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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찍었던 사진(1980년 여름)
ⓒ 이풍호
설날 아침에 쓰는 편지-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 어머니께

설날 아침에 아버지 어머니가 그립고 보고 싶어 천상에 계신 두분께 문안 편지를 씁니다.

아버지 어머니의 손녀딸이자 저에겐 외동딸인 어린 진아를 데리고 호놀룰루로 이사를 온 지도 벌써 1년 반이 되었습니다. 남 캘리포니아의 버뱅크 공항을 우여곡절 끝에 떠나 비행기라는 밀폐된 공간에서 먹고 잠을 자면서 와야 하는 긴 여행이었습니다. '우여곡절'이라는 한 단어에는 저와 겨우 초등학교 2학년에 올라온 제 딸 진아, 미국이름으로 부르면 크리스티의 살아온 이야기가 모두 들어있습니다.

이제까지 살아온 발자취를 뒤로 하고 넓은 하늘을 날아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새 출발을 시작했습니다. 여전히 '파라다이스'라고 불리는 하와이에서 두번째 설을 맞이하면서 아버지 어머니가 그리워 이 편지를 씁니다.

오늘 다시 설을 맞이하면서도 저와 진아는 아버지 어머니가 살고 계신 고향땅 하늘가로 가지는 못할지라도 이 편지가 아버지 어머니가 살고 계시는 그곳 하늘 나라까지 도달되어 설날 아침에 읽으실 수 있으리라는 믿음과 소망으로 이 편지를 부칩니다.

▲ 지금 호놀룰루시내 알라와이 초등학교 3학년인 외동딸 진아(크리스티)
ⓒ 이풍호
하루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진아를 보니 이번 설날에 아버지 어머니가 더욱 보고 싶습니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뒤를 따라 꼭 일년 만에 귀천(歸天)하실 제 진아가 "아빠, 이제 한국에 가도 할아버지 할머니 다시 볼수 없어?" 라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런 진아가 아빠의 마음을 헤아려서인지 별 탈 없이 잘 자라고 있습니다. 이제는 제가 외출할 때마다 아빠의 안전에도 걱정을 해주는 나이보다 의젓한 데도 있습니다.

아버지, 기억하시나요? 어머니와 함께 나란히 누워 계신 하늘 나라에서 아직도 제가 지은 시를 가슴에 품고 계신지요?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일년 먼저 태어나셨더니 가실 때도 꼭 그렇게 일년 먼저 가시는 어머니를 위해 제가 임종도 못했었지요. 그리고 먼 타국땅에서 저는 불효자식이옵니다라 한탄하며 글 하나 달랑지어 제 가슴 속에 간직하였습니다.

어머니 가신 뒤 일년 뒤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가 가실 제에도 불효자식으로써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제 가슴 깊은 곳에 간직했던 글을 창숙 동생의 배려로 서산 형님 손으로 체온이 식어가는 아버지의 웃저고리 가슴 속에 넣어 드린 것입니다. 아버지가 가슴에 품고 가신 불효자식의 글을 어머니도 읽어보셨겠지요.

팔봉산 그림 속에서

뒷동산 키 큰 소나무 솔잎소리에
봄기운이 실려 오는 계절
나는 오리나 되는 중학교에서 돌아와
어머니를 찾았다
아버지는 먼 들밭으로 일나가시고
어머니의 인기척소리조차 들리지 않으면
부엌 물동이에서 찬물 한바가지 들이켜고
허기진 배를 붙들고
뒷동산을 넘어 범 고개 바라보이는
팔봉산 한 자락 끝 느리재까지 단숨에 올랐다

느리재 큰 바위에 앉아 땀을 식히며
아버지 어머니 우리 형제자매들이 살고 있는
발아래 엎드린 산천 마을을 내려다 보다
굽이굽이 무한천 감돌아 흐르는 곳
백제의 혼담은 뒷절로
답답한 가슴 풀러 불공드리러 가신
어머니를 찾아 다시 뜀박질로
산사에 이르면 반가이 맞이하며
절음식을 찾아주시던 어머니

팔봉산 그림 속에서
20 여년동안 뵙지 못한 채
지금은 가고 없으신 어머니와
내 어렷던 시절
새벽 장대비에 떠내려가는 복숭아를 건져다
나를 맛있게 먹이시던 아버지

장마로 불어난 벙것개울을 업어 건네주시던
아버지의 묵묵히 따뜻했던 잔등이며
서울로 고등학교 유학가는 나를 예산禮山역에서
어서 잘 가라며 눈물로 배웅해주시던
어머니의 열정이 솟아나던 손길이
아리게 아프게 아쉽게
후회막심 영영 살아서
팔봉산 그림 속에서
전설이 되어 있으리라는 것을
나는 믿는다.

