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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우중충한 날씨 탓인지 갑자기 얼큰한 국물 생각에 어제(6일) 낮에는 라면을 끓여 아버지와 점심을 먹었습니다.

"소주 안주에 라면만한 것이 없지."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아버지는 라면 국물을 보시곤 소주 생각이 나셨나 봅니다.

"자, 어미도 한 잔 해라."

생뚱맞게 아버지는 제게 소주잔을 건네셨습니다. 소주라면 냄새만 맡아도 취하는 제가 어제만큼은 덥석 잔을 받았습니다.

"웬일이냐? 소주 냄새만 맡아도 진저리를 치는 애가 애비 잔을 다 받고."
"날씨 탓이죠 뭐."


언젠가 점심을 드시며 반주로 소주 두어 잔을 드신 아버지께서 지나가는 말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술도 친구가 있어야 입에 짝짝 붙는 법인데…."

왜 갑자기 그 생각이 난건지. 아버지껜 죄 없는 날씨 핑계를 댔지만 왠지 어제는 아버지의 술친구가 되어 드리고픈 마음에 딱 한잔을 받아 마셨습니다. 그런데 술이 목구멍으로 내려가지 않고 곤두박질쳐 머리로 흘러 들어갔는지 눈앞이 아리송한 게 기분이 묘했습니다.

"아버지! 아마도 저는 아버지 딸이 아닌가 봐요. 소주 한잔에도 이렇게 천장이 뱅뱅 도니. 그나저나 큰일이네요. 오늘 치과도 가야 하고 장도 봐야 하는데."
"그럼 잠깐 눈 좀 붙여라. 내가 깨워 주마."


아버지의 흔드는 기척에 눈을 뜨니 시계가 2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2시 40분에 오는 마을버스를 타려면 늦어도 2시 30분엔 집을 나서야 합니다. 부랴부랴 가방을 챙겨 집을 나서려다 습관적으로 지갑을 열었습니다.

마을버스 요금은 850원. 집을 나서기 전 미리 천 원짜리를 챙기는 건 익숙한 저의 습관입니다. 천원을 내면 기사 아저씨께서 요금 통에 붙은 단추 하나만 누르면 거스름 돈 150원이 나와 간편하지만 만약 오천 원 권이나 만 원 권을 내게 되면 기사 아저씨께서 아주 불편하실 것 같아서입니다.

그런데 지갑을 열어보니 천 원짜리가 한 장도 없었습니다. 동전은 물론 없었습니다. 티끌모아 태산이란 걸 한번 실천해 보고자 요즘은 눈에 띄는 동전은 곧바로 돼지저금통의 먹이가 되기 때문입니다.

급하게 아버지께 뛰어갔습니다.

"아버지! 천 원짜리 있으면 한 장 빌려주세요."
"천 원짜리?"


힐끔 올려다 본 시계는 어느덧 2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마을버스 시간에 맞추기 위해선 이젠 숨도 쉬지 말고 뛰어야 할 판인데 아버지는 지갑을 열곤 이리 살피고 저리 살피고 한참을 꾸물거리십니다.

"어, 없네. 천 원짜리가 한 장도 없다."
"그럼 동전도 없으세요? 850원?"
"동전? 그것도 없다. 근데 뭐하게?"
"마을버스 타려고 그러죠 뭐."


순간 참 난감했습니다. 한 정거장이면 되는 거리를 삼천 원이나 내고 택시를 탈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850원인 버스요금을 만 원권으로 낼 수도 없는 일. 다시 집으로 들어와 남편 책상 위를 살폈습니다.

남편은 아침에 집을 나서기 전 주머니에 든 동전들을 돼지저금통으로 넣지 않고 꼭 책상 위에 그대로 두는 습관이 있는지라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눈에 불을 켜고 샅샅이 훑어 봤지만 시간만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참 나.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더니….'

▲ 책갈피 사이로 삐죽하게 고개를 내밀고 있는 천원.
ⓒ 김정혜
비 맞은 중처럼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돌아서는 그 때. 제 눈에 뭔가가 들어왔습니다. 탁자 위에 요즘 읽고 있는 책이 있었는데 그 책의 책갈피를 비집고 뭔가가 삐죽 고개를 내밀고 있었던 것입니다.

