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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

'책을 읽고 있는 화가의 아들, 티투스 판 레인' 렘브란트 판 레인, 1665년경, Kunsthistorisches Museum, Wien, Gemaldegalerie, Vienna
▲ '책을 읽고 있는 화가의 아들, 티투스 판 레인' 렘브란트 판 레인, 1665년경, Kunsthistorisches Museum, Wien, Gemaldegalerie, Vienna
ⓒ 비엔나 미술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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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를 쓴 티투스가 멋진 정장을 하고 어두운 배경 속에서 책을 읽고 있습니다. 빛은 티투스의 얼굴과 손 그리고 책에 ‘모여’ 있습니다. 뒤의 배경엔 티투스의 머리 부분을 드러나게 하기 위해 은은하게만 빛이 퍼져 있을 뿐입니다. 한마디로 사실적인 빛이 아니라 빛을 마음대로 배치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상상의 빛’입니다. 화가 렘브란트의 마술입니다.

“렘브란트는 쉬지 않고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그것은 빛의 도움으로만 색을 칠하는 것과 빛을 통해서만 드로잉하려는 것이다.” - <렘브란트-빛과 혼의 화가> 중에서

사진으로 보는 이 그림은 전반적으로 너무 어두워서 느낌이 줄어듭니다. 전시회장에서 마음에 들어서 이 그림의 사진이 든 카드도 구입했지만 역시 너무 어둡습니다. 실제로 전시회장에 가서 보거나 실제 크기로 봐야 매력을 알 수 있습니다. 벽에 걸린 그림들은 관객들이 뚫어지게 자기를 쳐다보는 것을 반깁니다. 관람객의 지나친 접근을 막는 저지대를 야속하게 쳐다봅니다. 

우선 어렵게 얻은 아들이기에 아버지 렘브란트의 애정이 얼마나 컸겠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렘브란트의 부인 사스키아는 티투스 이전에 세 아이를 낳지만, 매번 얼마 못 가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티투스가 태어났어도 몇 주를 근심 속에 지냈는데 다행히 티투스는 죽지 않았습니다.

전반적으로 은은하다고 할 수 있는 이 그림은 빛과 어두움의 은근한 대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시 주변 사람들은 사실적인 그림을 좋아했고, 그림을 주문받아 그리곤 했던 렘브란트에게 그런 점을 요구했습니다. 그렇게 그림을 그리기도 했지만 렘브란트는 실제로 추구하는 바가 달랐습니다.

“그의 아들의 초상화 ‘책을 읽고 있는 화가의 아들, 티투스 판 레인’은 단순함으로 거둔 혁명이다. 본질을 집어내는 데 있어서 이 그림보다 더 압축적일 수 없다. 인물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빛은 어둠을 흐트러트린 다음 얼굴과 손만을 비춘다.” - <조토에서 세잔까지> 중에서

그는 몇몇 세부는 최대한 세심하게 그리는 반면 나머지 부분은 형태에 조금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그런 작업 방식을 고집했다고 합니다. 선보다 색채를 중요시한 19세기 프랑스의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가 극사실적이고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그림의 화가 다비드나 앵그로의 그림을 싫어했던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사실 그대로만을 그리는 것은 화가에게 있어 정말 지치게 하는 요소가 될 것 같습니다. 

더욱이 아들을 그리는 데 있어 더욱 그는 자유로움을 그것도 정성을 다하면서 누렸을 것입니다. 흐릿한 티투스의 얼굴은 미소를 짓는 것도 같고 명상에 빠진 것도 같습니다. 또는 책 내용을 읊조리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물결치는 곱슬머리도 어두운 배경 속에서 살아 있습니다.

독서를 강조한 듯 양피지 느낌이 드는 책에서도 광채가 납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책장 하나하나를 정성스레 그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은은한 빛줄기가 티투스의 이마에 직접 떨어지고 펼쳐진 책에는 반사된 빛이 표현된다. 어둠 사이에서 화면 전체를 감도는 ‘빛’은 물질성을 넘어 정신의 상태에까지도 환기시키는 위대한 마력을 지니고 있다.” - 전시회 그림 설명 중에서

잠시 곁가지로 빠집니다만, 제가 좀 구식이라 이런 '해묵은' 책을 들고 있으면 더 깊게 글 속에 빠져들 것 같네요. 조금은 거친 책장을 매만지면서요. 개정판으로 나온 근사한 책보다는 곧 사라질 누렇고 가벼운 구판이 더 마음에 들 때가 있습니다. 가끔 누렇게 바랜 책들을 도서관에서 빌려보곤 하는데, 세월이 눅눅하게 젖어 들어간, 그래서 찾는 이도 거의 없는 그런 책들엔 다른 느낌이 듭니다. 몇 백 년 된 그림은 더욱 그렇지요.

