 딸을 바라보는 엄마의 안쓰러운 그 눈빛. 무척이나 울컥했다. 손수 엄마가 차려주신 아침밥을 먹으면서 어찌나 울컥하던지 눈물을 참느라 참으로 혼이 난 기억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편한 복장으로 시험장에 들어갈 준비를 마치고 드디어 학교로 향했다. 정말 운이 좋았던 것은 내가 다니고 있는 고등학교에서 수능 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는 거였다.

충북 지역 중 영동, 옥천, 보은의 수험생들이 모두 옥천에서 수능 시험을 치렀는데 먼 곳에서 버스를 타고 오는 영동, 보은의 학생들과는 달리 옥천의 학생들은 모교 아니면 옆 학교에서 시험을 보는 영광을 얻었다. 그래서인지 매일 학교 가는 길에 보던 익숙한 풍경을 보게 되었고 아주 사소한 부분이었지만 이 때문에 심리적으로 참 평안했던 것 같다.

시험장으로 입실하기 전에 친구들을 만났고 우루루∼ 몰려 함께 들어갔다. 정확하진 않지만 오전 7시 30분쯤에 학교로 들어섰던 기억이 난다. 일찍부터 나와 계신 담임선생님이 보였고 애써 담담하게 웃으시면서 토닥토닥 응원의 말씀을 전해주시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담임선생님도 참 따뜻한 분이셨구나' 하는 뒤늦은 깨달음도 얻을 수 있었다.

동아리 후배들의 모습도 보였다. 선배랍시고 해준 것도 없는데 작은 종이컵에 초콜릿을 듬뿍 담아 따뜻한 차와 함께 건넨 후배들이 어찌나 고맙던지 수능 시험 보기도 전에 연타 감동을 먹었다.

드디어 선생님과 후배들을 멀리하고 입실했다. 너무 일찍 도착해서였는지 시험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때를 기회로 삼아 나는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수능 보는 날 카메라를 들고 간다는 나의 말 한마디에 친구들과 부모님 모두 '제 정신이냐∼?'며 반기를 들었지만 나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시험실 앞에서 시험실 앞에서 친구와 함께 찍은 사진. 왼쪽이 나의 모습.
▲ 시험실 앞에서 시험실 앞에서 친구와 함께 찍은 사진. 왼쪽이 나의 모습.
ⓒ 송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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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에서 단 한 번뿐인 수능 시험을 기억하고 싶었다. 물론 그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고 힘들었던 기억들로 가득했던 고3이었지만, 수능 시험 역시도 나의 인생에 큰 추억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난 카메라를 가져갔다.

시험실에 아무도 없었던 탓에 내가 기억하고 싶고 추억하고 싶은 모든 것들을 렌즈에 담았다. 4년이 지난 지금, 사진을 보면 그때의 기억이 더욱 또렷하게 생각이 난다. 시험실 안에서의 웃고 있는 나의 모습과 수능을 보던 나의 자리, 시험실 앞에서 친구와 함께 활짝 웃고 있는 모습, 그리고 함께 모여 맛나게 점심을 먹고 있는 친구들의 모습까지. 정말이지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는 말을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었다.

언어 영역과 수리 영역의 시험이 끝나고 돌아온 점심시간. 모교에서 시험을 보는지라 아무런 부담 없이 시험에 임했던 친구들은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무척이나 시끄럽고 왁자지껄하게 점심을 먹었다. 수능을 잘 보기를 기도하면서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도시락을 싸주신 부모님들의 정성이 친구들의 도시락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2003년 추웠던 11월의 어느 날에 먹었던 엄마의 정성이 가득 담긴 도시락이 나는 가끔 그립다.

제2외국어를 선택하지 않은 친구들의 공식적인 시험 종료 시각은 오후 5시였다. 시험을 마치고 친구들과 함께 학교를 나서고 있을 때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내 고등학교 시절 중에 큰 부분을 차지했던 '청소년 기자'를 담당하셨던 기자 아저씨의 푸근한 얼굴이 보였다.

톨스토이 단편선 책 안에 쓰여있던 글 수능 시험을 마치고 나와 선물 받은 책. 그 안에 쓰여있던 글
▲ 톨스토이 단편선 책 안에 쓰여있던 글 수능 시험을 마치고 나와 선물 받은 책. 그 안에 쓰여있던 글
ⓒ 송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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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을 마치고 나온 나에게 기자 아저씨는 책 한 권을 선물해 주셨다. 바로 <톨스토이 단편선>이었다. 책 앞에는 수고했다는 격려가 담긴 따뜻한 위로의 글귀도 함께 적혀 있었다. 정말 얼마나 감사한지 아직도 글로 표현하기에 참 많이 부족한 것 같다.

