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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여름휴가는 지금까지 보낸 여름휴가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올 여름 우리 4식구는 매년 찾던 콘도나 민박, 자동차 위주의 여행에서 벗어나 한 곳에 머무르는 야영을 하기로 합의했다.

두 딸들도 이제는 초등학교 5학년, 2학년으로 텐트 생활에 큰 무리가 없을 것이고 아이들 교육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딩크족에 가까운 후배 한 명이 본인도 텐트를 치겠다며 동참하기로 했고, 선배 식구는 다음날 합류하기로 했다.

먼저 텐트를 고르는 일이 급선무였다. 3만원대부터 수십만원에 이르기까지 텐트의 종류는 다양했고 인터넷쇼핑몰에 이것저것 끼워 팔기하는 상품이 많아 선택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말 저말 듣고 결국 고르고 고르다 텐트는 좋은 것을 써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텐트의 명품(?)이라는 ㅈ텐트와 버너, 코펠 등을 함께 파는 상품(싯가 19만9000원)을 주문했고, 상품은 이틀 뒤에 도착했다.

그러나 막상 야영생활을 계획하다 보니 필요한 물건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텐트 바닥에 까는 매트리스, 실내등, 간이의자 등 이것저것 챙기다 보니 부식비용과 함께 제법 비용이 들어갔다. 그래도 한여름 성수기 방값으로 날리는 비용을 생각하니 궁극적으론 절약이었다.

이럭저럭 준비를 대충 끝나고 강아지를 포함한 우리 다섯 식구는 1차 목적지인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휴양지로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일요일 아침, 차는 막힘 없이 뚫렸고 천안까지 국도로 내려간 우리는 통행료 비싸기로 소문난 천안 논산간 고속도로에 들어섰다. 거의 일직선인 고속도로는 마음만 먹으면 아우토반의 맛을 만끽할 수 있는 길이었지만 교통규범을 준수하며 우리는 오후 1시경 고산휴양지에 도착했다.

쾌적하고 한적한 휴양지를 머릿속에 그리며 들어선 우리는 길가에 빽빽이 들어찬 주·정차 차량들과 서울의 인근유원지를 연상케하는 인파를 보면서 ‘이거 잘못 왔구나'하는 낭패감에 한동안 어찌할 바를 몰랐다.

▲ 2003년 8월 12일 고산 휴양림에서 텐트 생활
ⓒ 이종락
날씨마저 무덥고 습해 불쾌지수를 높여가면서 우리는 이곳 저곳을 헤매다 다행히 운동장 옆의 야영 데크에 텐트를 설치했다.

흘러내리는 땀을 훔쳐가며 그래도 내 집이라고 텐트를 설치하고 식사준비, 설거지 등 본격적인 야영생활에 적응하면서 우리 식구는 새로운 맛의 휴가를 체험하기 시작했다. 특히 함께 길을 나선 4개월된 강아지 순동이는 급작스레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는지 천방지축 뛰어다니느라 정신이 없었고 숲풀 속에 주둥이를 들이대며 아무거나 집어먹는 통에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아이들은 처음으로 아빠 엄마와 함께 해보는 야영이 즐거운지 깔깔거리며 강아지와 뛰어 노느라 정신이 없었다.

해가 저물면서 일요일의 휴양지를 가득 메웠던 차량과 인파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고 밤이 이슥해지면서 텐트 주변에는 적막감마저 돌았다.

빗소리에 밤새 뒤척인 텐트 첫날밤, 새벽의 맑은 공기로 피로함을 날렸다. 빗소리가 프라이팬에 기름 튀기는 소리 같다는 딸아이. 그제서야 우리는 깊은 산의 휴양림에 왔구나 하는 포근함과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꿀맛 같은 산 속에서의 저녁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풀벌레와 새 울음 소리 속에서 어둠과 친구가 되어갔다. 간간이 내리던 빗방울은 밤이 되면서 굵기를 더해갔고 도시 같으면 이른 시각인 밤 10시도 되기 전에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먼 옛날 전기도 없던 시절, 저녁 후 우리의 조상들은 어둠 속에서 무엇을 하고 살았을까 생각하면서 식구들은 난생 처음 텐트 안에서 서로가 가족임을 확인했다. 캄캄한 어둠 속 밤이 깊을수록 빗줄기는 더욱 거세졌고 텐트 속의 우리는 캄캄한 세상 속의 한 점이 되어 떠 있는 듯했다.

비록 안전한 지대였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는 가장으로서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핸드폰이 빗소리를 깨고 울렸다. 텐트를 갖고 휴가 떠난 것을 알고 계신 서울 집의 부모님이 서울에 폭우가 내린다면서 불안한 마음에 전화를 하신 것이었다.