뜬금없습니다만, 제가 다니는 방송통신대의 중앙 도서관에는 아직도 책 뒤에 대출자 명단을 적어 끼워 넣는 방식의 모습이 남아 있는 책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런 책도 대출 받을 때는 인식기로 표지에 있는 바코드를 찍지만, 안쪽에는 예전의 볼펜 자국 남아 있는 카드가 고정 봉투와 함께 그대로 남아 있는 책들이 있습니다. 십여 년 전의 최근 대출 날짜 필체를 보면 기분이 묘해집니다. 영화 <러브 레터>가 생각나네요.

렘브란트는 후대인에게 이런 찬사도 받습니다.

“하늘에서 떨어진 빛과 땅에서 솟아난 어두움의 길항, 풍성한 톤과 색채의 축제, 그 위를 내달리는 거친 붓놀림, 그리고 그 가운데서 살아 꿈틀대는 생명의 힘. 이것이 많은 후대의 거장들이 두고두고 렘브란트를 격찬한 이유이다. 그는 진정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뛰어난 '빛과 영혼의 마술사'라고 하겠다." - <화가와 모델> 중에서

위의 그림의 실물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 밝게 찍힌 제 사진을 덧붙입니다. 그저 실물이 어땠는지만 확인하시고, 실제 그림을 뚫어지게 보시기 바랍니다.
                  
'책을 읽고 있는 화가의 아들, 티투스 판 레인' Kunsthistorisches Museum, Wien, Gemaldegalerie, Vienna
▲ '책을 읽고 있는 화가의 아들, 티투스 판 레인' Kunsthistorisches Museum, Wien, Gemaldegalerie, Vienna
ⓒ 박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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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는 네덜란드 레이덴에서 태어났습니다. 고국에서 성장해서 그림을 배운 렘브란트는 당시 이탈리아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유학파 화가들이 표현하지 못한 빛의 효과를 익혔습니다. 굳이 유학을 갈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없다는 것도 이유가 되었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당시 이탈리아 지역의 여러 도시들은 문화의 선진 지대였습니다. 회화 분야도 그랬고요. 능력있는 이들에게 유학은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대신 렘브란트는 유학을 다녀온 스승으로부터 기법을 완전히 습득했습니다. 당대 유행하는 사조를 정식 과정으로 교육받지 않는 것이 때로는 상상력과 개성 발휘에 한 몫을 할 때가 있습니다. 렘브란트가 죽을 때까지 개성 있는 화가로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도 그런 경력이 작용했을 것입니다.

렘브란트는 초상화가로 이름을 날렸는데 그대로만 살았으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성공을 하기도 했습니다. 해부학 강의를 주제로 한 집단초상화가 대표적인 것인데(저는 이 그림이 참 싫습니다) 그걸로 명성을 얻습니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인간의 내면 세계와 영혼의 빛과 그림자를 탐구하기 시작하자 일반인들의 환호로부터 멀어졌다." - <화가와 모델> 중에서

“그(렘브란트)는 일찍부터 인간의 얼굴에 매료되었다… 하지만 렘브란트가 관심을 둔 것은 그 자신의 얼굴이든 남의 얼굴이든 얼굴의 겉모양이 아니었다. 그는 얼굴에서 표현되는 정신의 흐름에 거의 강박적으로 집착했으며, 그 때문에 결국 자신의 성공적인 위치와 친구들의 존경마저 잃게 되었다. 하지만 렘브란트의 그림에서는 인간의 외면과 내면이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 - <웬디 베켓 수녀의 명화이야기> 중에서

17세기 네덜란드는 황금의 시대였습니다. 특히 문화 분야가 그러해서, 네덜란드는 유럽의 근대 문화의 중심지 중 한 곳이 되었습니다. 스페인으로부터 정치적, 종교적으로 독립한 후 생겨난 자유로운 분위기 때문에 전 유럽의 지식인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데카르트가 그 한 예입니다.

