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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띠로 둘러진 채 버림받은 TV
ⓒ 이종락

40년을 눈앞의 옥동자처럼 가까이 했던 TV와 담을 쌓은 지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이렇게까지 되리라곤 거의 예상을 못하고 그저 세 모녀가 모여 앉아 연속극에 매몰되는 꼴이 보기 싫어 책 한 권 사 준 것이 화근(?)이 되고 말았습니다.

큰 딸은 올해 중학교 1학년에 들어갔습니다. 163cm나 되는 껑충 큰 키에 교복을 입혀 놓으니 처녀가 다 된 것 같은 큰 애와 초등 4학년인 둘째 딸, 그리고 직장에 다니는 아내는 TV 앞에 앉으면 찰떡궁합이었습니다.

드라마 주제가에 푹 빠져 낮이나 밤이나 MP3 귀에 꽂고 흥얼거리는 큰딸과 덩달아 꺽꺽거리는 둘째 딸, 좀 뜬다는 드라마 앞에서 넋을 놓고 빠져버리는 아내. 하지만 세 모녀에게 제가 별로 소리칠 자격이 없는 이유는 저 또한 나름대로 좋다는 프로그램 보느라고 리모콘을 손에서 못 놓는 사람이었으니까요.

가장 두툼한 쿠션을 거실 TV 앞에 모셔 놓고, 저는 퇴근하자마자 피곤한 몸을 누입니다. 그리곤 졸릴 때까지 이리저리 수 십 개의 채널을 돌려가며 밤 시간을 때우는 거죠.

요즘은 혀를 끌끌 차면서도 이종격투기의 잔인한 장면에 점차 빠져들어 심야시간에도 혈투를 즐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뉴스나 사회정보 프로그램은 유익하니 괜찮고, 내용 뻔한 멜로드라마는 딸애들에게 도움이 안된다고 판단해 TV앞에 모인 세모녀를 구박하곤 했습니다.

책 한 권에 맛이 간(?) 아내의 폭탄선언

그러던 어느 날 저는 큰 딸의 중학교 입학 기념으로 가족과 함께 들른 서점에서 아내에게 책 한권을 선물했습니다. 책 내용은 아이를 위해 TV를 꺼야한다는 것으로, 이를 실현하기 위한 다양한 체험 사례와 TV의 해독 방안이 상세히 기록돼 있었습니다.

저는 내심 아내가 이 책을 읽고난 뒤 딸들과의 연속극 시청시간을 줄이길 기대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TV 시청 때문에 아내가 늦게 취침하는 일도 줄어들 것이고, 아침 식탁도 더이상 부실해 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아내는 한동안 책을 옆에 둔 채 예전처럼 드라마 시청에 열중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아내의 청천벽력 같은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뉴스고 뭐고 일체의 TV 시청을 금지한다."

나는 예상치 못한 '초강력 쓰나미급' 선언에 약간 황당해 하면서도 떨떠름하게 "어, 그래 잘했어, 이제야 정신차렸구나"라고 말했습니다.

두 딸들 역시 충격을 받은 듯 엄마에게 이것만이라도 보자는 등 보채기 항의를 했습니다만, 아내의 결연한 의지 앞에 TV 플러그는 두 번 다시 꽂히지 않았습니다.

아내는 아이들에게 책 내용을 소개하면서 참을 것을 요구했고 협조를 부탁하기까지 했습니다. 책 내용이야 사실 보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라 저는 '찍'소리 못하고 TV 없는 세모녀의 일상을 살펴봤습니다.

아이들은 적응하는데 금단현상은 오히려...

그런데 의외로 아이들은 투덜거리면서도 엄마의 뜻에 따라 공부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이리저리 시간을 보내더군요. 정작 문제는 나 자신이었습니다.

집에 오니 할 일이 없어졌고 평소 책을 가까이 하는 편이었지만 이상하게 뭔가 허전했습니다. 책도 읽고, 청소도 해보고, 키보드도 쳐보고, 억지로(?) 가족들과 이야기도 나누려 노력하면서 시간 때우기에 골몰했지만, 자꾸만 TV로 눈길이 가는 제 모습은 영락없이 금단현상을 겪는 사람의 그것이었습니다.

주변인들에게 TV와 절연했다고 얘기하자 한편으론 좋은 일이라면서도 무인도에 혼자 사는 것도 아니고 너무 극단적인 선택이 아니냐고 핀잔을 주기도 했습니다.

며칠을 참다가 저는 아내에게 한마디 했습니다.

"9시 뉴스하고 '골든벨' 정도는 봐도 되지 않아?"
"안돼요. 한번 보면 다른 것도 또 보게 되니까 확실히 끊으려면 끊자고."

아이들은 모든 원인을 아빠에게로 돌렸습니다.

"것 봐. 아빠가 엄마에게 괴상한 책을 줘서 그렇잖아."

거실에 멀쩡하니 놓여져있는 TV가 신경 쓰여 안방에 들여다 놓자는 제안에도 아내는 요지부동입니다. "맘 먹고 안 보면 그만이지" 하면서 TV화면 앞에 책 띠를 둘러댔습니다. 책 한권에 완전히 돌변한(?) 아내가 신기했습니다. TV 절연의 전도사가 된 아내는 한 달의 시간이 끊느냐 마느냐의 분기점이라며 인내를 요구했습니다.

변화

TV 없는 우리 집은 요즘 생활의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우선 가족 간의 대화가 '어쩔 수 없이' 늘어났습니다. 딸애들도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아내 역시 집안 청소와 정리, 그리고 책을 보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무엇보다 밤늦게 TV에 붙잡힌 시간 대신 다른 소일거리를 찾는 것이 달라진 모습입니다.

요즘 같은 정보화시대에 TV를 통한 정보나 소식을 놓쳐 혹시나 사회생활에 지장이 없을까 걱정도 해보지만, 사실 정보는 인터넷이나 신문을 통해 얼마든지 얻을 수 있다고 봅니다.

한순간에 끊어진 미디어의 총아 TV는 일주일 째 우리 집 거실에서 시커멓게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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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을 찬 유학자 남명 조식 선생을 존경하고 깨어있는 농부가 되려고 노력중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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