여기는 절대 안전지대라며 안심시켜드린 후 전화를 끊고 나니 빗줄기는 더욱 굵어졌고 설마 하는 마음은 혹시 하는 불안감으로 바뀌어 밤새 뒤척거리며 잠을 설쳐야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스름한 새벽기운이 내려오면서 나는 텐트 밖으로 나가 태고의 신비감마저 감도는 산자락의 공기를 가슴깊이 들이마셨다. 산 공기가 좋아서인지 밤새 잠을 설쳤음에도 정신은 금세 맑아졌고 그다지 피로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신통하게 느껴졌다.

이튿날 정오경 선배식구들이 합류하면서 텐트촌은 새롭게 북적거렸고 신나는 물썰매장, 계곡에서의 물놀이로 아이들은 시간가는 줄 몰랐고 어느덧 산속에서의 저녁은 다가왔다. 얼마나 몸값을 하려는지 햇볕은 구름 속에 숨어 얼굴한번 보기 힘들었지만 우리는 오히려 이런 날이 좋다며 자연 속에서 어슬렁거리며 무상의 시간을 즐겼다.

나무그늘 아래 누워 살랑이는 바람을 맞으니 세상만사 홍진이 그렇게 덧없게 느껴질 수 없었다. 우리 일행은 저녁식사 후 촛불 앞에 모여 저마다 소망을 발표하는 시간을 갖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일찍이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마침내 햇볕이 힘들게 구름사이를 비집고 모처럼 눈부신 자태를 드러내면서 일순 산 속의 풍경은 뜨거운 한여름으로 달구어졌다. 눅눅한 옷가지들을 말리고 주변을 청소하면서 우리는 아쉬움 속에 한번 더 계곡으로 몸을 던졌다.

대충 점심을 때운 후 우리는 2박3일을 머물렀던 고산휴양지를 떠났다.

서해의 일몰에 흠뻑 빠진 춘장대...밤 문화는 도시의 유흥가를 그대로 옮겨 놔

마지막 밤을 바닷가에서 보내려는 우리의 차는 서해안고속도로를 거쳐 춘장대 해수욕장으로 이동했다.

산소를 듬뿍 듬뿍 마시던 산 속과는 달리 바닷가의 공기는 시원하면서도 왠지 상쾌하지는 않았다. 텐트 치는데 2만원을 부르더니 이곳저곳 품을 판 결과 1만원에 일행의 민박집과 가까운 곳에 두 번째 텐트를 설치했다. 텐트촌 주변은 피서객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들이 곳곳에 쌓여 있어 모기가 기승을 부리기도 했다.

▲ 춘장대 일몰 앞에선 아이들
ⓒ 이종락
저녁을 통닭과 과일로 해결한 우리는 편안한 복장으로 바닷가로 나갔다. 운이 좋아서일까. 붉은 구름으로 첩첩이 뒤덮인 서해의 일몰은 눈앞에 환상적인 풍경을 펼쳐 보였다. 바닥을 드러낸 뻘에 선 사람들은 연신 감탄의 소리를 내질렀다.

나는 연신 디카의 셔터를 눌러대면서 ‘사진작가들이 이런 사진 찍어서 돈을 버는구나'하는 천박한 생각까지도 하곤 했다. 강아지까지 흥이 겨운지 그만 뻘 속에 실례하고 말았다.

끝이 안보이는 춘장대 해수욕장은 밤이 깊어가면서 도시의 유흥가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해 깊은 산 속의 휴양림과는 극명한 대조를 보였다. 즐비한 상점들, 오락시설과 나이트, 단란주점까지… 밤늦게 울려 퍼지는 음악소리는 해변의 밤잠을 설치게 만드는 주범이었다.

깊은 산이 의인과의 만남이고 바다가 도시아가씨와의 만남이라면 지나친 비약일까.

우리 가족 처음으로 텐트에서 먹고 자고 부대끼며 보낸 3박4일의 여름휴가, 산과 바다를 동시에 맛본 2003년 여름휴가는 고생만큼 색다른 추억을 남겨 주었다. 이것저것 계산해보니 텐트 등 기초투자를 제외하면 우리 네 식구는 20만원이 채 안되는 돈으로 올 여름휴가를 알뜰하게 보낸 셈이 되었다.

아침저녁 선들바람이 불어오는 늦여름 사무실에서 나는 요즘 텐트 예찬론자가 되어 가고 있다. 버리기 바쁜 현대의 물질풍요 속에서 인간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도구로 살아보는 텐트생활, 새삼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끌어 안고 사는가를 되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다시 한번 기회가 되면 언제라도 텐트를 싸들고 산 속으로 떠나고 싶은 생각이 굴뚝처럼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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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을 찬 유학자 남명 조식 선생을 존경하고 깨어있는 농부가 되려고 노력중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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