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 | | | ⓒ 위창남 | | 이른 아침, 인터넷 뉴스 화면을 훑어보던 시선이 문득 한곳에 고정되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우리 속담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재미있는 실험결과가 나왔다는 것이다.
뉴스 내용을 좀 더 들여다보니, 미국 에머리대 그레고리 교수팀이 32명의 자원자를 모아 이 실험을 하였다는 것이다. 실험은 자원자의 다리에 1~27초 동안 전기충격을 가하고 충격의 정도는 바늘로 찌르는 수준으로까지 설정한 다음, 뇌 반응을 자기공명영상으로 촬영했다는 것이다.
이들 중 9명은 20초를 기다리는 약한 충격보다는 3초만 기다리면 되는 강한 충격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9명에게서는 충격을 기다리는 도중에도 자극에 의한 통증을 감지하는 뇌 부분에서 실제 충격이 가해졌을 때만큼이나 강한 반응이 관찰됐다는 것이다.
연구진에 따르면, 충격을 기다리는 시간이 그 충격만큼이나 고통스럽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곧 '어차피 당해야 할 일이라면 먼저 치르는 게 낫다'는 속담 그대로의 의미를 여실히 증명해준 실험결과라는 점에서 공감이 가고도 남았다.
그러나 참 일리 있는 실험결과라고 공감이 가는 순간,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생각에 그만 피식 웃어버렸다.
먼저 '맞는 매'에 대하여 나만큼 철저하게 경험한 사람이 또 있을까 싶어서였다. 여고 3학년 때였다. 키 순서대로 번호를 정하다보니 내가 1번이 되었다.
그래도 1학년이나 2학년 때는 1번을 면하여 3번도 하고 5번도 했는데, 3학년 때는 당당한(?) 1번이 되고 말았다. 그 당당함이라 건 어중간한 중간보다는 그래도 맨 앞이 낫지 않을까하는 스스로의 위로 같은 것이었다.
나는 학력고사 세대이다. 따라서 고등학교 3학년 때는 학력고사를 대비한 오만가지 시험의 홍수 속에서 살았다는 게 맞는 말일 것이다. 학교에서 보는 시험은 기본이고 교육청에서 실시하는 시험, 또 전국적으로 실시하는 모의고사 등 하여간 한달에 두세번은 기본으로 시험을 본 것 같다. 그런데 그 시험이 당당한 내 1번이라는 번호를 증오하게 만들었다.
시험을 보고난 후 시험성적이 나올 때쯤이면 난 없는 병이라도 만들어 결석이라도 하고 싶었다. 시험성적은 문제가 아니었다. 성적이야 잘 나올 때도 있고 못 나올 때도 있는 법. 성적보다 중요한 건 바로 틀린 개수였다. 틀린 개수만큼의 벌! 그 벌이란 것이 여고생으로선 참 감당하기 버거운 것이었다.
"1번부터 나와. 몇 개야? 책상 짚고 엎드려!"
대걸레의 긴 막대가 18살 소녀의 여리고 여린 엉덩이에 짝짝 달라붙었다. 틀린 개수만큼 엉덩이에서 불이 났다.
5~6대를 지나면서부터는 아픈지 어떤지 도대체 그 어떤 감각도 느낄 수가 없었다. 차라리 닭똥 같은 눈물이라도 뚝뚝 흘려주면 좋으련만…. 평소엔 그리 잘나오던 눈물도 그 순간만 되면 왜 한방울도 나오지 않는지. 우는 아이에게 가끔 매타작을 감해 주는 선생님의 눈물겨운 그 아량마저도 나는 혜택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벌도 벌이지만 벌로 인한 여파가 만만치 않았다. 우선 자리에 앉을 수가 없었다. 어찌나 화끈거리는지…. 부싯돌들이 서로 불을 일으키는 것처럼 내 엉덩이와 막대가 무지막지하게 부딪혀 불을 낸 것은 아닌가 하는 참으로 황당무계하고 어리석은 상상을 한 적도 있었다.
다음으로 괴로운 것이 목욕탕엘 갈 수 없다는 것이다. 막대자국이 선명할뿐더러 빨갛고 시퍼렇고 온통 총천연색인 몸의 어느 한 부분(?) 때문이다. 여리디 여린 심성의 여고생이었다. 어지간히 당당하지 않고는 정말이지 남에게 드러내 보일 수 없는 치부였다. 일주일에 한번 친구들과 대중탕 가는 것이 그나마 수험생으로서 유일한 낙이었건만….
그러던 어느 날, 키 큰 뒤 번호 친구들과 수다를 떨던 중 귀가 솔깃해지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친구들은 10대 정도까지는 그렇게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뒤로 갈수록 선생님의 팔에 힘이 빠지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억울하던지! 키 작은 게 무슨 죄도 아니건만, 왜 1번이라는 이유로 선생님께서 벌을 주시고자 하는 의욕이 철철 넘쳐나는 초반에 맞아야 한단 말인가!
여름방학을 한 달 여 앞두고 전국 모의고사 성적이 나온 날이었다. 나는 기어이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전국모의고사는 시험수준이 꽤 높은 편이었다. 그러다보니 다들 틀린 개수를 헤아리느라 두 손을 접었다 폈다 정신이 없었다. 긴 막대를 든 선생님께서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그때!
"선생님! 건의 드릴게 있습니다. 사실은 제가 제일 먼저 맞다보니 좀 억울한 생각이 듭니다. 아무래도 초반이다 보니 선생님 팔에 힘이 많이 실리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요. 오늘은 뒷번호부터 맞도록 하면 안될까요?"
순간 박수소리가 들렸다. 놀라서 둘러보니 도토리 키 재기를 하면 딱 좋을 듯한 고만고만한 키를 가진 10번 이쪽저쪽의 친구들이었다. 아마도 그게 바로 동병상련의 정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뒤에 앉은 키 큰 친구들의 째려보는 눈길에 난 소름이 끼쳤다. 그래도 할 수 없는 일. 우선은 내가 살고 볼 일이었다.
역시나 내 예상은 적중했다. 엉덩이로 느껴지는 강도는 놀라울 만큼 약했다. 59번을 거쳐 60번째이니 그건 당연한 것이었다. 금방이라도 하늘로 날아오를 것처럼 기뻤다. 도저히 풀 수 없을 것 같던 수학문제가 이렇게 저렇게 우연히 풀려버린 것 같은 경이로움이랄까? 뭐 그런 얼토당토않은 기쁨에 혼자 비실비실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그 얼토당토않은 기쁨을 나는 겨우 한 달밖에 누리지 못했다. 여름방학을 마치고 2학기가 되자 선생님은 그 벌을 거두어 버렸다. 1학기에 그만큼 혼이 났으니 이젠 스스로 알아서 열심히 하라는 것이었다. 아니 그 고통스런 벌에 그렇게 오묘한 선생님의 깊은 뜻이 숨어 있을 줄이야…. 나는 다시 당당한 1번이 되었다.
여고를 졸업한지 벌써 23년. 참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 오랜 세월만큼 묵은 맛을 내는 것이 있다. 바로 추억이다. 그 묵은 맛나는 추억 속 그때 그 담임선생님은 유독 구수한 된장 맛으로 내 기억 속을 맴돈다.
왜일까? 그때는 정말 미웠는데 말이다. 미움도 사랑이라더니 선생님에 대한 미움이 결국 사랑이었을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미운 놈 떡 한 개 더 주고 고운 놈 매 한대 더 때린다는데…. 세월이 흐른 지금에야 알 것 같다. 그때 선생님의 매가 사랑의 매였음을.
오늘따라 선생님이 많이 보고 싶다.
|
|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