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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년 말 최전방에서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마치고 보니 학벌도 변변치 않고, 실력도 없고, 소위 말하는 빽도 없고…. 그래도 취직은 해야겠고 해서 서울시 행정5급(지금의 행정9급) 공개채용시험에 응시하여 첫 발령을 받은 곳이 성북구의 00동사무소였다.

말단 동서기로 근무하면서 무허가 건물철거, 영세민에 밀가루 배달, 청소비 걷기 등등 별 일을 다했다. 심지어 당시는 세금도 은행에 내지 않고 직접 담당 공무원이 받던 시절이라, 지금은 상상도 못할 일을 동직원들이 하곤 했다.

당시의 사회 상황 또한 삼선개헌이다, 유신이다 하여 군사혁명으로 얻은 독재권력을 연장하려는 세력과 민주주의라는 대의를 걸치고 정권교체를 이루려는 정치세력간에 갈등이 심했던 만큼 어처구니 없는 단속도 많았던 것 같다.

예를 들면 장발이나 미니스커트 단속 같은 것도 삼선개헌 같은 불합리한 정치 상황에서 국민들로부터 집중되는 따가운 시선을 조금이라도 분산시키기 위해 미풍양속을 핑계로 단속을 한 것이 아니었는가 싶다. 이 정도까지 생각이 깊었다면 10월 유신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만들어내지도 않았을 텐데….

당시 공직사회에서도 장발 단속이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구청장이 각 동사무소를 순시할 때면 수행하는 총무과장의 휴대품에 가위는 필수품이라는 얘기까지 돌았다. 소속 직원의 머리가 길다고 구청장으로부터 지적을 받으면 총무과장은 자의든 타의든 직원의 머리에 고속도로를 내야 했고, 여기에 반발한 직원이 있었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도 없다.

이런 상황 속에 말단 직원 생활을 탈없이 해오던 70년대 말 어느해 4월 4일로 기억된다. 다음날이 식목일이었으니 말이다. 열심히 주민등록 전입신고를 처리하고 있는데, 학업을 마치고 늦게 군대에 입대한 친구 녀석이 말년 휴가를 나왔다고 소주 한잔 사라는 연락이 왔다.

흔쾌히 약속을 하고 그날 밤 만난 곳이 미아리 고개 아래 정릉천 주변의 허름한 선술집. 드럼통 가운데 19공탄을 피우는 탁자가 있고, 30대 정도 되는 누나 같은 주모가 곰살맛게 "총각들! 총각들!"하면서 예뻐해 주는 꼬임에 넘어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젊은 객기를 풀다가 밤은 깊어 통행금지 사이렌이 "애~앵"하고 울릴 때까지 마시게 되었다.

집에도 갈 수 없고 해서 궁여지책으로 생각한 것이 "건너편 여관에 들어가 밤새 마시자"였다. 친구 3명이서 약 30미터 거리의 건너편 여관으로 뛰어가는데, "호르륵 호르륵"하는 호각 소리와 함께 구두 발자국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며 일단의 사람들이 쫓아오는 게 보인다. 시커먼 방망이를 옆구리에 찬 파란색 유니폼의 방범대원 아저씨들이다.

통행금지 위반에 걸려 경찰서 유치장으로

방범대원 아저씨 왈 지금 시간이 12시 10분으로 통금위반을 했으니 미아리 고개에 있는 파출소로 가잔다. 우리는 통금 사이렌 소리를 듣고 "잠 자려 여관 가는 중"이라고 해도 막무가내다. 현역 복장을 하고 휴가 나온 친구만 여관으로 돌려보내고 어쩔 수 없이 우리 둘은 한 많은 미아리 고개 아래 파출소로 잡혀가 서너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리곤 새벽 4시쯤 되니 각 파출소를 돌아다니며 통금위반자를 태우고 온 시커먼 화물차(당시의 호송차량은 화물차 뒤에 박스를 만든 것이 많았다)를 타고 도착한 곳이 성북경찰서 유치장이다.

생전 처음 철창 안에 갇혀 아침을 맞았던 심난한 마음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아침 8시쯤 이름을 불러 나가보니 "당신은 공무원이고 전과도 없고 하여 즉결에 보내지 않고 훈방조치를 하려 하는데 머리가 좀 자랐으니, 구내 이발소에서 이발을 하면 내보내준다"는 것이다. 같이 잡혀간 친구가 "여관비를 계산하고 나니 이발료가 부족하다"고 하자, 담당형사 왈 "그냥 내보내면 깎지 않으니 머리에 바리깡으로 고속도로를 낸 뒤 보내 주겠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머리에 고속도로를 내고 집에 오니 같이 자취하던 형이 도대체 왜 머리를 깎였느냐고 다그쳤다. 차마 통금에 걸려 경찰서에 잡혀갔다 왔다는 얘기는 할 수 없고 해서 순간적으로 핑계를 댄다는 것이 "구청장이 순시 나와 머리가 길다고 머리에 고속도로를 냈다"고 했더니, 형님은 애매한 구청장님께 욕을 해대는 것이 아닌가.

단골로 다니던 동네 이발사 아저씨에게도 같은 핑계를 댔더니 "하늘 같은 동사무소 직원 머리를 맘 대로 깎는 사람이 나뿐인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네"라며 박장대소하던 기억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때 구청장님이 지금도 서울 모구청에서 민선구청장을 하고 계시는데 그분께 대단히 죄송스럽다.

단속의 당위성에 대한 논란은 시대가 변하는 만큼 어쩔 수 없는 일. 지금 생각하면 장발이나 미니스커트 단속이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만 당시의 사회 정서나 여러 가지면에서 이것이 받아들여지는 상황이었던 만큼 누구를 탓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라는 생각도 든다. 작금의 학생두발 단속이나 내년부터 있을 차량 유리 선텐 단속 같은 것도 분명히 10∼20여년 후에는 부질없는 단속이었다고 하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 단속의 추억 응모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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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가는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의 역할에 공감하는 바 있어 오랜 공직 생활 동안의 경험으로 고착화 된 생각에서 탈피한 시민의 시각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진솔하게 그려 보고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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