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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줄기가 그칠 줄 몰랐다. 정확히 3년 전 선유도에 왔었다. 벼가 누렇게 익어갈 무렵이었으니까 가을이었다. 그때도 자전거를 타고 이 섬 저 섬을 기웃거렸다. 이번에는 직접 자전거를 가지고 들어갔다. 장재미 다리 위에서 갯강구를 만났다. 자전거를 멈추고 녀석의 동태를 살폈다. 잔뜩 긴장한 모습니다. 비가 오는데 무슨 청승으로 자전거를 타고 혼자서 돌아다니느냐며 씰룩거린다. 이 녀석들은 인간들보다 오래 전에 이곳에 자리를 잡았을 것이다.

▲ 장자교에서 본 선유도해수욕장과 망주봉
ⓒ 김준

▲ 장자교 사이의 뱃길
ⓒ 김준
선유도와 장자도를 잇는 다리 장자대교는 1986년에 완공되었다. 다리를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자전거와 오토바이 그리고 이곳에서만 통하는 '콜택시' 등이며, 최근에는 사륜오토바이(ATV)와 골프장에서 이용하는 전동카트 등도 이용하고 있다. 무녀도와 선유도를 있는 선유대교와 장자대교는 다리도 볼만 하지만 다리 위에서 보는 망주봉과 선유해수욕장의 정취 또한 아름답다.

장자도 다리에서 갯강구를 만났다

빗방울이 안경을 덮어 더 이상 자전거를 타기 어렵다. 멈춰 섰다. 다리 한가운데였다. 그 때도 여기서 할매바위를 보면서 사진을 찍었다. 빗물이 눈가를 타고 흘러내린다. 장자할머니 바위는 대장도 뒷산에 위치해 있으며 선유도를 향하고 있다. 마치 엄마가 아이를 업고 하얀 귀저기로 질끈 동여맨 모습이다. 이런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여기 계신 분은 할머니이고, 할아버지는 진대섬(횡경도 북쪽 2km 무인도)에 갓을 쓰고 이쪽을 보고 있는 바위가 있어. 고것이 '장자할아버지 바위'여. 두 부부가 살다가 남편이 인자 서울로 과거를 갔어. 남편이 과거를 가서 급제를 혔어. 서울서 인자 과거를 헌다치면 삼현육각을 잽히고 이렇게 온다드만. 부인이 이 소식을 듣고 하도 반갑고 수년을 공부를 허다가 과거를 혔다는 소식을 듣고 이 냥반이 참 반갑거든. 마중을 나가는디 애기를 업고 술상을 하나 채려가지고 나갔는디. 아 남편이 소실을 하나 얻어가꼬 오네. 소실을 얻어 가꼬 온게 이 냥반이 돌아 앉아 버렸어. 그렁게 그대로 술상이 든 채로 바위로 굳어 버렸어"(군산도서지)

ⓒ 김준
또 다른 이야기로는 '장재할매가 부처님께 천일기도를 통해 지극정성으로 남편이 과거에 급제하게 해 달라고 빌었는데, 남편은 서울에서 과거준비를 하면서 글을 가르치던 양반집 딸과 눈이 맞았던 모양이다. 과거 급제 후 그 여인과 손을 잡고 내려오는 것을 부처님이 노해서 두 사람을 돌로 변하게 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곳 주민들은 사랑하는 연인이 손을 잡고 '장자할매'에게 소원을 빌면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안개 낀 고군산군도의 모습은 신비스럽다. 날씨가 좋은 날 볼 수 있는 비경들 못지않게 안개 낀 날 볼 수 있는 선유도는 '정말 신선이 놀았을 정도'로 신비스럽다. 선유도를 기준으로 대장도와 장자도가 연결되어 있고, 다른 쪽으로 무녀도와 선유교가 놓여 있다. 이들 섬을 관리도, 방축도, 횡경도, 야미도, 신시도, 두리도 등이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다. 그래서 바다의 호수라고 했던 모양이다. 장자도는 학생들의 통학을 위해 만들었던 다리로 대장도와 연결되어 있다. 일반적으로는 대장도까지 포함해 장자도라고 하지만 자연마을은 가제미(장자도), 장제미(대장도)로 구분한다.

