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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보다 교사가 먼저다

 

우리의 미래는 아이들에게 달렸다. 교실 아이들의 저 먹머루빛 순진무구한 눈망울에 우리 어른들의 미래가 달렸다. 그들은 우리의 미래 사회의 꿈이고 희망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절대 다수 아이들의 배움터인 공교육 현장은 그들에게 진실과 정직을 가르치고 꿈과 희망을 키워 주는 것을 그 존립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그렇기에 그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의 일거수일투족은 그들의 본이 되고 모범이 되어야 한다. 한창 감수성이 풍부하고 예민한 그들에게 교사의 모습은 결정적이고 치명적이다. 교사들도 필부필부이기에 민감한 사생활 영역은 차치한다손 치더라도, 교육현장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처리하는 모든 공적 업무 수행에서 그들에게 정직하고 성실한 언행을 보임으로써 신뢰를 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아이들이 교사를 존경하고 따른다. 여기서 교사의 권위가 시작된다. 교사의 권위는 정직과 성실함에서 오는 도덕성을 그 반석(bedrock)으로 삼아야 한다. 그래야만 교육이 살고, 나라도 살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도덕성과 한 사회의 신뢰성이 국가경쟁력의 주요인이라고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거짓' 교육의 주범은 무엇인가

 

그럼에도, 오늘날 우리의 교육과 학교 현장은 그렇지 못하다. 좀 과장한다면 오늘의 우리 교육과 학교는 난장판(?)이다. 신자유주의 시대, 천민자본주의 사회에서 지식은 상품이고 학교는 장터이며, 오로지 무한경쟁이 춤을 추고 평가와 실적만 절대선(絶對善)인양 난무하는 시장바닥일 뿐이다. 모럴과 룰이 작동하거나 적용되지 못한 채 소위 교육의 시장화가 무한질주하고 있다. 외국어고도, 세칭 일류대학도 이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교육은 이제 더 이상 교육이 아니며, 교사는 선생이 아니라 지식소매상으로, 그것도 빠른 속도로 전락해가고 있다(대학의 경우 잘 팔리는 전공 교과의 교수는 강의실이 차고 넘치며, 비인기 학과를 전공한 교수는 구조조정의 위협을 받거나 강좌를 개설하고도 파리를 날려야 한다고 한다).

 

이제 더 이상 존경받는 선생이 아니라 한 시간 수업도 근근이 할 수밖에 없는, 진정한 교육자는 끝없이 노동 소외에 시달려야 하는 딱한 현실이 오늘의 우리 교육 현장이다. 이는 아이들이 수업을 제대로 듣지 않는 현상을 머리에 먼저 떠올리게 되는 이른바 교실붕괴만을 일컬음이 아니다.

 

필자는 요즈음, ‘한 나라의 교육이 오로지 교사에게 달렸으며,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넘어설 수 없다’는 말을 실감한다. 이는 교사를 ‘구조적으로’ 비도덕적이게 만드는 상부구조인, 교육부와 16개 시·도 교육감과, 1만 수천 명에 이르는 대한민국의 현직교장부터 먼저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필요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이래 우리의 고통스런 역사와 사회 분위기가 고스란히 투영된 것이 우리 교육이고, 학교의 모습이다. 현재의 교원승진제도와 교육자치제도를 통해 배출된 학교장과 교육감의 교육현실 인식의 한계가 곧 우리 공교육의 속살이고 ‘학교의 표정’이다.

 

참여정부 들어와서도 여전히 교육혁신은 공허한 울림으로만 교실과 운동장을 맴돌 뿐이다. 30년 전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거나, 입시교육은 그때보다 훨씬 더 심화되었다는 게 교사들의 중론이다.

 

이런 현상은 교사들의 사기를 치명적으로 저하시켜, 이 시대 그리도 중요하다고 떠들어 젖히는 창의성 교육을 크게 위축시킨다. 입시교육과 창의성 교육은 결단코 양립할 수 없음을 교단 28년째인 필자는 절감하고 있다.  

 

흔히 하는 말로, 38만 교사가 따르기에 교육감과 학교장은 교육철학이 턱없이 부족하다. 철학이 부족하니 교육소신이 있을 리 없고, 교육혁신을 주도할 리더십이 나올 리 없다. 이걸 모르는 강단의 교육학자들은 진정한 교육혁신을 위한 시스템 전환은 모르쇠 하면서, 미국식 신자유주의 논리인 학교단위책임경영제를 교육혁신을 위한 금과옥조인 양 앵무새처럼 주장하고 있다.

 

'거짓'을 가르치는 학교 현장 

 

교원이 되기 전에 교직과목을 통해서 배운 교육철학의 고전이 던져주는 불후의 명제들은 교사가 되어 교단에서 분필을 들고 서는 순간 벽장 속에 가두어져 버리는 한낱 장식물에 머물고 만다. 현재의 우리 교육시스템은 대학입시라는 거대한 굴레에 파묻혀 교사와 학생들의 창의를 말살시키고 사장시킨다. 추호의 진정한 교육적 실험도 불가능하게 만드는 곳이 미래 인재를 양성한다는 우리의 학교와 교실인 것이다.

 

신학기도 시작되기 전에 다음 학년도 학급을 미리 편성하여 보충수업을 시작한다. 수년 전부터 해마다 고3 아이들은 신학기 개학도 되기 전 소위 ‘봄방학’ 때 이미 3학년 진급을 하여 고3 담임과 급우들을 만난다. 어떠한 교육감독기관도 간섭은커녕 이를 방관하고 조장한다. 여기서 우리 아이들은 이미 탈법과 편법을 배우기 시작한다. 

