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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쿄에서 오사카로 가는 시속 300km로 달리는 신칸센 열차에서 본 후지산(2006. 12. 17).
ⓒ 윤형권
후지산(富士山). 해발 3776m로 일본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시즈오카현(靜岡縣) 북동부와 야마나시현(山梨縣) 남부에 걸쳐 있는데 한여름인 7~8월을 제외하고는 눈이 항상 쌓여 있다. 서기 781년에 분화가 시작되어 1707년까지 수십여 차례 분화했다는 기록이 속일본기에 있으며, 지금은 휴화산 상태라고 한다.

후지산은 일본인에겐 신앙적 존재이며 '후지학(富士學)'이라는 학문까지 생길 정도다. 일본 나라시대(서기 710~780)의 문인 야마베노 아카히토(山部赤人)는 후지산을 "거룩하고 고귀한 봉우리라서 해와 달도 그 빛을 잃고 구름도 오가지 못하는 신령한 산"이라고 말 한 바 있다.

@BRI@일본인들이 신앙처럼 떠받치고 있는 후지산을 조선시대의 선조들은 뭐라고 말할까?

임진왜란이 끝난 후 조선통신사들이 1607년부터 1811년 까지 12차례에 걸쳐 일본을 방문하였으며, 이들 중 1~5차까지 통신사들이 후지산을 본 감흥의 기록을 중심으로 후지산에 대한 소감의 변화를 살펴보자.

조선통신사들의 소감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필자는 지난 17일 오후 4시 경 도쿄에서 오사카로 가는 신칸센 열차 안에서 후지산을 보았다. <오마이뉴스 한일시민친구만들기>를 마치고 개인적인 일로 오사카를 방문하는 길이었다.

후지산을 처음 본 것은 1987년 후쿠오카 ~ 교토 ~ 오사카 ~ 도쿄로 여행하는 도중 신칸센 열차 안에서다. 그때는 후지산이 아주 멀리 보였기 때문에 별다른 기억이 없다. 그러나 이번 여행에서 비록 달리는 열차 안에서 몇 분 동안이었지만 거리가 가까워 자세히 볼 수 있었으며 아주 인상적이었다.

도쿄역을 출발한 신칸센 열차는 시속 300㎞로 달렸다. 40분 쯤 흘렀다. 오른쪽 차창 밖으로 일본 농촌의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산등성이 뒤로 하얀 눈으로 덮인 또 하나의 산이 불쑥 나타났다. 마치 거대한 피라미드가 우뚝 서 있는 듯했다.

시선을 놓을 수가 없었다. 열차가 달리면서 점점 가까워지는 후지산은 신비함 그 자체였다. 평지에서 불현듯 솟아오른 후지산의 모양은 마치 삿갓을 닮기도 했지만, 나약한 인간들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 거인처럼 보였다. 매우 짧은 시간이었지만 후지산에 대한 느낌은 매우 강렬했다.

이제부터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우리 선조들은 후지산을 어떻게 평했는지 알아보자(정응수, 남서울대 일본학과, 조선통신사가 바라본 후지산, 2005).

때는 서기 1607년. 임진왜란이 끝나고 일본은 국교 재개를 요청한다. 이때 '신의(信義)'를'통(通)'하게 하는 사절단이라는 뜻의 '통신사'가 1811년 까지 총 12회에 걸쳐 일본을 방문한다. 12회까지의 통신사 일행이 모두 후지산을 본 것은 아니다. 여기서는 1회부터 5회까지 통신사들이 후지산을 보고 감흥을 기록했는데, 당시 일본을 바라보는 조선의 시각이 잘 나타나 있다.

1607년 1차 조선통신사로 부사 경섬(1562~1620)이 임진왜란 포로 송환, 전후 국교정상화 문제로 에도(지금의 도쿄)를 방문한다. 경섬은 5월 16일경 후지산을 처음 보게 되는데, '해사록'이라고 하는 통신사 일행의 일본 방문기에 후지산을 본 감흥을 기록했는데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 후지산은 7~8월을 제외하고는 항상 눈이 쌓여 있다(앞의 사진에서 5부 능선에서 정상까지만 오린 장면).
ⓒ 윤형권
"형태가 시루 엎어 놓은 것 같다. 산 중턱 이상을 눈이 한 장(丈)이나 쌓여 있어 마치 한겨울 같고, 바라보면 은산옥봉(銀山玉峯)이 공중에 솟아 있는 것 같았다. 산의 높이와 넓이가 모두 4백리라고 하는데, 준하, 신농, 갑비, 상야, 이두 등 경계가 그 아래 둘러 있다. 봉우리도 계곡도 초목도 없고 다만 모서리 없는 한 덩어리의 큰 돌일 뿐이다."

