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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상의 숟가락 하나' 표지>
ⓒ 실천문학사
요즘 아이들은 학교에서 귀가하면 짜여진 계획표 대로 시간을 보낸다. 매니저인 엄마는 짜투리 시간이 남지 않도록 최대한 효율적인 동선으로 아이들을 관리(?)한다.

특히 요즘 같은 신학기에는 공부열을 높이기 위해 학원과 이러저러한 강좌에 더욱 열심이다.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다른 풍경으로 유년기를 보내고 있는 지금의 아이들, 마냥 노는 일에도 유익함을 가려내는 이들이 왠지 안쓰럽다.

초등학교 5학년인 친구의 딸이 읽는 책들 속에 끼어있던 <지상에 숟가락 하나>. 국민 도서라는 그 애 말에 알게 된 이 책은 이 봄, 놀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이 한정되어 있는 우리의 아이들의 현실을 살피게 만드는 책이다. 또한 어쩔 수 없이 겪게 마련인 '죽음'을 통해 인간의 내면적 성숙과 생을 긍정하는 가치들을 얻는 기회가 되었다.

현재보다 과거가 중요해진 나이

주인공은 초로의 노인이 되어 자신의 바탕을 이루던 고향과 마주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성장 후 한 번도 고향을 찾은 적이 없던 그가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저만치 와 있는 죽음의 실체를 느끼며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를 갖게 된 것이다.

그러나 죽음이 곧 완전한 소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죽음이 인간 개체를 완전히 파괴하지는 못한다. 죽어서도 내 마음 속에 뚜렷이 살아있는 아버지 모습이 그것을 증거한다.

돌아가신 후로 아버지는 내 의식에 자주 출몰하고 있는데 마치 당신이 내 마음속으로 이사해 와 거주하고 있는 느낌이다. 아니, 그보다 아버지는 다름 아닌 나 자신이 아닌가. 나의 얼굴 모습도 점점 아버지와 닮은 꼴이 되어간다.

아버지의 목숨은 단절된 것이 아니다. 자식인 나이게 이어진 것이다. 종말은 단절이 아니라 그 속에 시작이 있다는 것, 따라서 나의 존재는 단독의 개체가 아니라 혈족이라는 집단 적 생명의 한 연결 고리로 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본문 중에서


'죽음의 시절'이 었던 그때

그의 유년과 소년이 투영된 그 시절을 회상함으로써 다시 한 번 그 시절을 살아 보고자 추억한다. 4·3사건과 6·25라는 굵직한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유년을 보내는 유약한 어린 꼬마가 바라보는 세상의 요지경들.

너무나 어려웠고 힘들던 시절, 배곯아 죽지 않을 정도의 끼니로 가난에 쩔어 어둠뿐이었던 시절, 살아 있는 자각은 '눈물은 내려가고 숟가락은 올라가고'인 것. '가난이 바로 이런 것'을 말해주듯 목숨을 부지하기에 바빳던 그 시절 우리 어르신들이 살아온 이력들을 비로소 느낄 수 있다. 그 '죽음의 시절', 그를 온전히 잡아끈 힘은 다름아닌 '자연'이었다.

자연의 일부였던 어린 시절

내 심신의 성분 구조내에는 자연 속의 숱한 사물들과 풍광이 용해 되어 있을 것이다. 사람들만이 나를 키운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나에게 그 시절만이 진실이고 나머지 세월은 모두 거짓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삶이란 긍극적으로 그러한 아침에 의해 격려받고 그러한 아침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리라.

아침빛으로부터 병든자는 삶의 의욕을 얻고, 절망하는 자는 용기를 얻고 그리고 용기 있는 자가 자신의 정치적 신념에 따라 더 밝고 더 아름다운 아침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칠 결심을 하는 순간도 그러한 아침의 햇빛 속에서 일 것이다. -본문 중에서


한 인간의 자아 형성시 자연은 암흑과 폐허로만 여겨지던 궁핍한 살림살이에 더 할 수 없는 인상을 남겨준다. 밤하늘, 풀벌레 우는 소리 등은 그가 의식하지 못할 만큼 운명적인 자리에서 생을 견고하게 다듬어 준다.

아무것도 없던 폐허의 시절에 그토록 풍요로울 수 있던 것은 자연때문이며, 자연이 그를 성장시켰다고 한다. 그때와 너무나 다른 유년을 보내는 지금의 아이들이 과연 얼마나 이 대목을 느낄 수 있을까. '자연학습'이라는 시간을 따로 구분해서 선생님과 함께 학습의 연장선으로 자연을 대하는 우리의 아이들의 실상….

이 책은 목차에서 볼 수 있듯 단락 하나 하나가 독립적인 주제로 엮어져 있어 서문에서의 무거운 분위기를 한층 걷어낸다. '외짝귀', '방귀', '저 벌 봐!', '웬깅이', '삶은 살'의 짝사랑 등 웃음을 자아내는 제목들로 천진난만한 소년의 성장기가 무궁무진한 재미로 녹아 있다.

쓰디 쓴 분말의 약을 물 없이 목구멍으로 밀어내는 느낌처럼 팍팍하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결국 약을 먹은 후의 차도가 있는 몸을 느끼듯 따뜻한 온기에 살가운 재미가 곁들어진 책, <지상에 숟가락 하나>이다. 메마른 가지에 생기가 맺히는 요즘, 우리 아이들이 과연 어떤 유년을 보내야 할지 답을 가르쳐 주는 책이다.

지상에 숟가락 하나

현기영 지음, 창비(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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