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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뫼마을 강변엔 하루가 다르게 연둣빛으로 물들고 있다.
ⓒ 김도수
꽃샘추위가 한바탕 휘몰아치고 간 뒤 봄비가 내리더니 진뫼마을 강변엔 하루가 다르게 연둣빛 물감이 번져 나가고 있다. 겨우내 산골짜기마다 바짝 엎드려 있던 얼음들은 봄비에 녹아 '졸졸' 노래 부르며 남해 바다 망덕포구를 향해 줄달음치고 있다.

섬진강 상류지역인 진뫼마을 앞 강은 겨울철이면 강물이 줄어들면서 이끼 낀 돌들이 하나 둘씩 고개를 내민다. 강물 속에 잠겨 있던 돌들은 어디 세상 구경 좀 하자고 고개 한 번 내미는데 시린 강바람은 여지없이 온몸을 때리며 움츠러들게 만든다. 그 칼바람 맞으며 봄이 오기를 기다려온 돌들이 불어난 강물에 몸 담그며 '얼씨구 좋구나' 소리치며 좋아하고 있는 듯 강물소리 소란스럽다.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강변엔 개구리들이 '개굴개굴' 노래하며 농사철이 다시 시작됐으니 어서 논밭으로 나오라고 불러댄다.

'진뫼마을 농부님들! 겨우내 회관 방에 모여 편히 놀았으니 어서 논밭으로 나오시지요.'

▲ 봄이 오는 섬진강
ⓒ 김도수
봄비에 불어난 강물이 징검다리를 넘기 시작하면 진뫼마을 농부들은 마을회관 방에서 '농한기 날' 해단식 갖고 논밭으로 나가기 시작한다. 농부들 고무신 속에 '찍찍' 물소리 내며 들녘으로 나가는, 매화꽃 터진 진뫼마을의 봄.

겨우내 회관 방에 모여 사는 진뫼마을 사람들은 설 명절이 지나면 "올 한 해 또 얼마나 뛰어댕겨야 눈발이 휘날린다냐" 하며 쑤시는 어깨와 팔 다리를 주물럭거리며 지난 겨울을 너무도 아쉬워한다. 설이 지나고 따스하게 햇볕 내려 쪼이는 날, 마당에 아물아물 아지랑이 피어오르면 어깨를 축 늘어뜨리던 부모님.

"아이고, 어쩌꺼나. 벌써 마당에 아지랑이가 피어나네. 해가 갈수록 농사일 힘에 부쳐 죽겄는디 또 봄이 돼야 불었는개비여. 이 놈의 농사, 안 져 불 수도 없고. 언제나 핀히 한 번 봄맞이 해 본다냐."

▲ 저리소산 강변 길에 겨우내 얼어붙었던 얼음들, 봄비에 녹아 내리면 마을 사람들은 장천선길(장산리와 천담리를 잇는 길)을 따라 5~6㎞씩 걷는다.
ⓒ 김도수
꽃 피고 새 울어 한 해의 농사가 시작된 이 봄날, 마을회관 현관에 벗어놓은 신발 수를 세어봤다. 갈수록 점점 줄어드는 신발 짝을 보니 '이제 진뫼마을도 문 닫을 때가 서서히 다가오는가' 싶어 씁쓸하기만 하다.

폐가로 방치된 고향집을 사서 돌아오던 98년 3월 이후 벌써 마을 어르신들이 열두 분이나 돌아가셨다. 지금 현관에 놓여진 신발 켤레 수와 엇비슷한 숫자다. 그때나 지금이나 밖으로 흘러나오는 회관방 텔레비전 소리는 여전한데 마을 사람들 목소리는 자꾸만 줄어들고 있다.

눈보라 휘날리며 꽃샘추위가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주말 오후. 회관 문을 열고 들어가니 서울로 엉덩이뼈 관절 수술을 하러 갔던 아랫집 점순이네 아버지가 의자에 앉아 마을 사람들과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아이고! 오랜만이네요. 어떻게 수술은 잘 되었다요? 가까운 데 같으먼 한 번 가본디 병문안 한번 못 가보고 말았네요. 죄송합니다."

"별 소리를 다 허네. 수술은 아주 잘 됐다고 허도만. 물리 치료를 쬐께 더 받고 니리(내려)가라고 힜는디 하도 집을 오랫동안 벼둥게 (비어두니까) 궁금히서 못 있겄더라고. 인자 수술 힜응게 괜찮 것제."

