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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는 사람과 사람을, 과거와 현재를 그리고 역사와 문화를 연결해주는 소통의 공간이다. 단순히 물리적으로 이탈된 두 지점을 연결하는 고리로서 다리가 아닌 사상이 소통하고 뉴스가 전달되는 커뮤니케이션의 통로인 셈이다. 그렇게 다리는 우리의 삶과 함께 역사를 만들고 신화와 전설을 간직하며 오늘에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전국에는 현재 70여개의 옛 다리가 남아 있다. 수없이 많은 다리가 전쟁과 개발, 자연 재해 등의 이유로 사라지고, 보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역사적 산물로서 다리는 그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라져가는 옛 다리를 복원하고 그것을 적극 홍보함으로써 지역의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이는 나름대로 역사를 이어가는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 진천 농다리 전경 - 농다리라는 이름은 밟으면 움직이고 잡아당기면 돌아간다는 돌이 있어서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 이인우
매년 7월이면 충청북도 진천군에서는 '농다리축제'가 열린다. 이 축제는 중부고속도로가 지나는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의 세금천(洗錦川)에 놓인 '농다리'라 불리는 조금은 독특한 구조의 돌다리와 관련한 행사다. 농다리를 널리 알리고 보존의 중요성과 조상들의 슬기로움을 체험하기 위한 내용으로 일종의 지역문화축제인 것이다.

지난 2월 중순, 아직은 차가운 겨울바람이 세차게 부는 주말 오후 농다리를 보기 위해 진천행 직행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용인 양지, 안성 죽산, 광혜원 등의 주요 마을을 거쳐 약 1시간 30여분 만에 '환영, 제2선수촌 진천군 확정'이라는 현수막이 무수히 걸려 있는 진천군에 도착했다.

"제2선수촌이 진천군 광혜원읍에 들어선다"는 현지 택시 기자 아저씨의 이야기를 들으며 농다리가 있는 구곡리 일명 구산동까지 이동했다. 약 10여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는데 요금은 서울에서 진천까지 버스를 타고 온 것만큼이나 나왔다.

▲ 마을에서 세금천으로 가는 길목에 놓인 중부고속도로 밑에 그려진 농다리와 그위에서 농악을 하는 농악대의 모습 - 매년 7월 농다리축제에 맞춰 벽화를 그린다고 한다.
ⓒ 이인우
날씨가 춥고 겨울 가뭄으로 강에 물이 많지 않아서인지 첫눈에 들어온 농다리는 다른 곳의 그것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다. 일전에 책에서 읽었던 지네가 움직이는 듯한 형상의 모습 이외에는 그리 특이한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 보니 돌의 색깔이 흔히 봐왔던 희거나 검은색의 화강암이 아닌 전체적으로 붉은 색을 띤다는 점이 눈에 먼저 들어왔다.

진천 농다리는 현존하는 민간의 돌다리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체적인 사료가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축조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초기 가설 연대를 고려시대 말기쯤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낭비성(충북 청주시와 청원군 일원의 삼국시대 지명)에서 도당산성(진천읍 벽암리 소재)으로 통하는 길목에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 때 설치되었을 것이라 추측하는 학자도 있다.

▲ 자연석을 다듬지 않고 쌓아 올린 교각들로 양끝을 유선형으로 오므리고 위로 올라갈수록 좁게 만들어 물의 저항을 덜 받게 했다.
ⓒ 이인우
농다리가 주목 받는 이유는 인근에서 나는 붉은색의 자연석을 이용해 축대를 쌓듯이 물고기의 비늘 모양으로 안으로 물려가며 쌓아올린 교각이 상판보다 넓고, 튀어 나온 교각의 양끝은 유선형으로 만들어 세찬 강물에도 오랫동안 버틸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하게 했기 때문이다. 또 돌과 돌을 서로 잡아당기도록 교묘하게 쌓고 작은 돌로 세운 교각은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어 토목공학적 연구 가치가 충분하다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다.

▲ 마치 지네가 움직이는 듯한 형상을 한 진천 농다리 풍경
ⓒ 이인우
농다리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함께 한다. 고려 고종 때의 권신인 임연(林衍, ? ~ 1270) 장군이 자신의 고향집 앞에 있는 세금천에서 눈보라가 치는 겨울 아침에 세수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강 건너편에서 젊은 부인이 내를 건너지 못하고 애를 태우고 있는 모습이 보여 이유를 묻자 친정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친정에 가는 길이라는 것. 그 정경을 딱하게 여긴 임연은 당장 용마를 타고 하루 만에 돌을 실어 날라 다리를 놓아줘 그 부인을 건너게 했다는 이야기다.

