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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광
내가 광주의 진실을 처음 접한 것은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처럼 몇 년이 지난 뒤였다. 광주민주화운동 25주년을 맞는 지금까지도 광주학살의 책임자들로부터 이렇다 할 속죄의 말 한 마디 없고, 실종자가 수백 명에 이르는데도 ‘경축탑’이 버젓하게 세워지는 현실에 비하면 좀 빨랐다고 해야 할까.

대학에 들어가던 해 5월, 캠퍼스의 긴장된 분위기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 때만 해도 광주는 ‘폭도’들이 일으킨 ‘사태’였다. 복사를 얼마나 했던지 계속 비가 내리던 화면. 그 조악한 비디오 화질이 내가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억의 원형질이다. <광주민중항쟁의 진실>이란 제목으로 대학가를 돌아다니던 그 다큐멘터리를 볼 수 있게 해준 주인공을 오늘 만난다.

25년 전 독일의 공영방송인 ARD(Allgemeine Rundfunkaustalt Deutschlands)의 북부지역방송인 NDR(Norddeutsche Rundfunk) 카메라 기자로 광주를 찾았던 유르겐 힌츠페터(Juergen Hinzpeter). 2년 전 한 방송사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방영 이후, 그는 광주를 기억하는 한국 사람들에게‘푸른 눈의 목격자’란 별명을 얻었다.

ARD-NDR 도쿄특파원으로 근무하던 그는 “한국에서 진실이란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알고 있었지만, 눈앞에 실제로 일어난 진실을 외면할 수 없어 곧 돌아올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한 채” 계엄령이 선포된 광주로 들어갔다. 그는 학살자들이 영원히 숨기고 싶었던 참상을 기록해 세계에 알렸다. 그의 카메라에 담긴 필름은 독일 공영방송의 뉴스만 탄 것이 아니었다. 유러비전을 통해 유럽 전역에 방송이 됐고, 그 이튿날 미국 CBS 전파를 타고 광주의 비극은 한국을 제외한 세계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됐다.

돕고 싶어, 함께 있고 싶어 통제 뚫고 달려간 광주

그는 80년 5월 19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광주’란 한 단어만 듣고, 전날 내려진 계엄령과 어떤 관계가 있을 거란 직감에 무작정 광주로 갔다. 계엄군의 엄중한 언론 통제를 피하기 위해 해외공보원에 취재 신고도 하지 않았다. 교통은 물론 통신마저 끊긴 고립무원의 도시로 진입하기 위해, 그는 길을 잃은 동료를 찾으러 간다고 둘러댔다.

어렵게 봉쇄를 뚫고 광주 시내로 들어온 외국 기자는 서툰 영어로 상황을 설명해주는 시위대의 도움을 받아 피로 얼룩진 광주를 찍었다. 계엄군에게 ‘진실’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그는 허리춤에 필름을 숨겼다. 이틀 동안 찍은 광주의 참상을 본사로 전송하기 위해 서둘러 도쿄로 가야 했을 때 그는 일등석을 예약해 삼엄한 검색을 피했다. 한 외국인의 기자정신이 우리 언론마저 묵살한 학살의 진실을 세계에 알렸던 것이다.

그를 광주로 달려가게 한 힘을 기자정신만으로 설명하는 것은 충분치 않다. 그는 “일종의 의협심 같은 게 있었다. 광주사람들이 당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럴 때 내가 세계에 알려 광주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현장에 함께 있고 싶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그가 함께 있고 싶었던 현장은 살육의 현장만은 아니었다. 광주는 저항의 현장이었다.

새벽의 총소리에 진 꽃 같은 젊은이들 곁에 눕고 싶다

그는 지난 해 심장수술을 받고 다시 광주를 찾았다. 인공동맥을 두개나 연결한 상태였다. 주치의만큼이나, 아니 주치의보다 훨씬 더 세심하고 예민하게 남편의 상태를 점검하는 부인의 태도만으로도 그의 건강이 얼마나 나쁜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의 몸은 5월의 햇살조차도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여서 인터뷰는 방안의 블라인드를 모두 내린 채 진행됐다. 계획했던 야외촬영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픈 사람처럼 보이지 않지만 상태가 아주 심각하다. 의사가 금지하는 것들이 많아졌다. 보통사람이 그렇듯 나도 살고 싶기 때문에 의사의 말을 듣는다”고 말했다. 그랬기에 광주시가 그의 사후 망월동 묘역 안장을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은 묻기가 매우 꺼림칙했다. 하지만 ‘광주’가 그의 삶에 있어 무엇이기에, 자기 머리카락과 손톱을 담은 봉투를 방한 길에 가져왔는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80년에 보았던 수많은 젊은이들의 죽음이 내게 남아 있다. 나는 베트남에도 가봤지만 광주에서처럼 죄 없는 젊은이들이 머리에 총격을 받고 죽은 모습을 담진 못했다. 나는 광주를 계기로 달라졌다. 내성적이었던 난 광주를 경험한 뒤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투쟁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5·18 당시 새벽에 총소리가 나면 불안한 마음으로 바깥을 내다봤다. 총소리가 어느 쪽에서 들려온 것인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슬픈 일은 언제나 날이 밝기 전 여명에 일어난다. 광주를 떠올리면 그 총소리에 죽어간 젊은이들, 그 젊은이들을 잃은 부모들이 떠올라 가슴이 저려온다. 내게 이 고통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광주에 묻히고 싶은 것이다.”