당시 네덜란드는 칼뱅주의의 영향으로 회화는 사실주의 화풍이 있었고, 단순하고 일상적인 사물들을 새롭게 강조하는 풍토가 지배적이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좀 더 자세히 설명드릴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스페인의 가톨릭에 대항해 종교의 자유를 얻었지만, 그러나 그 주체 세력은 또 다른 권력이 되어 사회를 지배했습니다. 모든 것에 대한 자유가 있긴 했지만, 칼뱅주의의 엄격함이 사회와, 사람들의 삶과 생각을 지배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모든 그림이 우상이라고 여겨져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유로웠습니다.

다만 스페인으로부터 종교의 자유를 쟁취한 사람들이 다른 종파를 억압하는 것은 모순이기도 했고, 네덜란드는 신정국가도 아니었기에 모든 교파가 허용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나라와의 무역에 크게 의존해 사는 네덜란드 사람들은 관용이라는 미덕을 저절로 배우게 되었습니다.

물론 주요 종교는 칼뱅주의였지만, 다른 종파에 대한 관용이 네덜란드 사회에 살아 있었습니다. 역사적 예를 하나 듭니다. 프랑스의 앙리 4세 때 신교의 신앙 자유를 허용하는 계기가 된 낭트 칙령이 17세기에 루이 14세에 의해 폐기되자, 많은 프랑스 신교도들이 네덜란드로 몰려온 이유도 그러한 배경 때문입니다.

“(렘브란트의) 그림들은 네덜란드의 자유로움을 잘 구현하고 있다… 그는 모든 그림을 우상이라 하여 거부하는 생경한 칼뱅주의의 인물 혹은 전통적인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는 화가가 아니라, 자신의 그림을 그리는 자유로운 인간이다. 그는 예수에 대해서도 신성을 강조하기보다 인간적 고통을 강조하고 있다. 군중 속의 예수는 다만 부드러움을 더해 가지고 있을 뿐 다른  인물과 전혀 다른 존재로 그려져 있지 않다. 이것은 규약과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풍토 때문에 종교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이 들어와서 살 수 있게 해준 네덜란드의 문화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가 그린 성경상의 인물은 답답하게 얽매인 어느 한 종파의 신이 아니라 신성 그 자체여서 보는 사람 누구나 다 자신의 신을 그 그림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 <네덜란드-튤립의 땅, 모든 자유가 당당한 나라> 중에서

렘브란트의 위대함은 여기에 있습니다. 모든 그의 약점까지도 커버하는 위대함입니다.

루벤스

'시몬과 에피게니아' 페터 파울 루벤스, 1617년경, Kunsthistorisches Museum, Wien, Gemaldegalerie, Vienna
▲ '시몬과 에피게니아' 페터 파울 루벤스, 1617년경, Kunsthistorisches Museum, Wien, Gemaldegalerie, Vienna
ⓒ 비엔나 미술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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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상 이 정도 크기로밖에 보여 드리지 못해서 아쉽네요. 실제 작품은 세로가 2m, 가로가 3m 가까이 되는 대작이거든요.

위 그림은 루벤스가 문학작품에서 모티프를 찾아낸 작품입니다.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입니다. '데카메론'은 10일간의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세 청년과 일곱 숙녀가 페스트 병을 피해 교외 별장에 있으면서 10일에 걸쳐 순번대로 이야기한 100개의 화제를 수록했습니다. 위 그림은 그 이야기 중 하나의 한 장면입니다.

귀족출신이나 방탕하여 시골 농가에 쫓겨 가 살고 있던 시몬이, 아리따운 에피게니아의 잠든 모습을 보고 첫눈에 반하는 장면입니다. 후에 시몬은 마음을 잡고 공부를 해서 에피게니아와의 결혼에 성공합니다.

문학작품에서 소재를 땄지만 신화 속 장면 같습니다. 루벤스의 일차적 관심은 불그스레한 볼과 하얀 피부를 가진 육감적인 신체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주변에 그려진 여러 동물들은 각기 나름대로의 의미를 상징합니다. 그림 밑의 긴꼬리원숭이는 어리석음을, 발 밑의 개는 믿음을 나타내는 식입니다. 또 당시의 미인의 기준을 엿볼 수 있습니다.

렘브란트를 소개하면서, 17세기 북부 유럽의 또 다른 화가 루벤스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네요. 렘브란트와 루벤스는 동시대 사람이면서 너무도 다른 삶을 살았기에 자주 비교됩니다. 한마디로 루벤스는 부귀와 명예, 가정의 행복을 동시에 누린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게다가 루벤스는 미술의 모든 분야를 넘나들면서 재능을 발휘했습니다. 