▲ 강변에 아지랑이 피어오르면, 진뫼마을 농부들은 회관 방에서 '농한기 끝' 해단식 갖고 논밭으로 나가기 시작한다.
ⓒ 김도수
점순이네 아버지는 몇 년 전부터 왼쪽 엉덩이뼈 관절이 안 좋아 절룩거리며 힘들게 농사를 지어왔다. 다리가 아프니 지난해 추수 일은 모두 점순이네 어머니 몫이었다. 갈수록 통증이 심해지자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지난해 가을 추수 끝나자마자 서울로 올라가 수술을 받고 오랜만에 내려온 것이다.

지난 겨울 가끔 고향집에 갈 때마다 아랫집 점순이네 부모님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아내가 물었다.

"아랫집은 어디 갔는가 벼.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만 들리제 통 사람 소리 한 번 들리지 안 혀."
"응, 점순이네 아부지가 다리 아파서 지팡이 짚고 다녔잖여. 서울로 수술 받으로 갔데아. 아랫집도 없고, 윗집 재섭이네 어메도 서울 자식들 집으로 올라가 불어서 없고, 시방 위 아랫집 다 비어 불었어. 따순 봄이나 돼야 니로실(내려오실) 것이고만."
"마을 사람들 중 누구 병문안 가면 봉투라도 하나 허제 그러요? 병원에 가보지는 못할 망정 뭐라도 사 드시게 봉투 하나 만들어 서울간 사람 편에 보냅시다."

▲ 작년 가을, 점순이네 아버지가 지팡이 짚고 벼를 말리고 있다. 점순이네 아버지는 몇 년 전부터 엉덩이뼈 관절이 안 좋아 힘들게 농사를 지어왔다.
ⓒ 김도수
병문안 가는 사람 만나지 못해 '봉투'는 겨우내 아내 핸드백 속에 들어 있었다. 그러다 오랜만에 대문 앞에 서 있는 점순이네 어머니 모습을 본 아내가 달려가 봉투를 내민다.

"이거 얼마 안 되지만 수술힜다는디 가보지도 못하고 뭐라도 마싯는 것 사드리세요. 지난번 한밤중에 왔는디 대문 앞에 차가 받쳐져 있더라고요. 그리서 니로셨는가 궁금히서 아침에 가봤더니 차가 없더라고요."
"응, 집에 갑자기 볼일이 있어서 사위 차로 니뢌다가 안 자고 그날 밤 바로 올라가부렀어. 적(저희) 아부지가 병원에 누워 있는디 자고 갈 수 있어야제. 집이도 애들 갈침선 복잡헐 턴디 뭐더게 요론 걸 들고 와."

받지 않으려는 봉투를 억지로 몸빼 바지 속에 넣고 아내는 내 쪽으로 뛰어와버린다. 먼 친척보다 더 가깝게 지내는 게 이웃이라는데 겨우내 위 아래 집에 사람소리 들리지 않으니 우린 봄이 오기를 무척 기다렸다.

마을 사람들은 봄이 되니 겨우내 쉬었던 몸을 서서히 풀 때가 되었다는 듯 운동하러 강변 길을 나서고 있다.

▲ 진뫼마을 사람들은 설이 지나면서부터 몸만들기(?)에 나선다. 운동 삼아 강변 길을 걷는다.
ⓒ 김도수
"봄 됐응게 인자 몸 추스려야 농사짓제. 심난히도 어쩌겄어. 좋은 전답들, 묵히불먼 안 돼잖여. 아직까지 걸어댕길 힘은 있응게 농사짓기 좋은 전답들은 져야 제, 뭐."

진뫼마을 사람들은 설이 지나면서부터 몸 만들기에 나선다. 처음엔 '윗골'로 2~3㎞씩 가볍게 산책을 나간다. 그런 뒤 일년 열두 달 응달진 저리소산에 눈이 녹으면 그 쪽으로 코스를 바꾼다. 저리소산 강변 길에 겨우내 얼어붙었던 얼음들, 봄비에 녹아 내리면 마을 사람들은 장천선(장산리와 천담리를 잇는 길)길을 따라 5~6㎞씩 걷는다.

무슨 운동을 하든 준비운동을 철저히 해야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다. 겨우내 회관 방에 모여 놀던 진뫼마을 사람들도 운동선수들처럼 몸을 단단히 만들어 농사철을 대비한 몸 만들기에 나선 것이다.

장천선 길은 산과 산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가며 실핏줄처럼 흐르는 섬진강을 따라 난 한적한 비포장 길이다. 길가에 전봇대도 없고 자동차도 거의 다니지 않아 맑은 공기 마시며 깐닥깐닥 걷기에 안성맞춤이다. 지난해 가을, 관청에서 울툭불툭 패인 자갈길 대신 잘게 부서진 돌들을 아스팔트처럼 단단히 다지며 깔아 놓아 늙으신 부모님들께서 걷기에 아주 좋다.

