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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멘트에 붙어 울고 있는 참매미
ⓒ 이종찬
1986년 그해 여름은 정말 무더웠다. 구로공단 곳곳에서는 참매미가 귀고막이 따갑도록 시끄럽게 울고 있었다. 근데, 참매미는 가로수에만 붙어 우는 게 아니었다. 마치 구로공단 노동자들의 파란 꿈처럼 부우연 하늘을 찌르고 있는 시멘트 전봇대에도 서너 마리씩이나 붙어 울고 있었다.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하루종일 구로공단 곳곳을 헤매다가 온몸이 땀에 절고 지쳐 뜨거운 아스팔트 바닥에 그대로 퍼질고 앉아 그냥 엉엉 울고 싶은 내 마음처럼 그렇게. 아니, 사람의 그림자 하나 얼씬거리지 않는 구로공단에서 마구 울고 있는 저 참매미들도 나처럼 시골 어딘가에서 무작정 상경했는지도 모른다.

저 참매미들도 가난하고 배가 고픈 시골에서 살기가 싫어서, 그곳에서 뼈가 빠지게 일해도 별 볼 일 없는 그런 한평생을 보내기가 싫어서, 나처럼 서울로 날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나처럼 서울 변두리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다가 어쩔 수 없이 구로공단 시멘트 전봇대를 달셋방 삼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하철 2호선 신대방역 가까운 곳에 달셋방을 얻고 서울시민이 된 나는 그때부터 이력서를 10여 장 들고 구로공단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며 일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매일 아침 7시에 일어나 밥을 지어 먹고 설거지를 끝내자마자 구로공단에 나가 구직광고란을 살펴보며 여기저기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내가 취직할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여기는 내가 다닐만한 곳이다 싶어 이력서를 내고 면접을 보기만 하면 보기좋게 떨어졌다. 경력이 너무 많고 나이도 너무 많다는 게 그들의 한결같은 답변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나와 같은 경력자를 쓰게 되면 월급을 많이 주어야 되기 때문에 쓸 수 없다는 거였다.

"월급을 적게 주셔도 좋습니다. 우선 공장에 다니게만 해 주신다면 정말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글쎄, 그게 안 된다니까요. 좀 더 큰 공장을 알아 보세요. 그 정도 경력과 나이로는 아마도 구로공단 안에서 취직을 하기가 쉽지는 않을 겁니다."


나는 이력서를 새롭게 썼다. 어차피 나이는 속일 수 없는 것이고, 창원공단에서 일한 경력을 2년 정도로 줄였다. 그리고 창원공단 주변의 조그만 하청업체 등지를 떠돌아 다니며 일용직 노동자로 일한 것으로 적었다. 그래야만 우선 집에서 가까운 구로공단에 취직을 하여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 식의주가 가장 먼저가 아닌가. 식의주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나는 서울에서 살아갈 수가 없다. 우선 식의주를 해결할 수 있는 그 어떤 구조를 갖추어야만이 서울에서 잔뿌리라도 내리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어느 정도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내 꿈인 문학을 할 수 있을 것 아닌가.

나는 매일 아침 8시에 집에서 나와 구로공단 구직광고란과 전봇대에 붙은 모집공고까지 죄다 살핀 뒤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점심 때가 다가오면 집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은 뒤 다시 저녁 6시가 될 때까지 구로공단 곳곳을 이 잡듯이 뒤졌다. 하지만 나는 가는 곳마다 보기좋게 퇴짜를 맞았다.

구로공단의 하늘은 안개 낀 듯 희부옇게 찌푸려 있었다. 단 하루도 내 고향 창원의 그 맑고 푸르게 빛나는 하늘을 볼 수가 없었다. 희부연 하늘에 가끔 피어나는 뭉게구름도 먼지 묻은 솜사탕처럼 지저분하게 보였다. 마치 내 마음에 희부옇게 끼어 금세 걷힐 듯 걷힐 듯하면서도 좀처럼 걷히지 않고 있던 그 불안한 나날들처럼.