이외에도 임진왜란과 경술국치 그리고 한국전쟁 때에 농다리가 며칠간이나 큰 소리로 우는 탓에 마을 사람들이 밤잠을 설쳤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 두터운 교각 사이에 얹혀진 상판용 돌의 크기는 폭이 채 1m도 안되는 것으로 이 다리의 독특한 구조를 보여준다.
ⓒ 이인우
옛 기록에 따르면 맨 처음에는 28개의 교각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지금은 양쪽으로 두개씩 줄어서 24개만 남아있다. 다리 전체의 길이는 93.6m에 이르며 교각의 너비는 3m쯤 되고 교각 사이의 길이는 1.5~1.8m 정도로 상판으로는 폭이 채 1m도 안되는 평평한 돌을 한개씩 올려 사람이 건널 수 있게 했다.

택시에서 내리기 전 나는 기사 아저씨에게 "다리 건너에도 마을이 있나요?"하고 물었는데 아저씨는 직접 한번 건너가보라고 했다. 우선 농다리의 이곳저곳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리고 최근에 만들었다는 건너편의 정자를 지나 그리 오래지 않아 보이는 아니 최근에 농다리 주변을 관광자원화 하면서 조성한 듯한 성황당이 있는 고개를 넘어 갔다. 그랬더니 배를 타고야 건널 수 있을 만큼 넓은 초평 미호저수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시야 왼쪽 멀리로는 수량 조절을 위한 펌프 시설이 보이는 전형적인 저수지였다. 저수지 주위를 둘러봐도 온통 높은 산이 이어졌을 뿐 사람이 살 만한 마을은 보이지 않았다.

▲ 농다리를 건너 작은 고개를 넘으면 바로 나타나는 저수지 - 수변 조망대를 설치해 놓아 여름이면 좋은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 이인우
그럼 과연 그 옛날 이 '농다리'는 왜 만들었을까?

임연 장군의 전설 속 이야기에 나오는 젊은 여인은 폭 100여m의 세금천은 건너지 못했지만 한눈에 봐도 그 넓이가 농다리가 있는 세금천의 대여섯배에 이르는 초평 미호저수지는 한숨에 건넜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걸까?

여기서 전설의 이해와 해석의 한계에 부딪히고 말았다. 전설은 전설일 뿐 오늘의 과학적 상식과 논리로 분석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경험하는 기회가 됐다. 그렇게 바람찬 주말 오후 충북 진천 농다리 기행은 그곳에 깃든 전설과 현실과의 괴리감을 느끼며 입가의 미소를 머금고 왔던 길로 되돌아 버스 정류장이 있는 구산동으로 향했다.

▲ 다리를 건너 고갯마루 등성이에서 바라본 농다리의 풍경
ⓒ 이인우
사실 농다리가 있는 세금천은 농다리 이외에는 주변에 감상할 만한 볼거리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시선을 조금만 돌려보면 새로운 볼거리들을 찾을 수 있는데 세금천에서 중부고속도로 밑으로 난 쌍굴 통로를 통해 마을 쪽으로 올라오다보면 바로 왼쪽에 일명 ‘어수천약수’라고 불리는 소습천이 있다. 이곳은 세종대왕이 안질을 고치기 위해 청주의 초정으로 가던 중에 마셨다고 해서 어수천이라 불렸다고 한다. 바위틈에서 샘솟는 약수인데 겨울 가뭄이라 그런지 고일만큼의 물이 나오지는 않았다.

그리고 구산동 마을입구로부터 진천으로 나오는 길목에서는 임수전 부자의 충의를 기린 충신문을 볼 수 있으며 은진송씨의 열녀문도 만날 수 있다.

▲ 여행은 계절에 관계없이 새로운 풍경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이 있다. - 진천 농다리 위에서
ⓒ 이인우

덧붙이는 글 | 진천 <농다리>는 충북 유형문화재 제28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으며 충북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세금천에 위치해 있다.

<진천농다리 여행에 참고하면 좋은 책 몇 권>
한국의 석조문화 그 아름다움의 절정 - 다른세상 출판 / ISBN 89-7766-058-0
옛다리, 내 마음속의 풍경 - 저자 최진연 / 한길사 / ISBN 89-356-5621-6
답사여행의 길잡이 12 "충북" -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역음 / 돌베개 / ISBN 89-7199-08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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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그리고 조선중후기 시대사를 관심있어하고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기획을 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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