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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박인환은 자신의 시 '가을의 유혹'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여름은 느리고 인생은 가고
가을은 또 다시 오는 것이다……'

▲ 아래로 아래로 날개 없이 추락한 낙엽과 밤송이
ⓒ 배을선
이곳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도 가을이 찾아왔다.

이른 아침 영상 5도의 차가운 공기에 사람들의 입가는 굴뚝이 되어버린다. 빗방울이 요란하게 흙과 창문과 굴뚝을 때리는 사이 안개는 소리없이 아래로 다가온다. 바람소리는 요란하며 어둠은 적막하다. 그리하여 화가 에곤 쉴레는 이 곳을 '안개와 어둠의 도시'라고 불렀던가.

▲ 에곤 쉴레의 자화상
ⓒ 에곤 쉴레
지난 여름 관광객들로 붐볐던 이탈리안 스타일의 아이스크림 가게는 슬슬 바깥에 놓아두었던 테이블과 의자를 창고에 정리해두기 시작했으며 광합성을 즐기는 사람들로 바빴던 노천카페들은 색깔을 바꿔 입은 낙엽들로 가득하다.

스웨터를 입고 머플러를 두른 사람들뿐 아니라, 모자와 장갑, 심지어 오리털 파카를 입은 사람들도 눈에 띈다. 아이들은 춥다는 뜻의 형용사인 '칼트(kalt)' '칼트'를 외치며 아버지의 넓은 가슴에 안기거나 할머니의 따뜻한 손을 잡는다. 일기예보를 전해주는 기상캐스터는 음울한 날씨를 전해주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대부분의 이곳 사람들은 여름이 가는 것을 슬퍼한다. 한국에 비교를 하자면 이곳의 가을은 낮과 밤, 아침과 오후의 일교차가 매우 크며 해가 더 빨리 진다. 알프스산맥, 혹은 도나우 강으로부터 불어오는 강하고 매서운 바람은 한밤 중의 잠을 깨울 정도다. 비도 자주 오며 첫눈도 빨리 내린다. 그러기에 변덕스러운 가을날씨를 반기는 것보다 온화하고 따뜻한 여름날을 그리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 쓸쓸한 가을날의 벤치
ⓒ 배을선
그러나 어쩌랴. 자연과 싸울 수는 없다. 계절은 가고 오는 것. 이왕 떠난 계절이라면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듯 가슴앓이를 하더라도 놔주어야 한다.

비엔나에서 가을은 문화의 계절

비엔나의 가을은 문화를 즐기기에 제격이다. 오스트리아는 문화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10월 하루 '디 랑에 나흐트 데어 무젠(Die Lange Nacht der Museen)' 즉, '미술관을 위한 긴 밤' 행사를 개최한다.

오스트리아 전역의 미술관과 박물관은 다음날 새벽 1시까지 문을 연다. 사람들은 처음 방문한 박물관이나 미술관의 티켓 한 장만으로 모든 교통수단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으며 시간이 허락하는 한 새벽 1시까지 열린 모든 전시회를 관람할 수 있다.

이 행사는 해를 거듭할수록 대성공을 이루어 대도시의 유명한 미술관부터 조그만 도시와 마을의 모든 문화회관까지 참여하는 곳의 숫자가 점점 늘고 있다.

▲ 새롭게 문을 연 오페라 하우스
ⓒ 배을선
여름 한 시즌 내내 문을 닫았던 비엔나의 오페라 하우스도 문을 다시 열었다. 그냥 문을 연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리노베이션 끝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문을 활짝 열었다.

좋은 좌석에 앉아서 오페라를 감상하려면 적어도 15만원에 가까운 100유로를 투자해야 한다. 그러나 2~3시간 오페라를 서서 감상할 수 있으며, 그 티켓을 사기 위해 또 다른 2시간을 서서 기다릴 수 있는 시간과 젊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호주머니에서 2유로 동전만 꺼내면 된다.

단 2유로에 베르디의 '아이다'(Aida)나 푸치니의 '토스카'(Tosca)를 감상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에 가깝다. 이곳에서 문화의 '정의'(定義)란 빈부의 격차 없이 누구나 누려야 하는 권리이기 때문이다.

▲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
ⓒ 벨베데어
에곤 쉴레에게 비엔나가 '안개와 어둠의 도시'였다면 구스타프 클림트에게 이 도시는 정열의 도시였다. 그러기에 클림트가 금빛 찬란한 '키스'같은 대작을 그릴 수 있지 않았을까?

