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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할아버지! 이번에도 제가 이겼죠? 자 어서 이마대요."
"복희야. 한번만 물러다오. 할아버지 이마에 혹 나겠다."

"안돼요. 어서 이마대세요."
"허허. 녀석 참. 무슨 윷놀이를 그렇게 잘하누. 한번을 못 이겨 보겠네."

ⓒ 김정혜
딸아이의 야무진 손가락이 아버지 이마에 '통' 소리를 냅니다. 내리 다섯 번 꿀밤을 맞은 아버지의 이마 한가운데가 발그레합니다. 아이의 손때가 매우면 얼마나 매울까 싶더니만 그도 아닌 것 같습니다. 입춘 날 아침부터 벌어진 아버지와 딸아이의 때아닌 윷판에서 아버지는 결국 완패를 당하고 마셨습니다.

ⓒ 김정혜
아버지의 발그레한 이마를 바라보시며 어머니는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배를 움켜잡고 웃으십니다. 모르긴 몰라도 아버지의 완패는 다분히 의도적인 것임이 틀림없었지만 그래도 발그레한 아버지의 이마를 보고 있자니 저도 웃음이 납니다.

딸아이는 신이 나서 웃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신나하는 손녀가 예뻐서 웃고 저는 그런 부모님과 딸아이가 보기 좋아 웃고 입춘 날 아침. 친정집에 때아닌 웃음잔치가 벌어졌습니다.

ⓒ 김정혜
"엄마. 이왕 윷판 벌어진 김에 우리 영화 보여 주기 윷놀이 한판 해요?"
"영화? 왜 어미 영화 보고 싶냐?"

"네. 요즘 <왕의 남자> 그거 아주 재미있대요."
"그래. 그럼 진 사람이 영화도 보여주고 점심도 사주는 거다."

영화에 점심까지 사려면 돈이 만만치 않을 터. 하지만 저는 겁 없는 내기를 제의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와 저, 이렇게 셋이서 벌인 내기 윷놀이는 제가 졌습니다. 아니 일부러 져드렸다는 게 맞는 말입니다. 이참에 자식 노릇 한번 제대로 하고 싶어서였습니다.

ⓒ 김정혜
돈을 들여서라도 부모님께 영화 한편 보여 드리는 게 백번 마땅한 일이지만 굳이 돈을 들이지 않고도 부모님께 영화를 보여드릴 묘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건 바로 문화상품권이었습니다. 방송에 사연이 소개되고 상품으로 받은 것이었습니다. 차곡차곡 모아둔 문화상품권으로 지금껏 원 없이 책을 사보고도 아직 여러 장 남아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영화 보는 걸 좋아하십니다. 하지만 저는 어머니께 영화를 자주 보여드리지 못했습니다. 돈도 돈이지만 가까이 계시는 시부모님과 시간을 맞출 수 없는 게 가장 큰 이유입니다. 자식입장이라는 게 그랬습니다. 영화 한편 보는데 친정부모 따지고 시부모 따지고 그럴게 뭐 있겠느냐고 하겠지만 기실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넉넉지 않은 형편에 7000원이나 하는 영화 한 편 보는 것도 사실 호사스러운 문화생활이랄 수도 있습니다. 그런 호사를 친정 부모님과 즐기자니 시부모님이 걸리고 시부모님과 즐기자니 친정 부모님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해서 네 분 부모님을 다 함께 모시려니 그 또한 사정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머니께는 그 좋아하는 영화 한편 보여드릴 수 없는 불효자식이 되어야 했습니다.

지금껏 네 분 부모님을 모시고 영화를 본 건 <실미도>와 <말아톤> 단 두 편입니다. 그나마도 네 분 부모님을 함께 모시기가 쉽지 않아 개봉하고도 한참이나 지나 상영관에서 영화를 내릴 때쯤 허겁지겁 갔었던 기억이 납니다.

저의 그런 마음을 익히 짐작하시는 어머니는 영화 보러 가자는 말씀을 아예 안 하십니다. 하여 어제는 마음먹고 어머니께 영화 한 편 보여드릴 양으로 내기 윷놀이라는 꾀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토요일이라 표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했습니다. 부랴부랴 영화관에 도착해보니 마침 표가 남아 있었습니다. 만 원짜리 문화상품권 세 장으로 표 네 장을 샀습니다. 표를 사고 보니 1시간 남짓 시간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 시간에 점심을 먹기로 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뭐 드시고 싶으세요?"
"엄마. 난 자장면!"
"그래. 복희 말대로 중국집 가서 자장면이나 먹자."

"자장면은 무슨… 뜨끈한 국물이 있는 걸로 드세요. 갈비탕 어때요?"
"아니다. 복희가 자장면 먹고 싶다고 하잖냐. 중국집으로 가자."

날씨도 꽤 차갑고 해서 부모님께 뜨뜻한 갈비탕 한 그릇 사드리려는 제 계획은 딸아이 때문에 수포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나마 아쉬운 마음에 탕수육이라도 한 접시 사드리려 했지만 부모님은 한사코 싫다 하셨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음식값도 제가 치르지 못했습니다. 자장면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잠깐 화장실에 다니러 가신 어머니께서 그새 음식값을 치렀다는 걸 뒤늦게 알았습니다.

영화는 재미있었습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숨을 죽이고 보셨습니다. 다만 딸아이는 재미가 없었던지 이리저리 몸을 비틀고 하품을 해대더니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2시간여. 영화관 안은 바깥 날씨와는 대조적으로 너무 뜨거웠습니다. 영화관 안을 꽉 채운 사람들이 내뿜는 숨소리와 스크린 안에서 열연을 펼치는 배우들의 열정이 뒤섞여 넓은 영화관 안은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찼습니다.

"딸자식은 영화 보여주고 마누라는 자장면 사줬는데 나라고 가만있으면 안 되지."

영화관을 나와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길에 아버지께서 붕어빵을 사셨습니다. 버스를 타고 오며 붕어빵을 먹는데 괜히 마음이 울컥해졌습니다. 부모님께 영화 한 편 보여드리고 맛난 점심 사드리고 싶어 일부러 내기 윷놀이까지 했는데도 제가 쓴 돈은 달랑 버스비 8400원이었습니다.

어제 하루 부모님과 저는 사랑이라는 동아줄을 마주 잡고 줄다리기를 한 것 같습니다. 서로가 움켜쥔 굵은 동아줄은 부모사랑이었고 자식사랑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팽팽한 줄다리기도 결국은 부모님이 이길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은 부모님의 야윈 손가락 마디마디에서 어떻게 그런 초인적인 힘이 나오는지 부모님과 자식이 함께하는 사랑의 줄다리기엔 결국 자식이 패자가 될 수밖에 없나 봅니다.

부모님과의 사랑내기. 번번이 질 것이 뻔하지만 앞으로는 자주 해보려 합니다. 그래서 부모님께 배워야겠습니다. 훗날 제 자식과의 사랑내기에서 우리 부모님처럼 저도 제 자식을 이기기 위해서 말입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사랑 내기에서만큼은 자식에게 지는 법 또한 없는 것이 우리 부모입니다. 어떻게 하면 사랑내기에서 부모님을 이길 수 있을지 깊이 한번 궁리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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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자회원이 되고 싶은가? ..내 나이 마흔하고도 둘. 이젠 세상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하루종일 뱅뱅거리는 나의 집밖의 세상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곱게 접어 감추어 두었던 나의 날개를 꺼집어 내어 나의 겨드랑이에 다시금 달아야겠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훨훨 날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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