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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산은 하산길도 만만치 않다. 1박 2일 산행의 막바지, 지친 걸음으로 산을 내려가노라니 아직 멀었냐는 소리가 입에서 절로 나온다. 그러자 마침 동행하던 대피소 직원분이 '집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오고 싶을 텐데'라며 놀린다. 그래, 돌아가자마자 금세 보고 싶어지겠지. 그리워 몸살을 앓겠지.

대체 이 산의 무엇에 매료된 걸까. 단 한 차례도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법이 없이, 구름과 바람과 빛과 시간과 함께 흐르는 산. 볼 때마다 새롭고 변화무쌍한 산. 한없이 깊고 넓은 그 품 안에 수많은 숲과 나무와 생령들을 담고 있는 산. 그는 한 번도 자신의 전모를 보여주지 않았다.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부분은 여전히 신비에 쌓여 있고, 그래서 사람을 홀린다. 미치게 한다.

근 한 달만에 다시 찾은 지리산이었다. 토요일 오후에 백무동에 도착, 천왕봉 일출을 보기 위해 장터목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무성한 여름숲, 문득문득 꽃향기가 코끝을 스친다. 이끼 가득한 산길 곳곳에 산나리와 까치수염과 이를 모를 야생화들이 쏙쏙 고개를 내밀고 있다.

걸음에 속도가 붙지 않아 지루한 길이었다. 참샘을 지나 장터목이 가까워오자 비로소 시야가 확 트인다. 비가 오지 않을까 염려했었는데, 두터운 구름층을 뚫고 한 줄기 빛살이 산을 내리비추고 있다. 반가워 바위 위로 뛰어올라가 하늘을 본다.

▲ 구름 사이로 쏟아져내리는 햇살
ⓒ 김비아

▲ 운해, 장터목 대피소에서
ⓒ 김비아
저녁 6시, 장터목 대피소에 도착했다. 1808m, 우리 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대피소. 아까보다 구름은 더 많이 걷히고 맑은 하늘이 보인다. 잠자리가 불편한 것을 못 견뎌하는 나는 대피소에서 밤새 한 잠도 못 잘 때가 많다. 하지만 산의 이 저녁 기운에 한껏 취하고 싶어, 산 속에서 맞는 밤과 새벽이 좋아서, 산에서 자는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한다.

▲ 장터목 대피소에서
ⓒ 김비아
한밤중에 빗소리가 세차게 들렸는데 새벽 네 시, 밖에 나가니 다행히 비는 그쳤다. 뜨거운 코코아를 한 잔 끓여 마시고, 어둠 속에 천왕봉을 향해 걷는다. 절반쯤 걸었을까 하늘이 어슴프레 밝아지면서 산의 능선과 운해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나를 황홀하게 하는 그림, 발걸음이 절로 빨라진다.

일출 시간은 5시 20분. 천왕봉 정상에 서서 물결치는 산들을 보노라면 언제나 가슴이 떨린다. 동서남북, 구름과 산맥이 파도처럼 밀려오고 밀려나간다. 내 가슴 속 가장 힘차게 출렁이는 물결, 지리산. 그 넘실대는 파도 끝에서 하늘이 밝아온다.

구름의 걷힌 틈새로 한 줄기 서광이 강렬하게 비쳤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 짙은 구름 때문에 해가 떠오르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천왕봉 일출을 보려면 3대가 덕을 쌓아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아직 덕이 모자란 모양이다. 그러나 하늘이 열리기를 말없이 기다리는 이 순간, 내 마음은 가슴 속 구름을 걷어내고 눈부신 태양을 본다.

▲ 천왕봉에서
ⓒ 김비아

▲ 말없이 아침을 기다리는 나무
ⓒ 김비아
예전에는 천왕봉 정상에 표석을 박을 수 있을 만큼 흙이 많았다 하는데, 지금은 주위가 온통 메마른 바위 뿐이다. 1967년 우리 나라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이래 하도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서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비로 씻겨가는 흙보다 사람들의 발밑에 묻혀가는 흙이 더 많을 정도라고.

천왕봉을 내려와 제석봉을 지날 때 한 차례 비가 쏟아졌다. 장터목에 돌아왔을 때는 눈부시게 파란 하늘이 빛난다. 변화무쌍한 날씨는 산행의 또다른 즐거움. 시시각각 변하는 대기 속에서 지금 이 순간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느낀다.