비극적인 장면에 대한 고통스런 기억들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그는 여러 번 말했다. 그의 카메라에는 군인의 곤봉에 맞아 머리가 함몰된 된 채 피를 철철 흘리는 청년, 태극기에 싸여 길에 누워 있는 시신들, 아들딸의 주검 앞에서 오열하는 부모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허리춤에 대검을 꽂고 트럭에서 내려 행진곡을 부르는 공수부대원들의 모습도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 최인숙
하긴 누군들 정조준하고 있는 군인들 앞에서 “살인마 전두환은 물러가라”고 외치며 꽃잎처럼 쓰러져간 수많은 죽음을 잊을 수 있겠는가. 누군들 사격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했으면서도 공포를 이겨내려는 안간힘으로 총을 든 시민군과 그들이 낮게 부르던 애국가를 잊을 수 있겠는가. 누군들 밤늦도록 계속되던 시위대의 함성과 잦아들지 않던 총소리를 잊을 수 있겠는가. 어느 누구라도 공포의 도시, 저항의 도시, 그래서 끝내 해방의 도시가 된 광주를 쉽게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제 광주는 한국 민주주의의 성지를 넘어 인권과 평화. 연대를 상징하는 세계적인 도시가 됐다.

마침 광주에선 5·18 25돌을 맞아 많은 행사들이 열리고 있었다. 힌츠페터 씨를 만나러 간 5·18기념문화센터에서도 올해 광주인권상을 받은 와다르 하피즈를 비롯하여, 아시아의 시민사회 활동가들이 참여한 광주국제평화캠프가 열리고 있었다. 그에게 지금의 광주는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까.

“시간이 흐르면서 광주의 활력이나 역동성이 떨어져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주말마다 한국 뉴스에서 학생들이 거리에서 바리케이드를 마주하고 시위를 하는 것을 보지 않게 된 점은 다행이다. 언제까지 투쟁일변도일 수는 없다. 한국은 이제 진전된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통일이라는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통일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통일과정이 조화롭게 진행되길 바란다.”

“한국 정부는 형제간의 폭력 상처 보살펴야”

기다리고 있는 다른 기자들을 위해 인터뷰를 빨리 끝내달라는 쪽지가 계속 들어왔지만 말을 끊지 않은 건 그였다. 그는 그 때 상황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전하려는 듯 시위자들이 내건 구호는 물론이고, 신군부의 등장을 둘러싼 정세까지 자세하게 설명했다. 때론 감상에 젖은 듯 시적인 표현으로 그 참담함과 슬픔을 묘사하기도 했다. 독일어 한 마디도 못 알아듣는 내 처지가 억울하기까지 했다.

“모든 폭력이 야만스럽지만 특히 형제간의 폭력은 참을 수 없이 끔찍한 일이다. 한국 정부는 시위대를 쏴야 했던 계엄군의 상처를 보듬는 일도 책임져야 한다.”

이 말을 할 때 그의 표정은 유독 심각했다. 그는 지금도 날마다 한국 관련 기사를 읽고 오려두며 한국 사회의 변화를 지켜보고 있다고 했다. 백두산 천지를 여행하고 싶다고도 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회고록 쓰는 일조차 의사의 지시로 중단했을 만큼 건강이 좋지 않다. 그는 숙연한 표정으로 다시 꼭 만나고 싶다고 했다.

그가 기록한 시민군의 마지막 비상대책위원회가 생각난다. 무기 반납을 결정하던 마지막 회의 말이다. 회의장에는 분명 체념과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을 것이다. 그 때 시각이 밤 12시 5분 전. 독일에서 그 시각은 무엇인가 뻔히 일어날 걸 알면서도 그걸 막기에는 늦은 시간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가 12시 5분 전에 서 있는 것이 아니기를 바란다.

※ 유르겐 힌츠페터 씨와의 인터뷰를 성사시켜 준 5·18기념재단 김찬호 국장, 정기종 선생과, 독일어 통역을 해준 참여연대 정책실 양영미 간사에게 감사 말씀을 드립니다.

덧붙이는 글 | ※ 유르겐 힌츠페터 씨와의 인터뷰를 성사시켜 준 5·18기념재단 김찬호 국장, 정기종 선생과, 독일어 통역을 해준 참여연대 정책실 양영미 간사에게 감사 말씀을 드립니다.

-이 글은 참여연대 정기간행물 [아름다운사람들이 만드는 참여사회] 6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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