 

학기 중 교실수업개선과 연구·시범학교란 이름의 각종 이벤트에 아이들은 동원되고 대상화된다. 한 시간 보이기 위한 ‘반짝 쇼’와 이벤트에 아이들은 정규 교과진도를 중단한 채 서너 시간의 리허설에 동원되어 지루한 역할극(role play)의 어릿광대(?)가 되기 다반사다.

 

하루가 멀다 하고 주고받는 보고 공문도 태반이 ‘실체적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우리 교사들은 다 안다. 참으로 지독한 전시행정과 관료주의가 교사들과 우리 아이들의 창의성을 짓누르고 있다. 여기서 아이들은 실질보다는 가식(假飾)의 습관을 익힌다. 말하자면 자연스럽게 거짓을 체득한다.

 

교육부와 교육청에서 그다지도 말리는 사설 수능모의고사를 벅벅이 쳐대는 학교들이 아직도 부지기수다. 물론 대구와 부산이 특히 심하다고는 하지만. 8000원을 미리 거두고 모의고사를 치기로 했다가 하루 전 취소키로 하고 다시 돈을 돌려줘야 하는 고3 담임교사들은, 아이들과 학교장 사이에 선 힘 없는 허수아비에 다름 아니다. 교사의 권위는 통째로 무너지는 것이다. 이런 교사들로부터 우리 아이들은 무엇을 배울 것인가.

 

학교별, 학급별 성적 경쟁에 몰입한 교사들이 200대, 300대씩 미친 듯 매를 휘두르는 모습을 보고 자란 아이들이 먼 훗날 어떻게 선생님과 학창시절을 회상할까. 참으로 자신의 미래를 위해 사랑의 매를 든 은사로 생각할까. 이런 체험을 통해 우리 아이들은 목적을 위해 어떠한 수단도 정당화시키는 비상식과 폭력을 뼈 속 깊이 받아들이고 수용하게 되는 것이다.

 

급식사고가 일어나도 쉬쉬하고 파묻는 데 급급하며, 학교폭력이 일어나도 문책이 두려워 자치위원회 한 번 열지도 않으며 은폐하는 학교를 평생의 모교로 아름답게 추억할 것인가. 아직도 부교재 채택료와 촌지에 연연해 하는 교사에게 어찌 아이들이 신뢰할 것이며, 걸핏하면 학부모에게 삿대질이나 당하는 선생님들의 가르치는 권리에 권위를 부여하겠는가.

 

심리학자들은 일반적으로 감수성이 예민한 유·소년기에 체험한 거짓과 폭력의 심리적 잔영(殘影)은 이후 성년이 되어도 아주 자연스럽게 스스로 거짓과 폭력을 행동에 옮기게 된다고 한다. 가정 폭력에 시달리며 자라온 사람이 이후 자기 자녀에게 또다시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그 유례에 해당된다.

 

일부 극소수 아이들의 예이긴 하지만, 수년 전부터 아폴로눈병이 돌 때마다 1만원을 주고 눈병을 팔고 산다는 소문이 파다해 왔다. 나아진 눈병을 또다시 문질러 보건실로 가는 아이도 있다고 한다. 그 아이들에게 거짓과 속임수는 이미 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더욱이 한 시간 수업은 한 마디로, 지옥일 뿐이다. 그들에게 학교는 감옥이고 ‘도살장’이다. 그들에게 교실은 최소한의 진실을 가르쳐 주고 인성교육을 해 주는 배움의 장이 더 이상 아니다. 한 점 산소도 살아남을 수 없는 이 아이들의 거짓과 절망 앞에 우리 교사들은 넋을 잃을 뿐이다.

 

최근의 '학력위조'도 결국은 잘못된 학교교육 탓

 

언론과 여론을 뜨겁게 달구는 학력위조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진리와 진실과 정의를 가르치기보다는, '허위와 가식'과 자신이 살아남기 위한 경쟁만을 부추기는 학교에서, 지금 이 순간도 수많은 ‘거짓의 싹’들이 가슴 속에서 잉태되고 있다는 결코 묵과해 버릴 수 없는 엄청난 사실이다.

 

문제는 거짓을 가르치는 학교와 교육시스템을 바꾸는 것이다. 그것은 대학평준화 외 어떤 다른 대안도 없음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단지 우리 어른들의 이기와 탐욕이 저 아이들의 삶과 나라의 미래를 저당잡고 있을 뿐이다. 교육업에 종사하는 절대다수의 어른들이 교육시스템을 바꾸어 우리 공교육이 제대로 자리 잡는 것에 희망을 걸기보다 자신의 이익이 침해될까 봐 더 두려운 것이다.

 

사립학교법 재개정 문제를 두고 종교의 자유와 기독정신을 갖다 붙이는 행위도 사실은, ‘패거리의 이익’을 두고 아옹다옹하는 어른들의 싸움일 뿐, 우리 아이들의 미래와 행복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이 시대 단 한 명의 진정한 교육자와 선생이라도 있다면, 이 현실을 그대로 두고 우리 교육을 운위할 자격이 없다. 그러면 그것은 자기기만이고 비겁이다. 이런 심한 표현을 하는 필자도 물론 선생 흉내를 내는 교사의 아류에 불과하다. 더 이상 교사와 아이들이 돌아보거나 물러설 공간이 없다.

덧붙이는 글 | "뉴스엔조이"에도 함께 올립니다.
정도원 기자의 카페는  http://cafe.daum.net/dowon2017 입니다.


#공교육#학력위조#입시교육#교원승진제도#거짓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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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조해직교사 詩人·한국작가회의회원 전교조 대구교육연구소장 교육민주화동지회 부회장 저서 : 『교단으로 돌아가면』 『우리교육, 무엇이 문제인가』 『겨울나무는 외롭다』 『더 나은 교육은 가능하다』 『교육보다 교사가 먼저다』 『삼백예순날 하냥 외롭고 순결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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