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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윷가락을 잡은 아내의 손이 거칠다.
ⓒ 박철
새해 벽두, 날씨는 여전히 차갑다. 아내는 몸과 마음이 꿀꿀하다며 은빈를 데리고 목욕을 갔다. 나는 방바닥에 엎드려 신문사에 보낼 원고를 끄적이는데 마음대로 글이 잘 안 나간다. 이틀 여유가 있으니 다음에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오랜만에 낮잠을 잤다. 그렇게 삼십여 분 눈을 붙였을까, 아내와 은빈이가 찬바람을 뒤집어쓰고 들어온다. 화장을 안 한 아내의 얼굴을 보니 역시 나이는 속이지 못하나 싶다.

아내가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석간신문을 뒤적이다 신문 사이에 끼워진 광고물을 한참 쳐다보더니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여보, 나 이 옷 하나만 사주라."
"얼마짜리인데?"
"1600만 원짜리인데 50% 할인해서 800만원에 판대요."
"그래, 되게 싸네. 그런데 그렇게 싼 걸 어떻게 입을 수 있나? 사모님이?"
"……."
"그래 목욕을 하니 기분이 좀 좋아졌소? 목욕도 하셨으니 슬슬 윷놀이 한 판 하는 게 어떨까?"

▲ 올해 들어 아내에게 잃은 돈이 셈을 해보니 2-3만원은 되는 것 같다.
ⓒ 박철
아내는 히죽 웃으며 군용담요와 윷가락을 들고 안방으로 들어온다. 오늘 아침 나한테 한 판 졌는데 멋지게 복수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늦둥이 은빈이도 엄마 옆구리에 찰싹 달라붙어서 노골적으로 아내 편을 든다.

"만원 따먹기다. 그런데 당신 돈 있소?"
"걱정 붙들어 매세요. 당신, 불리하다고 판 뒤집고 돈도 안 주고 내빼지나 마세요."
"내가 언제 그랬소. 그런데 당신 돈 생활비 아냐? 공금을 쓰면 안 되지. 어찌 좀 수상하다."

아내의 고향은 경북 영주이다. 한학을 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윷을 얼마나 잘 노는지 '히얏!'하며 기압을 넣으며 윷가락을 던지는 폼도 그렇고, 윷판이 없어도 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훤히 꿰뚫고 있다. 아내와 윷놀이를 하면 단판 승부에선 내가 가끔 이기기도 하지만 장기전에서는 아내가 훨씬 세다. 목소리는 내가 큰데 이기는 쪽은 아내이다. 바둑으로 치자면 아내는 정석 플레이이고 나는 꼼수이다.

오늘은 내가 운이 좋은 모양이다. 판이 내게 유리하게 돌아가자 옆에서 아내를 응원하던 은빈이가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거든다.

"아빠는 오늘 엄마가 마음이 꿀꿀한데, 맛있는 거는 사 드리지 못하고 엄마 돈을 따 먹어야 좋겠어요?"
"야, 은빈아! 너는 어찌 엄마 편만 드느냐? 그러면서 만날 잠 잘 때는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좋다고 그러냐? 너무 속 보인다 야!"

▲ 빠꾸 도. 내 주특기가 빠꾸 도다.
ⓒ 박철
운 좋게 첫 판은 해 볼 것도 없이 내리 두 판을 이겼다. 아내는 비장한 표정으로 장롱에서 만 원권 지폐를 꺼내준다.

"당신 만날 돈 없다고 하면서 내 몰래 꼬부쳐 둔 돈 많은가 보지? 돈 없다고 생활비 가지고 돈 따먹기는 하지 마시오. 오늘은 아무래도 당신 안 되겠는데…."
"걱정 마세요. 내가 당신 기 살려주려고 져 주는 거야. 그것도 모르고…. 무슨 남자가 조금 이기면 좋아서 펄쩍펄쩍 뛰고, 지면 판 뒤집고 치사하게 돈도 안 주고 도망치고. 남자가 매너가 좋아야지."

아내가 슬슬 약이 오르는 모양이다. 오늘 따라 윷가락이 담요에 찰싹 붙는다.

"으랏샤샤! 두 모에 걸이다. 아이고, 당신 거 뒤졌네."
"무슨 말을 그렇게 원색적으로 해요. 애도 있는데…."
"지금 돈 따먹기 하는데 신사적으로 하면 되나? 원색적으로 해야 기가 나서 잘 되는 것이지."

아내는 집요한 데가 있다. 나는 목소리만 크고, 아내는 진돗개처럼 승부근성이 강하고 독한 데가 있다. 어디서 들었는지 '초전 끗발 개 끗발'을 외치며 다부지게 윷가락을 던진다. 분위기가 금방 아내 쪽으로 유리하게 돌아간다. 윷가락 하나가 마지막으로 떨어지면서 다른 윷가락을 치는데 단박에 모가 네 번이 나온다.

"당신 무슨 윷을 그렇게 던져? 그렇게 낮게 던지면 무효야."
"어디 그게 마음대로 되는 줄 아는가 보지. 이게 다 우리 엄마한테 배운 실력이에요."

▲ 윷판. 우리네 인생살이가 이와 같지 않은가. 돌고 도는.
ⓒ 박철
둘째 판은 아내가 이겼다. 은빈이는 엄마가 이겼다고 좋아서 박수를 친다. '고얀 년 같으니.'

"옜다! 만 원! 오늘은 그만합시다."
"더 하시지. 왜 그만 두시나?"
"사람이 돈을 너무 좋아하면 못 써요."

주머닛돈이 쌈짓돈이라고. 아내 주머니에 있는 게 내 것이고, 내 주머니에 있는 것이 아내 것 아니겠는가? 이치는 그렇다. 모처럼 연초에 돈내기 윷놀이를 하면서 20대 신혼시절 단칸방에서 아내와 내기 고스톱을 쳤던 추억이 슬몃 어른거린다. 둘 다 누가 뭐라고 할 것도 없이 우리 내외는 늙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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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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