경섬은 후지산을 보고 "은산옥봉이 공중에 솟아 있는 것 같다"며 후지산의 높이에 대한 충격을 드러냈다. 그러나 "다만 모서리 없는 한 덩어리의 돌일 뿐이다"라고 기록한 것을 보면 신기하기는 하지만 하나의 큰 돌덩어리에 불과한 산이라고 여겼다.

이것은 아마도 임진왜란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고, 또 포로 송환 문제와 국교 정상화 문제 등으로 조선과 일본과의 관계가 아직 원만하지 못하다는 것을 후지산을 바라보는 통신사의 시각에서 엿볼 수 있다.

2차(1617년) 통신사는 교토의 후시미성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뒤를 이은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만나고 돌아갔기 때문에 후지산을 볼 수가 없었다.

3차 통신사인 강홍중(1577~1640년)은 1624년 12월 5일 후지산을 처음으로 보았는데, "산이 큰 평야 가운데에 있는데 세 고을 경계에 걸쳐서 우뚝하게 솟았다" 고 말했다.

이어 "흰 구름이 항상 산허리 아래에 돌아 쉴 새 없이 하늘을 가리고 산꼭대기에는 사철 늘 눈이 쌓여 오뉴월 염천에도 녹지 않으니 바라보매 두려웠다. 참으로 천하장관"이라고 말했는데, 이때까지도 조선과 일본 사이에 관계가 썩 원만하지 않았던 탓인지 후지산을 그냥 하나의 산으로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1636년에 4차 통신사인 김세렴(1592~1645년)은 일본인 승려 소장로라는 사람으로부터 후지산을 본 감흥을 시로 써 달라는 청을 받아들였는데, 김세렴이 쓴 시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하늘 가 후지산이 눈에 쌓여 우뚝하다.
한 벌에 말 멈추고 좋은 경치 가려 보네.
옥수엔 새벽이라 돋는 해 매달리고,
은대는 차갑다. 물결을 눌렀구려!
신선이 사나 보다.
삼신산이 가깝고, 기색은 높다란 오악에 다다랐네.
여기서 선도는 바로 곧 지척이건만,
몇 사람이 올라 보고 긴 노래를 불렀을꼬.


이 시를 보면 1과 3차의 통신사 일행은 후지산을 '하나의 자연'으로 여긴 반면 4차 통신사 일행은'신선이 사는 곳'으로 표현했다. 이는 1차 통신사인 경섬이 '돌덩이에 불과한 산'이라고 묘사한 것과는 대조적인 차이가 있다. 후지산을 문학적 관점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1643년 5차 통신사인 부사 조경(1586~1669)도 "이곳이 선경인 줄 천하가 이미 아는데 세상사람 부질없이 봉래·영주 얘기 하네"라고 시를 읊었다. 이는 4차 통신사와 마찬가지로 후지산을 신선이 사는 곳인 '선계(仙界)'로 확장함으로써 후지산을 문학의 울타리 안으로 끌고 온 셈이다.

1607년부터 1643년까지 약 40여 년 간의 세월 동안 후지산을 바라보는 선조들의 시각의 변화는 조선과 일본간의 관계변화와 함께 17세기 조선시대의 문학적 관점이 변화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17세기에 들어서서 조선시대 화풍은 신선을 주제로 하는 것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자연이 빚은 후지산의 변화는 미미하고 그 속도 또한 인간이 느끼기 어려울 정도다. 그리고 인간이 느끼는 감흥을 측량하기는 어렵지만 표현을 기록한 것을 살펴 보건데 인간이 자연을 바라보는 본성의 변화 또한 크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인간이 만든 기술과 도구의 변화는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고 변화무쌍할 따름이다.

▲ 도쿄~오사카 신칸센 열차에서 본 후지산(2006. 12. 17)
ⓒ 윤형권

덧붙이는 글 | 조선통신사가 본 후지산에 대한 기록은 남서울대 정응수 교수의  '조선통신사가 바라본 후지산' 이란 제목의 논문(2005년도)을 참조로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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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깎는다는 것은 마음을 다듬는 것"이라는 화두에 천칙하여 새로운 일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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