클림트나 쉴레의 작품들이 세계 다른 나라에서 순회전시회를 연다고 해도 클림트의 '키스'는 벨베데어 궁전을 떠나지 않으며 쉴레의 음울한 자화상도 레오폴드 뮤지엄을 떠나지 않는다.

비엔나의 오만한 자긍심이 드러나기는 하지만, 명화를 보러 비엔나까지 찾아온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겨줄 수는 없다. 김치 없는 한식, 경복궁 없는 서울을 생각해 보라. 클림트와 쉴레는 비엔나의 문화아이콘이다.



비엔나 커피로 가을의 허전함을 달래다

추워진 날씨 덕에 노천카페의 테이블이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비엔나에서 커피를 제대로 마시려면 담배연기가 자욱한 카페 안에서 마시는 것도 의미 있다.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내 맘을 내 속을…'이라는 유행가가 있었다. 하지만 비엔나에서는 그냥 커피 한 잔이 없다. '어떤' 커피 한 잔이 있을 뿐이다.

'멜랑지'(Melange)는 진한 커피에 우유를 탄 뒤 부드러운 우유 거품으로 장식을 한 대표적인 비엔나 커피다. '클라이네 블라우너'는 흔히 알려진 이탈리안 에스프레소다. 이밖에 우유를 듬뿍 넣은 '카페라떼'와 이탈리아식 멜랑지인 '카푸치노'도 비엔나에서 잘 팔리는 커피메뉴다. 아이스커피는 사시사철 판매되는 한국과는 달리 대부분 여름에만 주문이 가능하며 얼음을 넣어주는 카페는 거의 없다.

▲ 카페 뮤지움. 이 곳에도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 배을선
비엔나에서 '테이크 아웃'할 수 있는 커피는 스타벅스에서만 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국의 전통에 대해 매우 보수적인 비엔나 사람들에게 커피를 마신다는 것은 그 자체가 문화이기 때문이다.

환하고 깨끗한 스타벅스에 앉아 종이컵, 또는 커다란 머그잔에 담긴 커피를 마시거나, 커피를 '테이크 아웃'해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마시는 것은 비엔나의 커피 문화가 아니다.

비엔나의 커피는 커피잔에 잔받침, 커피스푼을 올려놓은 물 한 잔과 함께 은쟁반에 제공되는 것이 원칙이다. 보통 비엔나 사람들은 언제나 같은 카페에 앉아 매일 같은 메뉴의 커피를 마시면서 신문을 보거나 독서를 즐긴다.

이들은 새로운 카페보다는 전통 있고 오래 되었으며, 낡고 어두운 카페에서 장시간 앉아 있는 것을 즐긴다. 빈 테이블이 없을 때 나가야할 사람은 커피 한 잔으로 서너 시간을 앉아 있던 손님이 아니라 새로 들어온 손님이다.

비엔나의 가을을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

▲ 높고 푸른 비엔나의 하늘
ⓒ 배을선
비엔나의 가을을 즐기는 가장 훌륭하면서 저렴한 방법은 바로 산책이다.

가을에 하는 광합성은 봄에 하는 광합성보다 더 건강하다고 한다. 두툼한 스웨터에 머플러를 두르고 낙엽을 밟는 일은 방 안에 틀어박혀 클림트나 쉴레의 화첩을 뒤적거리기보다 더 예술적인 행위일지 모른다.

비엔나의 변두리는 산책을 즐기기 더 없이 훌륭하다.

맑고 높은 하늘 아래, 그리고 발목을 휘감고 있는 토양 위로 느낄 수 있는 것은 위대한 자연뿐이다. 하늘은 푸르고, 와인농장의 포도는 농하게 익어간다. 낙엽을 밟는 소리와 밤송이가 떨어지는 소리는 구수하다. 불어오는 바람은 상쾌하기까지 하다.

▲ 와인 농장에서 익고 있는 포도
ⓒ 배을선
가을이 가기 전에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즐겨야 한다. 이 곳은 전형적인 중유럽의 날씨로 언제 첫눈이 내려올지 모른다. 겨울이 오면 두꺼운 이불을 뒤집어쓰고 러시아의 혁명지도자 트로츠키가 한 말처럼 '한 권의 책을 꼼꼼히 읽어야'할지 모른다. 비엔나의 빈곤한 유학생에게 추운 겨울은 혹독한 고문의 계절, 그야말로 독서의 계절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아름다운 가을만큼 그리운 것이 없다만, 어두운 사색을 즐기기에 비엔나의 가을도 꽤나 유혹적이다. 그 가을을 한 폭의 풍경화로 그리지 못해 이렇게 글로 대신했다.

▲ 벌써 붉게 색이 바뀐 거리의 나무, 이 곳을 산책하다.
ⓒ 배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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