지금은 선유도에 비해서 경제적으로나 인구로 보나 작은 섬이지만 이곳은 일찍부터 자연포구로 중요한 피항지였다. 그런 덕에 해방 전후 장자도는 90여 호가 마을을 이루며 조기잡이 배에 기대어 살았다. 천혜의 조기어장 덕에 일제는 1917년 어청도 어업조합 이후 두 번째로 1919년 이곳 장자도에 고군산군도 어업조합을 만들었다. 수산자원이 풍부했던 까닭에 이를 수탈하기 위한 전초기지를 만들었던 셈이다.

▲ 관리도가 바라보이는 포구에서는 낚시를 하는 관광객
ⓒ 김준

▲ 장자도의 가제미마을과 포구
ⓒ 김준

▲ 녹이 슬어 버린 멸치삶는 솥
ⓒ 김준
1960년대 칠산바다 조기잡이가 활발하던 시기에 장자도 일대에는 밤에 불을 켜고 조기를 잡는 모습이 불야성을 이루었다. 그래서인지 선유팔경 중에 장자어화(壯子漁火)를 으뜸으로 꼽는다. 당시 장자도와 앞 섬 관리도 사이에는 주목망(이곳 사람들은 '주곡대'라고 칭함)으로 민어, 조기, 청어, 우럭 등을 잡았다.

관리도가 바라보이는 포구에서 우비를 입은 연인이 낚시를 하고 있다. 작은 놀래미들의 입질에 재미가 있는지 멈출 줄 모른다. 장자도는 마을 지형이 '가제미'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가제미와 장제미의 어업은 낭장망을 이용해 멸치잡이와 까나리를 주로 잡았다. 특히 이곳에서 만든 까나리 액젓은 입맛을 아는 단골들만 찾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최근 장마와 해파리의 극성으로 그물을 넣지 못하고 있다.

▲ 장제미 마을이 있는 대장도
ⓒ 김준

ⓒ 김준
장재할매에게 무슨 소원을 빌까

대장도에는 지금은 숲이 우거져 들어가기 쉽지 않지만 어화대라는 당집이 있다. 그리고 당집이 만들어지기 전인 1950년대 이전에는 갯가에서 당제를 지냈다. 음력 섣달이나 다음해 정월달에 날을 받아 지내는 '대장도 당제'는 지금은 방파제로 사라진 '지만터'라는 곳에서 지냈다. 멀리 부안 돈지나 곰소장을 이용해 제물을 사서 정성스럽게 지냈다. 그리고 당제가 끝나면 집집마다 작은 상에 간단한 고사음식을 들고 나와 갯가에서 거리제를 지냈다.

이때 당골이 각각 재수굿을 해주었으며, 주민들이 재수굿이 끝나면 사고 없이 고기를 많이 잡고, 집안 모두 평안하길 기원하며 소지를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사상의 밥과 국을 조금씩 떠서 백지나 짚 위에 떠놓는 '사물'로 마무리했다. 어화대는 장자어화에서 비롯된 것으로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 집이었지만 지금은 무너져 흉가로 변했다. 당집에는 장자할머니, 주장대신, 용왕님, 성주대신 등 다섯 분을 모셨고 옆에는 산신당이 있었다.(군산도서지 참조).

▲ 대장도와 장자도를 연결하는 다리
ⓒ 김준

▲ 대장도의 장제미 마을
ⓒ 김준
이곳 어화대를 지켰던 권씨 할머니가 생존해 있을 때는 매달 절기마다 풍어제를 지냈고, 경칩사리에는 처음 잡은 고기 중 가장 큰 것을 바치는 '신산'을 하기도 했다. 특히 이 일대의 어장에서 고기를 잡는 외지 배들도 꼭 이곳에 들려 '신산'을 했다고 한다. 이와 비슷하게 영광을 비롯해 조기를 잡는 서해안의 어촌마을 중에는 처음 출어해 잡은 조기를 바치는 의례를 '조기심리'라고 한다.

최근 들어 대장도와 장도를 잇는 다리 인근에는 많은 콘도들이 들어서고 있다. 어민들도 바다보다는 관광객을 대상으로 민박, 보트관광, 낚시, 식당 등으로 생업을 전환하고 있는 실정이다. 아직은 선유도의 진말이나 남악리처럼 생업의 중심으로 관광으로 돌아선 것은 아니지만 머지않아 어업보다는 관광이 중심이 될 것으로 보인다.

장자대교를 돌아 나오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할매할매 우리할매 내 소원 꼭 들어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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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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