▲ 얼핏 봐도 천원짜리가 분명했다.
ⓒ 김정혜
얼핏 보기에도 그건 천 원짜리의 한 귀퉁이었습니다. 부리나케 책을 넘겨 천 원짜리가 꽁꽁 숨어 있는 그 페이지를 열었습니다. 순간 전신을 드러낸 그 천 원짜리가 어찌나 반가운지. 하지만 반가움을 표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마을버스 정류장을 향해 냅다 달렸습니다. 달리면서 휴대전화 시간을 보니 정확히 2시 35분이었습니다.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헐떡이며 마을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니 2시 40분. 저만큼 버스가 오고 있었습니다.

손에 꼭 쥔 천 원짜리를 자랑스럽게 요금 통에 넣었습니다. 그러고는 기사 아저씨를 향해 환하게 웃었습니다.

"아줌마! 왜 웃어요?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저씨! 만약에 오늘 제가 만 원짜리를 요금으로 냈으면 아저씨는 어떻게 하셨을 것 같아요?"
"어쩌긴 뭘 어째요. 다음에 받으면 되지."
"뭘 믿고 다음에 받아요?"
"뭘 믿긴요. 일주일에 두어 번은 이 버스 타시면서. 그리고 제가 관상을 좀 보는데 아줌만 버스비 못 떼먹을 상이거든요."


아저씨의 그 우스갯소리에 기사 아저씨도, 몇 안 되는 손님 몇 분도, 또 저도 한참을 웃었습니다. 그 웃음소리는 바로 넉넉한 시골인심이었고,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가는 마을버스 기사아저씨도 어느새 저의 넉넉한 이웃이 되어 있었다는 아주 기분 좋은 확인이었습니다.

치과에 도착해 진료를 받는 내내 저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책갈피에 있던 그 천원의 정체에 대하여. 그런데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궁금한 건 또 못 참는 성격인지라 조급증에 안달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아줌마! 입 좀 더 크게 벌려 보시라니까요. 오늘 아줌마 이상하네. 왜 빨래 걷는 걸 잊고 오셨어요?"

의사 선생님의 입 좀 더 크게 벌려보라는 소리도 못 듣고 있을 만큼 저는 그 천원에 대한 궁금증에 한없이 침몰해 있었는데 의사 선생님의 그 말씀에 뭔가 '번쩍'하고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갔습니다. 세탁기였습니다.

얼마 전 세탁기를 다 돌리고 빨래를 널다 물에 흠뻑 젖은 천 원짜리 한 장을 발견했습니다. 세탁 전 남편의 주머니를 살폈어야 했는데 깜빡 잊고 그냥 세탁기를 돌려 버린 것이 아마도 천 원짜리 지폐도 함께 세탁을 해버린 이유인 듯싶었습니다.

흠뻑 젖은 그 천 원짜리를 말리려고 무심히 탁자에 놓인 책갈피에 끼워 놓았던 게 그때서야 생각이 났습니다. 결국 잊고 있던 그 천원이 어제서야 깜짝 보너스가 되어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제 마흔을 겨우 넘겼을 뿐인데 벌써 건망증이란 사슬에 그렇게 차츰 묶여 가고 있는 저 자신이 괜히 씁쓸해지기도 하였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저는 농협에 들러 2만원을 천 원짜리 스무 장으로 바꿨습니다. 그리고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책장에 책들을 하나하나 꺼내 책갈피마다 끼워 놓았습니다.

유비무환이라고, 혹시 또 어제 같은 일이 발생할지 모르는 것에 대한 나름대로의 대비기도 하거니와 어제처럼 무심히 잊고 있던 그 천 원짜리가 어느 날 또 이렇게 깜짝 보너스가 되어 줄 것이란 묘한 기대심리가 발동했기 때문입니다.

지루한 일상 정말 별거 아닌 그 일이 어제 오후 내내 제 기분을 참 유쾌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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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자회원이 되고 싶은가? ..내 나이 마흔하고도 둘. 이젠 세상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하루종일 뱅뱅거리는 나의 집밖의 세상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곱게 접어 감추어 두었던 나의 날개를 꺼집어 내어 나의 겨드랑이에 다시금 달아야겠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훨훨 날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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