▲ 겨우내 얼어있다 해서 붙여진 '얼음바위' 앞. 도로를 내면서 바위가 잘려나갔다.
ⓒ 김도수
운동 나서는 아버지들은 한 분도 없다. 모두 어머니들뿐이다. 현재 열다섯 가구인 진뫼마을에 아버지들은 모두 여덟 분이 살고 있다. 그 중 여섯 분이 겨울철이면 어머니들과 함께 회관 방에서 노는데 운동 나가는 것은 좀 쑥스러운지 한 분도 없다. 아니, 가끔씩 산으로 약초 캐러 다녀서 평소 운동을 하며 지내서 그런가 보다.

어머니들은 아침밥 드시고 9시쯤 해서 산책 겸 운동을 나선다. 마을을 출발해 천담마을 까지 갔다 오면 5~6㎞쯤 걷게 되는데 2시간 정도 소요된다. 힘이 드는 분은 천담마을까지 안 가고 중간쯤에서 다시 돌아온다. 잘 걷는 사람, 못 걷는 사람이 있으니 단체로 뭉쳐서 가지는 못하고 두 패로 나뉘어 가거나 또는 각자 몸 상태에 따라 조금씩 떨어져 걷는다.

어머니들 중에는 다리가 아파 절룩거리는데도 운동을 따라나서는 분도 있다. 겨우내 움츠렸던 몸, 운동을 해서 남들 농사지을 때 어떡하든 따라 지어야겠다는 각오가 남달라 보인다.

운동 가는 길에 나누는 이야기들도 다양하다. "누구네 자식은 지난번 큰 아파트를 사서 이사를 갔는디 아파트 값이 상댕이(상당히) 올라서 우리가 평생 농사지은 돈보다 훨씬 많이 벌었 불었다"는 둥, "우리 아들은 요즘 건설경기기 안 좋아 일감이 없응게 며칠째 놀아서 답답히 죽겄다"는 등 자식새끼들 살아가는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 장천선 길의 겨울 모습.
ⓒ 김도수
강을 거슬러 마을이 가깝게 다가오자 개구리들이 크게 울어댄다. 농사가 시작됐다는 개구리들 '휘슬' 소리에 어머니들은 맘이 심란들 하신지 점점 걸음걸이가 느려지며 이마에 파인 주름살, 더욱 골 깊어진다.

앞산을 힐끗 쳐다보던 어머니들. 한숨을 푹푹 내쉰다. 땀 흘려 농사짓던 밭들, 이제는 묵정밭으로 변해가는 모습 차마 바라보기 민망해 고개를 돌리고 만다. 뙤약볕 아래 콩밭 매다가 힘들면 소주 한잔 걸치고 내놓던 한스러운 노래가 들려오는 듯하다.

어머니들을 뒤따라 갔던 아내가 마을에 들어서면서 말한다.

"어메들이 평소 저리소에 눈이 녹아야 봄이 온다고 허도만 참말로 저리소에 눈이 녹응 게 봄이 오고만, 잉?"

▲ 장천선 길은 산과 산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가며 실핏줄처럼 흐르는 섬진강을 따라 난 한적한 비포장 길이다. 멀리 운동하는 마을사람들이 보인다.
ⓒ 김도수
봄이면 마루에 걸터앉아 아물아물 아지랑이 피어 오르는 모습을 보고 어깨 축 늘어뜨리던 부모님.

'어머니 아버지! 다시 아지랑이 피어 오르는 '삼대 논'에 볏짚 깔러 가는 봄입니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물고기들, 은비늘 씻으려고 곧 강물 박차고 뛰어오르면 투망질 나서던 그 봄이 활짝 펼쳐지겠지요. 어머니가 상추 넣고 마늘 '쫑쫑' 썰어 얼큰하게 끓여주던 매운탕이 너무도 먹고 싶은 봄날입니다!'

덧붙이는 글 | 김도수 기자는 주말이면 가족들과 함께 고향마을로 돌아가 밭농사를 짓고 있고 전라도닷컴(http://www.jeonlado.com/v2/)에서 고향 이야기를 모은 <섬진강 푸른 물에 징검다리>란 산문집을 내기도 했습니다. 이 기사는 전라도닷컴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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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정겹고 즐거워 가입 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염증나는 정치 소식부터 시골에 염소새끼 몇 마리 낳았다는 소소한 이야기까지 모두 다뤄줘 어떤 매체보다 매력이 철철 넘칩니다. 살아가는 제 주변 사람들 이야기 쓰려고 가입하게 되었고 앞으로 가슴 적시는 따스한 기사 띄우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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