(2003. 12. 10. 호놀룰루에서. 이 시를 귀천하신 나의 어머님(2003. 2. 20)과 아버님(2004. 2. 23)께 바칩니다.)


저는 초등학교 가기 전까지 자주 앓아 누워 아버지 어머니 속을 무던히도 아프게 하고 고달프게 했다지요. 지난 해 5월 아버지 어머니의 2남 4녀 중 1남 3녀가 제 집에 묵으며 기억 속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지난 일들을 이야기하며 울며 웃으며 밤을 새우기도 했습니다.

큰 누나가 제게 말하기를 "풍호야, 너는 지금 이렇게 건강하게 살지만, 아버지 어머니께서 너를 가장 힘들게 키웠단다. 하루 빤하면 다음 날 다시 아프고 해서, 오죽하면 너를 가슴에 품고 마당에서 삼베를 타기도 했었단다. 네가 어머니를 그렇게도 안 떨어져서 어머니가 변소간에도 못 갔었지"하시더군요. 아버지가 어디를 갔다 오면 제가 또 병이 나고해서 어머니는 아버지가 마음대로 외출도 못하시게 주의를 환기 시켜 주기도 했다지요.

특이한 체질로 제가 언제 어떻게 세상을 뜰까 봐 호적도 3살이나 줄었다지요. 3살이 되어서야 제가 사람 구실을 하게 되는지라 그 때서야 응봉면사무소에 출생신고를 했다고 하더군요. 이제 제가 진아를 키우면서 또 큰 누나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아버지 어머니께서 제게 베풀어 주신 은혜와 은공 그리고 부모님의 고생을 한번 더 깨닫고 있습니다.

설날 아침에 아버지 어머니가 더욱 더 그립고 보고 싶어 제가 며칠 전에 쓴 글을 두 분께 드리는 저의 설날 아침 편지에 적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사랑합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못드렸던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두분 영원히 함께 계시는 하늘나라에서 더욱 더 서로 이해하시고 사랑하소서.

무지개 뜨면

새벽에 혼자
아버지 어머니가
그립고 보고 싶어라

고등학교 다닐 때
나는 검정 교복에
흰테 둘린 모자를 쓰고

하얀 외투입고
서울 구경 나들이에
남산 팔각정 앞에서
함께 찍은 아버지의 기념사진

어릴 적 기억에
눈부시게 하얀 치마 저고리 입고
아주까리 기름 손바닥에 살살 비벼발라
참빗으로 머리 곱게 빗고
대흥大興 읍내 사진관에서
손수 찍어오신 어머니의 기념사진

아침마다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아늑한 고향집 대청마루 위에
걸려있었는데

아버지 어머니 가신 이제
어디서 누가
이렇게 그리는 마음을
달래 줄 이 있으리

타국의 하늘 아래
외로운 나도
아버지 어머니 처럼
세월이 가면 귀천歸天하리라

태평양 너머 고향땅으로
아버지 어머니 처럼
알록달록 고운
무지개 뜨면 귀천歸天하리라. (2005. 2. 2.)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충남 예산 출생, 1980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현재 호놀룰루에 살고 있으며 현대문학, 월간문학, 시문학, 시조문학, 죽순, 대전문학 등을 통해 문학활동을 시작했음. 이풍호 문학서재(http://paullee.kll.co.kr)에도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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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12.20 LA로 이주 .1986 미국시민.1981-2000 Caltrans 전기기사 .인하공대 전기과 졸업 CSULA 영문과 졸업 .2003.9.27- 호놀룰루거주 .전 미주중앙일보 기자 .시인(월간문학 시조문학 1989,시문학 1992,현대문학 1995) .현 하와이 토목기사공무원 .my YouTube: http://bit.ly/2SQY7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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