파아란 하늘이 보고 싶었다. 슬쩍 째려만 보아도 금세 쨍 하고 금이 갈 것 같은 그런 거울빛 하늘, 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금세 푸른 물이 확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그런 새파란 하늘이 정말 보고 싶었다. 매일 아침마다 집을 나서면서 오늘은 오늘은 했지만 하늘은 내 일자리처럼 그렇게 희부옇게 흐려 있었다.

그렇게 보름쯤 흘렀다. 그때부터 나는 구로공단을 벗어나 1호선 전철을 타고 부천공단을 헤집기 시작했다. 부천공단에는 규모가 큰, 그러니까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그런 반듯한 공장들이 제법 있었다. 하지만 부천공단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특히 대기업 간판이 붙은 공장들은 노동자들을 수시 모집하지도 않았다.

갑자기 서울하늘 아래 나 홀로 뚝 떨어진 고아가 된 기분이 들었다. 계속 이럴 게 아니라 우선 막일이라도 나갈까. 아니면 근로조건이나 임금이 턱없이 열악하긴 하지만 집에서 걸어 다닐 수 있는 곳에 있던 그 하청업체라도 나갈까. 벌써 추석도 점점 다가오고 있는데…

막막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대로 맥없이 낙향할 수도 없었다. 그래.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이번 추석에는 반드시 고향에 다녀와야만 한다. 내가 서울에서 당당하게 뿌리내려 잘 살아가고 있다는 그런 모습을 부모님과 친지들, 그리고 가까운 글벗들에게 보여줘야만 한다.

초조했다. 추석이 다가올수록 나는 점점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그래. 이런 상황에서 내가 더이상 무엇을 망설일 것인가. 나는 오래 전부터 눈여겨 보아 두었던 대림동의 그 전봇대로 갔다. 다행히 그때까지도 그 전봇대에는 <사출공 수시 모집>이라는 그 조그만 모집공고가 참매미처럼 들러붙어 있었다.

나는 서둘러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이력서를 들고 내가 살고 있는 집에서 10여 분 남짓한 거리에 있는 그 초라하고 조그만 사출공장에 갔다. 그 공장은 간부를 포함해서 모두 20여 명 남짓 일하고 있었다. 근무는 매주 돌아가면서 12시간 1,2교대에 임금은 한 달에 10여만 원 남짓했다.

"창원공단에 있는 대기업에서 일하다가 이런 곳에서 일할 수 있겠어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요. 같이 손잡고 열심히 한번 해 봅시다. 그리고 그 정도 실력이라면 우리 공장에서 한 달쯤 일하면 모든 것을 다 파악할 수 있을 거예요. 직책과 임금은 그때 가서 다시 한번 조정합시다."


물불 가릴 겨를이 없었다. 그날 나는 관리부장에게 내일부터 당장 일하러 나오겠다고 말한 뒤 관리부장의 안내로 그 공장을 찬찬히 둘러봤다. 100여 평 남짓한 침침한 공장 안에는 사출기가 10여 대 정도 있었고, 공장 한 편에는 제품 검사를 하는 아주머니들이 두어 명 앉아 있었다.

첫 눈에 보아도 이 공장이 몹시 영세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다행스러웠던 것은 이 공장에서 생산하는 제품이 대기업에 직접 납품하는 제법 유명한 플라스틱 제품이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공장을 둘러본 나는 관리부장에게 대충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몇 번 끄덕인 뒤 그 공장을 빠져나왔다.

"내일 아침 7시 30분까지는 꼭 오셔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힘들더라도 두 눈 꼭 감고 한 달만 일하십시오. 적어도 과장 직책은 제가 반드시 보장하겠습니다."


사실, 내가 서울에 올라온 목적은 공장에 취직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내 문학을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 서울에 올라왔다. 그리고 문학서적을 전문으로 펴내는 출판사 편집부에서 일을 하거나 잡지사 기자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인 것을 난들 어찌하랴.

갑자기 바다가 보고 싶었다. 그때 문득 내가 부천공단에서 헤맬 때 앞 유리창에 '월미도'라고 표시한 버스가 생각났다. 그래, 월미도라면 한국전쟁 때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한 곳이 아닌가. 그래. 월미도로 가자. 월미도에 가서 푸르른 서해를 바라보며 다시 한번 나를 꼼꼼히 되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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