당시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지역신문의 청소년 기자로 활동하면서 고3 일기를 연재했다. 2주에 한 번 고3 일기를 신문에 연재한다는 게 결코 쉽지만은 않았지만, 이로 인해 참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었다.

신문을 보고 멀리 살고 계신 고모부께서도 이메일을 주셨고 심지어는 초등학교 6학년 학생까지도 나에게 메일을 보냈다. 아나운서가 되고 싶다는 그 어린 학생, 지금 고등학생이 되었을 텐데 잘 지내고 있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수험장을 빠져나올 즈음, 주변이 어둑어둑해졌고 해가 지고 있을 그 무렵 아빠로부터 전화가 왔다. 휴대폰을 켜자마자 가장 먼저 아빠의 전화가 걸려왔다. 평소 다정다감하지 않은 우리 아빠의 전화 첫 마디는 "아빠야∼"라는 무척이나 다정한 목소리였다. 막내딸이지만 부모님께 애교 섞인 말 한번 남기지 않은 무뚝뚝한 나와 더 무뚝뚝한 아빠 사이에는 따뜻한 말이라고는 평소에 찾아볼 수 없었던 게 사실이었다. 그런 아빠가, 그랬던 나의 아빠가 이렇게 따스하게 남겨주는 이 한 마디에 난 눈물이 나왔고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뭉클함을 느꼈다.

집에 돌아와서 곧바로 수험표 뒤에 적어온 나의 답과 수능 정답을 맞혀봤고 이때 딱 한번 눈물을 흘려봤다. 시험에 대해 워낙 무덤덤한 나의 성격인지라 아니나 다를까 이때를 제외하고 수능에 대해 걱정해본 기억은 없는 것 같다.

평소보다 수능을 못 본 것만은 확실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는 생각으로 애써 마음 아프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나칠 정도로 태평한 나의 모습에 엄마에게 잔소리를 한 바탕 듣기도 했지만 아주 잠시 동안은 고3 수험생에서 해방되었다는 자유를 느낄 수 있어서 참으로 행복했다.

수능을 보고 나면 모든 것이 다 행복하게 맞춰지고 제자리를 찾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당장 수능 본 다음날, 학교에서는 가채점한 결과를 적어서 제출하라고 학생들에게 알렸고, 이에 반발한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가채점 결과를 200점으로 적어서 냈다(우리 때 수능 만점은 400점이었다).

수능 본 다음날, 맞바로 학생들에게 가채점 결과를 적어서 내라고 하는 학교 측의 매몰찬 행동에 우리 나름대로 선택한 반항의 방법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무척이나 소심한 선택임은 분명한 것 같다.

수능을 본 뒤, 친구들의 모습은 다양했다. 재수를 결심한 듯 무언가 결의에 차 있는 고뇌하는 모습을 보인 친구도 있었고, 많이 떨어진 수능 점수를 암담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기에 펑펑 우는 친구도 있었고, '본인의 수능 점수에 맞춰 갈 수 있는 대학이 있기나 하냐'며 한숨 쉬는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친구들의 이런 고민과 눈물 섞인 투정도 아주 잠깐이었다. 모두 형편에 맞게 대학 원서를 썼고 그들 나름대로 앞길을 계획해 나갔다. 운전면허를 따러 분주히 움직이는가 하면 대학교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나는 지금 내가 다니고 있는 대학교 원서를 쓸 때 정말이지 울면서 썼다.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의 선택이었기에 후회는 없었지만 억울한 마음에 뚝뚝 떨어지는 눈물은 내 의지로도 막을 수가 없었다. 나의 점수보다 조금 낮게 대학교 원서를 넣었고, 덕분에 많은 장학금 혜택을 받고 입학했다. 아주 많이 살지는 않았지만, 정말 인생은 생각한 것처럼 쉽게 되는 것도 아니고 함부로 예측할 수도 없는 럭비공과도 같은 것 같다.

수능을 다 본 뒤 학교를 나서면 무척이나 시원하고 훌훌 날아갈 것 같았지만, 오히려 이때를 기점으로 세상에 대한 부담감과 책임감이 더욱더 커지게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수능 점수에 맞춰서 대학을 선택해야 하고 원서를 써야 하고 모든 대학 일정을 주체적으로 결정해야 했기에 수능 본 이후, 부쩍 학생이 아닌 일반인이 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종종 느끼곤 했다.

지금 수능을 앞둔 친구들이 이 글을 읽게 될 가능성은 없겠지만 멀리서나마 얼굴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전국의 수험생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비록 그들이 원하는 만큼의 결과를 얻지 못한다 할지라도, 수능 시험을 위해 애쓰고 노력하고 남몰래 숨어서 울어야 했던 그 숱한 나날들이 언젠간 그대들의 인생에 주춧돌이 되어 더 멋진 인생으로 인도할 것이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위민넷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수능시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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