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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설날 하루 전이었습니다. 아내가 자꾸 장을 보러 재래시장에 가자고 졸라대는 것이었습니다. 장보러 가는 아내를 위해 차로 시장까지 태워다 준 적은 있었어도 20년을 넘게 살아오는 동안 장을 보러 같이 간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실은 며칠 전부터 아내가 같이 장보러 가자고 노래를 했습니다. 아내도 이제 서서히 늙어가는 모양입니다.

▲ 아내가 물건을 고르고 있다
ⓒ 박철
솔직히 안 하던 짓을 하려면 쑥스럽기도 하고, 내키지 않는 일이지만 하도 졸라대니 어쩔 수 없이 승낙을 했습니다. 아내와 장을 보러 간다고 했더니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은빈이도 따라 나섰습니다. 승용차를 이용하지 않고 걸어서 다녀오기로 했지요. 날씨는 봄 날씨처럼 화창하고 따뜻했습니다. 아내와 은빈이가 손을 잡고 서로 재잘거리며 걷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습니다.

초량시장에는 장 보러 온 사람들로 북적거렸습니다. 난전에는 갓 잡아 올린 싱싱한 생선이며 해물들이 즐비하고 한 푼이라도 더 깎으려는 사람들의 흥정소리로 왁자했습니다. 나는 아내와 은빈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내가 할 일은 없는 듯 그저 구경만 할 따름이었습니다.

아내는 메모를 한 종이쪽지를 연신 손으로 짚어가면서 물건을 사는데 자꾸 내게 물어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퉁명스럽게 "뭘 자꾸 물어봐요. 당신이 사려고 한 거 그냥 사면 되잖소", 역시 장보는 일은 내게 익숙한 일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장을 다 보고 아내와 장바구니를 나누어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출출하기도 하고 마침 점심시간이 되었습니다. 장보러 와서 국밥은 먹고 가야지 싶어서 아내에게 국밥을 먹고 가자고 했더니 아내도 은빈이도 좋다고 합니다. 초량시장은 부산에서도 돼지국밥으로 유명한 곳이지요.

▲ 뭘 사야 할까? 아내가 망설이고 있다
ⓒ 박철
"그런데 여보, 지금 나한테 돈이 한 푼도 없는데…. 당신 장보고 돈 얼마나 남았소?"
"딱 만원 남았어요. 이거면 국밥 값이야 되겠지요."
"그럼 할매 식당으로 갑시다."

돼지국밥 원조로 알려진 할매식당 한쪽 구석에 세 사람이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잠깐 기다렸더니 이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먹음직스러운 돼지국밥이 나왔습니다. 은빈이는 돼지고기 수육을 새우젓에 찍어서 먹는데 얼마나 잘 먹던지 배가 많이 고팠던 모양입니다.

아내와 올 봄에 어머니를 모시고 와 함께 살 얘기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거의 국밥을 다 먹어가고 있는데 은빈이가 불쑥 자기 코트에서 빨간 지갑을 꺼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더니 빳빳한 일만 원 권 지폐를 식탁에 내려놓았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엄마 아빠! 오늘 국밥 값은 제가 낼게요."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라 우리 내외는 어리둥절할 수밖에요. 아마 조금 전에 아내가 돈이 만원 밖에 남지 않았다는 소리를 들었던 모양입니다.

"은빈아! 누가 너보고 국밥 값 내라고 그러든?"
"아빠! 괜찮아요. 엄마 아빠 돈 없잖아요. 오늘은 제가 쏘는 거예요."
"그 돈은 어디서 났는데?"
"지난 1월 1일 아빠가 주셨던 거예요."

▲ 은빈이가 돼지국밥을 맛 있게 먹고 있다
ⓒ 박철
아내와 나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아내의 눈에 눈물이 이슬처럼 그렁그렁 맺혔습니다. 이런 맛에 자식을 키우는 걸까요? 이제 초등학교 3학년짜리가 뭘 안다고 밥 값 하라고 선뜻 돈을 내놓겠어요. 아내가 사십이 넘어 낳은 늦둥이가 이렇게 속이 차서 부모를 감동시킬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래 은빈아! 고맙다. 오늘 은빈이가 사 준 국밥 정말 맛 있었다. 아빠가 지금껏 먹어본 그 어떤 음식보다도 오늘 은빈이가 사 준 국밥에 제일 맛 있었다. 우리 은빈이 정말 기특하구나.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지요?"
"그럼요."

칭찬을 받은 은빈이의 해맑은 얼굴이 해바라기 꽃처럼 환하게 빛났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월요일 아침, 은빈이는 세상 모르게 자고 있습니다. 은빈이의 곤하게 자고 있는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모든 걱정 근심이 물러가는 것 같습니다.

새해에는 가끔 은빈이 손을 잡고 아내와 함께 장보기 나들이를 나서야 하겠습니다. 이런 기쁨을 어디서 맛 볼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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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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