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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하늘이 잔뜩 흐리더니 간간이 비를 뿌려 우산을 받쳐들고 국립 현대미술관을 찾아 나섰다. 전시장 가까이엔 초등학교 어린이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아마 방학 끄트머리에서 밀린 숙제를 하느라 저렇게 바삐 움직이는 것이리라.

평소엔 관람객이 없어 현대미술관 입구에 놓여진 백남준의 덩치 큰 비디오 아트 작품을 보며 '괜히 전력을 소모한다'고 은근히 신경을 썼던 나로서는 이처럼 복작복작 생기 넘치는 현장이 오히려 반가웠다.

▲ <평화선언 2004>를 전시하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정문.
ⓒ 박소영
이번 전시회의 주제는 '평화'로 요즘 내가 자주 곱씹고 있는 화두이기도 하다. 사실 주제만 보고 흐린 날씨에도 여기까지 찾아왔다. 소주제를 소개하면, 1. 전쟁과 전쟁의 참화, 테러리즘, 반전, 전쟁의 고통과 상처 2. 평화를 위협하는 것들, 특히 분단의 고통과 상처, 일상 속에 감추어진 폭력과 억압, 3. 평화에 대한 역사적, 철학적, 인간학적 접근 등이다.

이제, 이러한 주제를 뒷받침 하는 세계적인 미술가들의 200여 작품을 감상할 차례다. 전시관 입구에 놓여진 작품 중 가장 먼저 내 눈길을 사로잡은 작품은 평화의 반대적 이미지를 한번에 표현한 검은 캔버스. 그 어두운 화면 속엔 부릅뜨다 못해 눈알이 밖으로 튕겨져 나갈 것 같은 분노의 시선이 담겨져 있다.

내 머리엔 3·15 부정선거 시위로 4·19의 도화선이 되었던 김주열 열사 이미지가 퍼뜩 그려진다. '이렇게 시작하는구나. 처음부터 인상적인 작품에 다리 품을 팔아 찾아온 값을 톡톡히 하는구나!' 싶었다. 사실 이번 전시작들은 지극히 관념적일 것이라 예상을 했던 터였다. 내겐 '평화'란 단어가 이론적인 수준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조심스레 낙관하며 바라보는 작품들의 면면은 이랬다. 퍼포먼스를 여러 사진으로 엮어 단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작품, 하얀 공간에 관객이 직접 들어가 반사된 자신의 그림자가 조형물과 함께 어우러져야 완전한 작품이 되는 아이디어 작품 등….

그러다 전쟁의 흔적을 여실히 보여 주는 작품 한 점을 만났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이라크 전쟁, 그 속에서 사람들이 남긴 삶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작품, 이름하여 '이라크에서 온 편지'이다.

불에 그을리다 만 가족 사진들, 탱크가 짓밟고 지나가 찌그러져 있는 캔, 누가 썼을지 모르는 라이터, 그리고 누렇게 바랜 종이에 서너 장을 넘겨 쓴 긴 편지. 이 모든 것들이 불바다의 사막, 그 참담한 땅에서 바람에 쓸려, 또는 보관이라는 명분의 비닐 봉지 속에 담겨 이 먼 곳, 내 앞에까지 오게 되다니….

선 자리에서 고개를 돌리니 일본에 의해 저질러진 무차별적인 폭력을 묘사한 작품들이 고개를 내민다. 역사적인 사실들을 단호하고 거침없이 표현한 그림은, 미술에 문외한인 내가 감지할 수 있을 정도로 쉬웠다.

작가의 작업 과정이 관람자에게 드러나는 작품도 있었다. '놀라운 세상'이란 제목이 붙은 이 작품은 멀리에서도 눈에 띄었다. 각국 어린이들이 평화의 메시지와 그림을 그려 넣은 명함 사이즈 만한 종이를 붙여 만든 반타원형의 벽은 하나의 건축물처럼 보인다. 관람객들은 그 안으로 들어가 세상의 모든 어린이들의 이야기를 소리 없이 들을 수 있다.

▲ 권순철의 '무제'
ⓒ 국립현대미술관
우리 일상 곳곳에 배어 있는 수많은 폭력들을 포착해 낸 작품들도 있다. 이들 작품은 다소 만화적이거나 단편적인 여러 그림들을 모자이크해 놓은 것으로, 카페라는 자유로운 공간에서조차 나치의 제국주의가 들먹여지는 일상을 나타냈다.

한쪽 눈이 붕대에 감긴 채 다른 한 눈으로 또렷이 세상을 응시하는 아이에게서 전쟁은 그들의 것, 남의 것이 아님을 다시 한 번 상기해 준다.

지금 이곳, 음악과 커피와 초록 풀들이 잘 어우러진 평화로운 미술관. 하지만 그 속엔 평화 대신에 전쟁이 현존하고 있다. 나는 전혀 평화로울 수 없는 마음의 무게를 지고 돌아나온다. 아, 평화여!

돌아오는 길, 하늘은 한층 더 내려앉아 있고 비도 부슬부슬 내린다. 한껏 낮아진 하늘엔 대공원의 빈 리프트들이 구름처럼 떠 있다. 나무들은 여전히 매미를 동원해 초록 세상을 알린다. 하지만 내 눈은 미술관 안에서 본 검은 색과 빨간 색에 각인돼 나뭇잎의 빛깔이 깨끗한 초록이 아닌 검붉은 초록으로 보인다.

▲ 김익중의 '놀라운 세상'
ⓒ 국립현대미술관

▲ 서용선의 '폭격'
ⓒ 국립현대미술관

▲ 블라드미르 벨리코비치의 '까마귀'
ⓒ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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