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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화는 한양으로 돌아오자마자 제일 먼저 피난을 거부하고 궁말에 남아 있기를 원했던 김아지를 찾아갔다. 길거리에는 아직도 시체가 굴러다니고 있었고 잿더미가 된 집터는 계화의 마음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아!”

궁말에 당도한 계화는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반쯤 타다 남은 집들이 흉물스럽게 계화를 바라다보고 있었고 그 어디에도 인적은 없었다. 계화는 혹시 막막한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 싶어 주위를 허위허위 돌아다녔지만 기운만 빠질 뿐이었다. 이제 계화가 돌아갈 곳은 궁 밖에는 없었다.

“사람이 모자라니 당분간 교서관의 일은 뒤로 하고 필요한 곳마다 옮겨 다니도록 하라.”

상궁의 명에 계화가 먼저 옮겨간 곳은 세답방이었다. 세답방은 빨래와 그 뒷손질을 담당하는 곳으로서 교서관의 일에 비하면 고되고 힘들기 짝이 없었다. 그나마도 일손이 모자라 계화는 세수간에서 내전의 청소까지 도맡아 해야 했다.

“듣자하니 동궁전 사람들은 모조리 심양으로 끌려가게 되었다는구만.”
“궁궐 사람들 중 상당수가 강화도로 갔다가 곧바로 청나라에 끌려가게 되었으니 낭패일세. 작년만 해도 궁인을 줄인다고 할 지경이었는데 말일세.”

궁궐 사람들 사이에 나누는 얘기 또한 희망적인 것은 없었다. 그렇게 계화가 고된 궁궐생활을 이르레일 정도 보낼 무렵, 조선조정의 간청으로 강화도에서 사로잡힌 사람들 수천 명이 풀려나게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중 상당수가 궁중 사람들인지라 궁정은 모처럼 활기를 띠었다. 계화가 있는 세답방의 최고 상궁도 강화도에서 풀려나 돌아올 수 있었다.

“끝내 못 돌아온 사람도 있으니 내 마음이 참으로 아프구나.”

세답방 상궁이 나인과 무수리들을 모아놓고 모처럼의 상견례를 가지며 침울한 어조로 말했다. 사람들을 죽 둘러보던 상궁의 눈에 계화가 들어왔다.

“어디보자… 너는 꽤 낯이 익긴 한데 본시 세답방에 있는 아이가 아니구나! 날 알아보겠느냐?”

계화가 상궁을 보니 난리가 났을 때 같이 피난을 떠났던 상궁이었다. 그때 계화는 도중에 몽고병사들을 만난 후 강화도로 가지 않고 이진걸을 따라 남한산성으로 간 일이 있었다.

“그때 내가 뭐라고 그랬는지 기억하느냐? 궁중사람들은 전하를 보필하는 것이 그 책임이니 제멋대로 남정네들과 놀아나는 것들은 궁중으로 올 생각은 하지 말라고 하였지.”

계화는 그런 일을 아직도 마음에 담아두는 상궁에게 정나미가 떨어져 한마디를 쏘아 붙였다.

“어찌되었건 난리가 끝난 뒤에 저도 이렇게 살았고 상궁께서도 살아 오셨으니 끝난 일이 아니오이까?”
“뭐라? 이런 당돌한 것을 봤나!”

상궁은 연실 콧방귀를 뀌며 계화에게 손가락질 하며 소리쳤다.

“난리를 틈타 음탕하게도 여러 남정네들과 먼 길을 간 계집이 뭘 잘했다고 그러느냐?”

전 같으면 이런 말을 듣고 울음이라도 터트렸겠지만, 전란을 겪으며 전장의 참혹한 정경을 가까이에서 보아왔던 계화에게는 구중궁궐의 한구석에만 머물러 있던 속 좁은 아낙네의 시비걸기로 밖에는 느껴지지 않았다.

“음탕하다니 어찌 그리 허황된 소리를 하시는지요? 상궁께서 평소에 음탕한 마음을 먹으니 모든 것이 그리 보이시는 겁니까?”
“뭐… 뭐야? 네 이년!”

상궁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주위의 사람들이 계화를 말리려 했으나 한 번 쏟아지기 시작한 계화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난리를 겪었으면 뭔가 느끼는 것이 있어야지 기껏 돌아와서 하는 짓이 아랫사람을 업신 여기며 모욕을 주는 것입니까? 상궁은 차라리 이곳에 돌아오지 말아야 했습니다.”

계화의 말에 상궁은 새된 목청으로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여봐라-! 회, 회초리를 가져오너라! 이년을 당장 물고를 낼 것이니라-!”
“내 궁궐을 나갈 것인 즉 그렇게 힘을 빼실 것도 없소이다!”

계화는 상궁을 비웃으며 획하니 몸을 돌려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갔다. 계화의 뒤에서는 ‘저 년을 잡아라!’는 상궁의 절규와도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계화의 당당한 걸음걸이에 그 누구도 감히 나서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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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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