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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명은 저희 아버지께서 늘 말씀하신, 즐길 수 없다면 피해라. 아니, 죄송합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입니다. 면접관님, 잠시 쉼호흡 좀 해도 되겠습니까?"

객석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대기하고 있던 나도 한바탕 웃었다. 정말 저렇게 떨릴까?

무척이나 더운 4일 오후 '취업과 진로' 수업시간. 경성대 한 대형세미나실에서 '모의면접'이 진행 중이다. 수강생이 100명을 넘었지만 1차 모의면접을 보는 사람은 6명.

취업하기가 어려워 일찌감치 공무원 시험으로 빠져버린 지방사립대 학생들의 유행을 반영이라도 한 탓일까. 면접을 보는 인원은 작년보다 무척 적었다. 그 틈에서 하나밖에 없는 춘추정장을 입고 '삐질삐질' 땀을 흘리고 있는 나는 이 수업을 듣는 학생도 아니었다. 면접 이틀 전 인원 부족으로 급하게 투입되었다.

▲ 처음 써 본 이력서. 정장 입고 찍은 사진이 없어 3년 전에 찍어 둔 사진을 썼다.
ⓒ 김수원

이력서, 자기소개서. 처음 써 본다. 토익점수? (응시료를 탓하며) 없다. 영어 공부는 수능시험 치르고 안 한 것 같다. 증명사진? 그게 아마 군입대할 때 붙인 사진 같은데…. 자격증? 장롱면허증 하나 있다, 헤헤. 학점? 5학년까지 다녀야 한다. 아니, 쉿! 비밀이다. 부모님께 너무 죄송스럽다. 부모님은 내가 졸업한 하면 바로 취업해서 가계부채 다 청산해줄 것으로 믿고 계신다.

나는 하루 전날 면접을 권유한 담당 직원에게 찾아갔다.

"선생님, 저는 취업을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아직 졸업하기도 버거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니가 잘했으면 안 불렀지. 그렇다고 취업 준비 안할 거야?"

개별면접이 끝나고 그룹면접에 들어갔다. 면접관들은 실제 기업에서 면접을 보는 사람들이다. 나는 '침착하자', '침착하자'고 주문을 걸며 드라마 '신입사원'에서 강호가 당당하게 면접을 보는 자세로 임하려고 했지만 심장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김수원씨, 본인 좌우명을 얘기해 보세요."

긴장한 탓이다. 몇 가지 생각은 했는데 떠오르지 않는다. 중학생때까지는 있었는데, 어쩌지. 어쩌지. 순간 뇌리를 스친 개그프로그램의 한 코너명.

"제 좌우명은 '혼자가 아니야'입니다."

객석은 또 웃음으로 파도를 탔다. 면접관도 좀 어이없는 표정이었다.

"많은 젊은이들이 자기중심적인 사고로 인해 이기적인 개인주의, 자기애에 빠져 타인을 배려하거나 함께 나누는 데 무척 서툽니다. 저는 나 혼자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잘 살아가고자 '혼자가 아니야'란 좌우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적당히 둘러댔지만 항상 마이크만 잡으면 이 식상하고 '착한' 답만 흘러나와 큰 일이다.

▲ 대기하는 동안 찍은 사진. 나도 저렇게 말을 더듬거릴 줄이야.
ⓒ 김수원

"김수원씨, 대인관계를 중시하는 것 같은데, 대인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중요한 세 가지가 있다면?"

"첫째는 신뢰입니다. 신뢰가 있어야 서로의 관계를 돈독히 유지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두 번째는…."

말문이 막힌다. 시간이 정지된 것만 같다. 형광등이 귀를 찌르는 소리가 머리를 관통한다.

"두 번째는 사랑이고 세 번째는 믿음인데 믿음은 또 신뢰와는 조금 다릅니다. 그게 그러니까…."

'사랑', '믿음', 그 다음엔 '소망'인가? 믿음에서 도대체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동영상도 홈페이지에 올라간다는데, 갑자기 슬퍼진다.

"인터넷신문 기자를 지원했는데..."

인터넷신문의 장점에 대해 물었다. 나는 실시간으로 사람들의 궁금증을 풀어줄 수 있다는 점을 설명하면서 최근 삼성 이건희 회장의 고려대 명예박사 학위수여 사건을 예로 들려고 했지만 그만두었다. 면접에서 점수를 따려면 무조건 면접관의 입맛을 맞춰야 하는데 면접관 중에는 삼성계열에서 나온 사람도 있었기 때문이다.

▲ 이력서 경력 부분에 써 넣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사실 경력으로 내세울 만한 게 별로 없다.
ⓒ 김수원

면접을 끝내고 조용히 생각했다. 겨울이 되면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이력서를 꾸역꾸역 넣을 것이다. 그 중에는 내가 평소 좋아하지 않은 회사가 포함될지도 모른다. 일단 취업을 하기 위해서 나는 내 신념과 다른 거짓말을 해댈지도 모른다. 면접이란 관문 앞에서 나는 그동안 내가 지녀온 자존심과 철학을 내던지고 가는 꼴이다. 면접관 앞에서 나는 하나의 '상품'에 불과하다. 싫은 소리 할 수 없다. 뻔뻔하고 노골적으로 구애해야 하니까.

나는 내가 가진 꿈에 대해 의심한다. 직장에 종속되어 버리는 하찮은 꿈. 취업하면서 깔때기에 걸러진 꿈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다. 꿈은 원래 그런 거야? 취업하지 말고 장사를 하라고? 가난하다. 부모님의 기대도 저버릴 수 없다. 내 알량한 자존심에 가면을 씌운다. 인생은 원래 그런 거라고, 다들 그렇게 산다고 충고해주는 사람이 있겠지.

다시 인생의 원점을 경험한다. 어떻게 살아야 하지.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은 뭐지. 그걸 왜 하고 싶은 걸까. 내 꿈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어릴 적부터 내 꿈은 어떤 식으로 변화되었지. 무슨 영향을 받았길래. 그럼 도대체 꿈이라는 것은 뭐야. 남들도 똑같은 고민을 할까.

모의면접이 남긴 후유증은 무척이나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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