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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에 장사트럭이 들어온 모양이다. 생선장사도 아니고 과일장사도 아니다. 그 아저씨들 차라면 단박에 알 수 있다. 차에서 나는 확성기 소리로는 알아들을 수 없다. 단지 느낌으로 또 목소리의 높낮이로 가늠할 뿐이다. 그런데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도대체 짐작이 가지 않는다. 뭐라뭐라 이야기는 하고 있는데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점심을 먹다 말고 한참 귀를 기울였다.

"아버지. 저 소리 알아들으시겠어요?"
"글쎄다. 쌀이 어쩌고 하는 것 같기는 한데…."

"쌀요? 시골동네에 쌀장사가 올 일은 없을 테고, 무슨 차가 온 거지?"
"그렇게 궁금하면 어서 밥 먹고 나가봐라."

아버지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뻥이요'소리와 함께 정말 '뻥'하는 소리가 났다. 그때서야 알 것 같았다. 확성기에서 나는 소리는 '쌀 튀겨요. 옥수수 튀겨요'라는 소리였던 것이다.

"아버지. 뻥튀기 차가 왔나 봐요. 뭐 튀겨 먹을 거 없을까…."
"요새는 뻥튀기 차가 저렇게 손님을 찾아다니는구나. 옛날엔 설 대목장 한 귀퉁이에서 하루 종일 '뻥 뻥'소리가 났지. 옥수수며 콩이며 누룽지 말린 것들을 깡통에 담아 놓고 행여나 누가 새치기할까봐 하루 종일 줄서서 기다리곤 했는데."

"맞아요. 하얀 쌀 튀밥으로 큰엄마가 강정 만들던 기억나요. 그런데 항상 쌀은 한 깡통만 튀기고 옥수수나 누룽지만 많이 튀겼잖아요."
"쌀이야 귀해서 많이 튀기긴 힘들었지. 그래도 옥수수나 누룽지 튀긴 게 겨울 군입거리로는 최고였지."

ⓒ 김정혜
점심상을 치우고 얼른 밖으로 나갔다. 농사를 짓지 않으니 옥수수가 있을 리도, 전기밥솥에 밥을 하니 누룽지가 있을 리도 없다. 하니 튀겨 먹을 게 없다. 하지만 구경하는 데야 누가 돈 달라하지 않을 터. 고소한 냄새에 코라도 호사시킬 참이었다.

ⓒ 김정혜
차 옆엔 벌써 동네아주머니 몇 분이 나와 계셨다. 연세 지긋하신 할아버지께서 차 위에 올라앉아 열심히 뻥튀기 기계를 돌리고 계셨다. 뒷집 할머니는 벌써 옥수수를 튀긴 모양이었다. 파란 비닐봉지에 노릇노릇한 강냉이가 수북하게 담겨 있었다. 앞집 영미엄마는 쌀을 튀긴 모양이었다. 하얀 쌀 튀밥을 한 자루나 들고 계셨다.

ⓒ 김정혜
"애기엄마. 쌀이나 옥수수 좀 튀겨 먹어요."
"옥수수는 없고 쌀은 튀겨 먹으려니 아깝고. 이럴 때 누룽지라도 튀겨 먹으면 좋을 텐데. 그나저나 할아버지 연세가 어떻게 되셨어요?"
"일흔 넷이야."

"힘 안 드세요? 이렇게 동네마다 돌아다니시면서 뻥튀기 하시려면 힘드시겠어요."
"일이라고 생각 안 하고 운동이라고 생각하니까 힘 안 들어. 뻥튀기는 이 기계도 요즘은 자동으로 하는 게 있어도 난 일부러 이렇게 돌려. 팔운동 한다 생각하고."

"손님들은 많아요?"
"없어. 요즘 세상에 누가 집에서 강정 같은 걸 만들어야지. 돈만 들고 나가면 형형색색으로 잘 만들어 놓은 강정들이 지천이잖아. 그러니 나 같은 사람은 그저 기름값하고 용돈벌이나 하는 거지 뭐."

ⓒ 김정혜
늦은 점심을 드신 아주머니 몇 분이 옥수수며 쌀을 들고 나와선 깡통에 차례차례 담았다. 할아버지는 열심히 기계를 돌리시고 '뻥'하는 소리와 함께 고소한 냄새를 실은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자루에 노릇노릇한 강냉이와 쌀 튀밥이 수북하게 튀겨져 나왔다. 너나 할 것 없이 구경꾼인 내게도 한주먹씩 나눠 주셨다. 따끈따끈한 것이 입에 들어가자마자 사르르 녹았다.

ⓒ 김정혜
슬그머니 집으로 들어와 쌀을 조금 담아 가지고 나왔다. 우리 세 식구 몇 끼를 해먹을 쌀이었다. 하지만 쌀 튀밥을 만들어 아버지께 좋은 군입거리로 드리고 싶었다. 또 딸아이도 좋아할 것 같았다. 한 깡통의 쌀이 한 자루의 튀밥이 되었다.

아직도 따끈따끈한 고소한 튀밥을 한주먹 들어내어 아버지께 드렸다. 아버지는 한입 가득 튀밥을 밀어 넣으셨다. 꽤나 고소하신가보다. 우물거리시느라 말도 못하시는 아버지의 얼굴 위로 고소한 웃음이 연신 피어난다.

ⓒ 김정혜
어린이집에서 돌아온 딸아이가 한 자루나 되는 쌀 튀밥을 보고선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 한양재기 퍼서 안겼다. 작은 손으로 오므려 쉴 새 없이 입으로 밀어 넣는다. 하지만 입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흘리는 게 더 많다. 하긴 쌀 튀밥은 손으로 퍼 먹는 게 또 제격이다. 딸아이도 어지간히 맛있나보다. 늘 간식으로 먹던 빵은 거들떠도 안 보니 말이다.

ⓒ 김정혜
뻥튀기 할아버지는 서너 시간 동네에 머무르셨다. '뻥, 뻥'하는 소리가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온 동네가 다 고소했다. 할아버지 덕분에 이집 저 집 할 것 없이 고소한 강냉이며 쌀 튀밥을 실컷 먹게 됐다.

굳이 장에까지 가는 번거로움을 덜어 주셨다며 아주머니들은 할아버지께 고마워하셨다. 내년에도 할아버지께서 건강한 모습으로 우리 동네를 찾아 와 온 동네에 고소한 냄새를 피워 주셨으면 싶다. 지금도 내 입에선 고소함이 사르르 녹아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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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자회원이 되고 싶은가? ..내 나이 마흔하고도 둘. 이젠 세상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하루종일 뱅뱅거리는 나의 집밖의 세상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곱게 접어 감추어 두었던 나의 날개를 꺼집어 내어 나의 겨드랑이에 다시금 달아야겠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훨훨 날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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