17세기의 바로크 회화는 둘로 나뉠 수 있습니다. 가톨릭적이고 귀족적인 화풍과 프로테스탄트적이고 시민계급적인 경향으로 나뉠 수 있는데, 렘브란트는 후자에 루벤스는 전자에 속합니다. 그러니까 렘브란트가 태어난 북부 네덜란드는 프로테스탄트가 지배했고, 그 남부지역 그리니까 한때 네덜란드 영토이기도 했던 지금의 벨기에 지역(플랑드르 지역)은 스페인 지배 하에 있었고 그래서 가톨릭의 영향 하에 있었습니다. 비교적 서로 가까운 지역에서 자랐지만 다른 교육 환경을 지닌 셈입니다.

루벤스는 렘브란트와 달리 라틴학교를 다니면서 고전 미술과 라틴어를 배워서 나중에 큰 도움을 받습니다. 이탈리아의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선배 화가들의 예술을 배웁니다. 그는 온 세계를 자기 고향으로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궁정화가가 되고, 공방도 운영해서 돈도 많이 법니다. 

위의 그림을 보면 다음의 설명이 수긍이 갑니다.

"플랑드르 출신의 루벤스는 17세기 유럽 바로크 회화의 역동적인 힘과 충일한 생명감을 가장 선명히 드러내 보인 거장이다. 그의 형태는 용트림하는 듯 격정적이고 색채는 감각적이며 화사하다. 당시 플랑드르 지방의 섬세하고 사실적인 화풍과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고전적인 전통을 잘 융합해 매우 개성적이면서도 인상적인 화풍을 창안했다." - <화가와 모델> 중에서

루벤스는 외교관으로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1630년 영국과 스페인 간의 평화조약 체결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이 그 한 예입니다. 오랜 기간 이른바 평화 해결사 역할을 톡톡히 해냅니다.

그의 그림에는 종교적 주제와 신화적 주제가 마음껏 인용됩니다. 당시에는 여성의 나체를 그리는 것이 금기시되었으나, 신화에 있어서 만큼은 용인되었습니다. 지난 번 기사에서 처럼 신화 속 인물은 나신으로 등장하기 일쑤고, 더욱이 여신일 경우에는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데 있어 화가들이 주저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최상의 미인을 신화 속 여신을 통해서 구현해 나갔습니다.

“(루벤스의 작품에서는) 종교적 감성과 함께 관능적 기쁨까지도 수용하는 일종의 가톨릭적 휴머니즘이 들어 있으며, 에너지로 충만한 낙관적인 정신성이 엿보인다… 루벤스의 작품이 지닌 매력은 바로 활력에 있다. 즉 살아 있다는 것의 의미, 그리고 살아가면서 주어지는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를 즐겁고 중요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 <웬디 베켓 수녀의 명화이야기> 중에서

무척 낙관적인 루벤스의 면모를 위의 인용 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렘브란트도 그랬지만, 신화 속 여신의 얼굴에 자기 부인의 얼굴을 그려넣었다는 점입니다. 물론 나신의 모습이고요. 특히 첫 번째 부인과 사별한 후 만난 두 번째 부인 엘렌에게는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자리를 줍니다.  

렘브란트와 조금은 다르게 루벤스는 사실성을 중시했고 누구보다 그걸 자연스럽고 능숙하게 해냈습니다. 초상화 그릴 때는 더욱 그랬습니다. 그에게 어울리는 참 멋진 표현이 있습니다.

“실제로 루벤스에게 있어 온 세상은 잘 차려진 잔칫상과 같은 것이었는데, 오직 그만이 완전히 소화해낼 수 있었다.” - <조토에서 세잔까지> 중에서

두 거장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현장에서 진품을 봐야 그 섬세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더욱이 그러고 나서 관련 자료를 조금이라도 접할 수 있다면 시야도 넓어지고 세상을 받아들이는 가슴도 넓어질 것입니다. 전시회장은 현재의 다른 모습의 세상으로 통하는, 또 과거의 무대 속으로 들어가는 타임머신의 장소입니다.

덧붙이는 글 | <비엔나 미술사박물관전>, 덕수궁 내 덕수궁미술관, 9월 30일까지, 02-368-1414, 월요일 휴관, 저녁 8시 반까지.



#브루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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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 번역가이자, 산문 쓰기를 즐기는 자칭 낭만주의자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여행, 책 소개, 전시 평 등의 글을 썼습니다. 『보따니스트』 등 다섯 권의 번역서가 있고, 다음 ‘브런치’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https://brunch.co.kr/@brunoclo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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