▲ 제석봉
ⓒ 김비아
장터목에서 라면을 끓여먹고 세석을 향해 출발했다. 장터목에서 세석평전까지 능선을 따라 걷는 3.4km의 아름다운 길. 1703m의 연하봉과 촛대봉을 거쳐가게 되는 이 길은 '연하선경'이라 하여 지리십경 중의 하나이다.

노고운해, 피아골단풍, 반야낙조, 벽소명월, 세석철쭉, 불일폭포, 연하선경, 천왕일출, 칠선계곡, 섬진청류, 이 열 가지를 지리십경으로 꼽는다. 산에 해 뜨고, 해가 지고, 달이 솟고, 봄이면 꽃이 피고, 가을이면 잎이 붉게 물들고, 산맥을 휘감는 구름과 쏟아지는 폭포수, 강에 비친 푸른 산 그림자까지. 이 모든 아름다움이 여기, 이 산과 함께 있어 행복하다.

▲ 연하선경
ⓒ 김비아
군데군데 고사목이 보였다. 그의 몸을 숱하게 스치고 갔을 봄비와 여름 폭풍과 가을볕과 겨울 눈보라를 떠올린다. 세월의 침탈 끝에 다 잘려나가고 이제 몸통만 남은 그에게 말을 건다.

'죽어서도 아름다운 건 아마 너 뿐일 거야.'

▲ 고사목
ⓒ 김비아
드디어 촛대봉에 닿았다. 세석평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여름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는 짙푸른 고원을 굽어보자니, 이곳에 철쭉이 만발했던 지난 봄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가을이 좋다는 사람도 많지만 막 피어나던 세석의 특별한 봄을 나는 잊지 못하고 있다.

지난 5월, 흐린 날씨 속에 한신계곡을 거쳐 세석으로 오르는 길, 그 날은 천둥, 번개가 요란하더니 급기야 비까지 쏟아졌다. 한 시간 가량 비를 맞으며 막판 오르막길을 힘들게 올라갔다. 올라갈수록 산철쭉이 많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호젓한 산길 위로 주먹 만한 흰 꽃송이가 후둑후둑 떨어져 있는 모습은 잠시 전에 선녀가 지나간 자취를 연상케 했다.

세석에 다다를 무렵이 되자 비가 그치고 햇살이 비치면서 어두웠던 산이 환히 밝아졌다. 힘겨운 오르막길이 드디어 끝났을 때 내 눈앞에 펼쳐진 것은 꽃으로 빛나는 언덕! 비 그친 직후의 부드러운 햇살 아래, 연둣빛 봄들판 위로 흐드러지게 핀 연분홍 꽃무리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빛과 향기로 가득찬 세상이 바로 눈앞에서 나를 부르고 있다는 말 밖에는.

그래서 세석철쭉은 해질녘이나 이른 아침에 봐야 한다. 연분홍빛 은은한 꽃송이가 가슴 뭉클한 감동을 불러오는 시간, 그 시간이면 바래봉 붉은 철쭉의 화려함도 하얗게 빛나는 세석철쭉의 신비로움에는 미치지 못한다. 꿈결 같은 그 날의 산행 이후로 세석은 내 마음 속 낙원이 되어 있다.

▲ 세석 대피소
ⓒ 김비아
갖가지 추억을 곱씹으며 대피소에서 느긋하게 휴식을 취한 뒤에 한신계곡으로 하산한다. 장마 끝이라 곳곳에서 물이 넘쳤다. 습기로 인해 미끄러워진 바위 위로 걸음을 옮기는 것이 쉽지 않았다.

'나무는 죽어서도 숲을 위해 일합니다.'

안내판의 문구가 눈길을 끈다. 살아서는 물론이고 죽어서도 나무는 숲에게 자신을 주고 그로써 숲의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한다. 가내소폭포를 지나자 비로소 길은 평탄해졌고 어느덧 산을 다 내려왔다. 지리, 그 품에 잠시 머물 때마다 생각한다. 한 인간의 내면이 이처럼 깊고 풍부할 수 있다면. 이처럼 광활하고 고독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면. 그 끝모를 심연에 가 닿을 수 있다면.

지혜로울 지(智), 다를 이(異), 지리산.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달라진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어리석은 내가 그로부터 지혜를 얻을 수 있기를. 큰 산처럼 맑고 깊은 영혼을 지니고 싶다.

덧붙이는 글 | 7월 16~17일, 지리산에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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