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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태풍이 지나간 뒤라 화창한 날이었습니다. <월간 아리랑> 주관으로 일본 안에 있는 근대사 현장을 다녀왔죠. 목원대 김정동 교수님과 30여명의 한국분들과 함께 이케부쿠로에서 전철에 몸을 실었습니다.

▲ 김정동 교수와 함께 한 일본 속 한국근대사 현장답사
ⓒ 안창규
목적지는 히다카시. 그곳에는 1000년 전 고구려인들이 정착하여 그들의 숨결이 남아있는 곳이라고 들었습니다. 전철 안에서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는데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천년 전 이 일본 땅을 찾아 먼길을 나섰던 선조들, 그 하늘을 그대로 쳐다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머문 자리에는 흔적들이 남는다고 합니다.

내가 태어나기 1000년 전 어느 맑은 날, 이국의 맑은 하늘을 보면서 그들은 어떤 생각들을 했을까요? 지금이야 기술 발달로 이웃나라인 일본으로 건너오는데 비행기를 타고 2시간 정도면 가능하지만 1000년 전 그 험난한 바닷길을 건너왔던 사람들은 어떤 사연을 갖고 있었을지 궁금해 지더군요.

이국 하늘 아래서 새로운 터전을 잡고 나름대로의 삶을 열심히 살았을 그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이국의 하늘 아래 있는 나의 모습을 되새겨 봅니다. 생각에 잠긴 지 1시간 남짓, 목적지인 코마에키(高麗驛)에 도착했습니다. 전철이 멈추고 문이 열리는 순간 낯익은 한자가 시선을 고정시킵니다.

高麗. 우리는 고려라고 읽지만 일본어로는 '고마'라고 불립니다. 일본의 한 지역 이름이 "고려"라는 것에 놀라운 마음이 들더군요. 고마역은 한국 어느 시골마을의 조그마한 역을 닮아 있었습니다. 역 앞 광장에 세워져 있는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등 빨간 장승도 한국의 어느 경치와 닮아 있더군요. 일행들 모두가 정겨운 풍경에 미소를 지어 보입니다.

▲ 코마역 뒤에 조각점을 운영하는 하마다씨
ⓒ 안창규
고마역 앞에서 간단히 기념촬영을 하고 목적지인 고려신사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시골마을이라 버스조차 잘 다니지 않는 한적한 그 곳을 걷기 시작했죠. 철길을 건너고 도로로 나가는 길옆에 섰을 때 그곳에서도 낯익은 정승을 보게 되었습니다.

고마역 뒤쪽에 자리잡고 있는 조그마한 조각점 앞의 장식입니다. 이곳을 여러 번 왔던 분의 안내로 조각점에 들어섰습니다. 구수한 나무냄새가 코로 밀려 들더군요. 주인아저씨 하마다씨가 반갑게 일행을 맞이합니다.

귀찮을 듯한 불청객들을 오히려 반가워 합니다. 사진을 찍고 있는데 요코다씨 부인이 과자 봉지를 들고 나와 꼬마 일행에게 과자를 건네주기까지 했습니다. 꼭 한국의 어느 시골인심을 보는 듯 해 절로 기분이 좋아집니다.

▲ 고려신사로 가는길
ⓒ 안창규
한적한 국도를 따라 걸었습니다. 어느 곳을 가든 시골길은 정겹더군요. 풀내음과 한여름을 시원하게 울어대는 매미소리, 더위를 식히기 위해 혀를 내밀며 그늘 밑에 늘어져 있는 개의 모습도 포근함을 안겨줍니다.

그런 시골길을 따라 걸음을 옮긴 지 20여분, 그동안 이곳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곳에 고구려인들이 정착하게 된 시기는 일본 나라(奈良)시대로써 도쿄 주변인 무사시노 벌판일대에 모여들기 시작하면서였다고 합니다. 당시 고구려 왕족인 "약광"이 일본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고구려 유민들, 혹은 망명자 1799명을 모아 이곳 황무지를 개척하며 정착을 시작했습니다.

▲ 곳곳에 고구려의 흔적이 남아있다. 흙으로 지은 집
ⓒ 안창규
이후 이곳을 고려군(高麗郡)이라고 불렸습니다. 고려군이 설치되고 42년이 지나 이곳 근처에 신라군(新羅郡)도 설치되었는데 서로 대립되었던 관계였지만 이곳에서는 서로의 경험을 주고 받으며 함께 이곳을 개척했다고 합니다.

이곳에 정착한 고구려 인들은 농업기술을 전수하였고 신라인들은 건축과 미술에 공헌을 하였죠. 선진문물을 전해 받으려는 일본정부는 그들을 환대하였다고 합니다.

황무지였던 이곳이 메이지 시대에 일본쌀의 반을 공급할 정도로 성장했던 건 이곳에 정착했던 고구려인들에 힘이었습니다. 새삼 이곳의 이야기를 들으며 시골길 곳곳에 남아있는 고구려의 흔적을 느낍니다.

▲ 고려신사앞 전경
ⓒ 안창규
드디어 목적지인 고려 신사 앞. 신사 앞에 세워둔 도리어(하늘의 전령인 새가 앉아서 쉬는 곳, 일본에서는 새를 "토리"라고 부른다)를 지나 이름들이 나열된 곳(참배자 제명사 방명록)에서 잠시 멈추어 섰습니다.

▲ 참배자 제명사 방명앞에서 설명을 하고 있는 목원대 김정동 교수
ⓒ 안창규
방명록 앞에서 목원대 김정동 교수님이 설명을 하셨습니다. 이곳에 고구려인들이 정착하게 된 계기 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1896년부터 일제는 한국과 관련된 지명이 불쾌하다며 고려군이었던 이곳을 이루마군(入間郡)으로 바꾸었습니다. 1898년에는 고려신사인 이곳을 다카구 신사로 이름을 바꾸고, 약광을 모셨던 이곳에 약광대신 일본의 천왕신인 응신천황(應神天皇)과 신공황후(神功皇后)을 편입시켜 약광의 제사를 금지시킵니다.

▲ 나란히 걸려 있는 최린과 최초 여류 비행사 박경원의 방명록
ⓒ 안창규
그 후 조선 침략을 본격화할 시기에는 이곳을 내선융화의 심벌로 전략시키죠. 조선으로 부임한 통감부나 총독부 고위 간부들이 조선으로 건너가기 전, 이곳에 들러 참배를 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조선침략의 상징으로, 조선에 들어가 잘 복무할 수 있도록 복을 빌었습니다.

근대사에서 처음으로 이곳에 흔적을 남겼던 조선인은 이완용의 오른팔 노릇을 한 조증응이란 사람입니다. 일제하에서 법무대신, 농상공부 대신까지 지내고 일본 귀족인 자작칭호까지 받았던 인물이죠. 그가 이곳에 와서 복을 기원하고 고려교라는 현판을 남겼다고 하는데 지금은 버림받아 걸릴 곳도 찾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 관동대지진 당시 학살의 원흉인 미즈노의 이름도 볼 수 있다.
ⓒ 안창규
참배자 제명사 방명록 첫줄에 보면 눈에 띄는 이름들이 있는데 조선 최초 여류비행사인 박경원과 독립운동가 33인 중 한명인 최린도 이름이 보입니다.

이곳에서 최린에 이름을 발견하니 조금은 씁쓸한 마음이 들더군요. 민족 대표 33인중 한 명을 내선융화의 상징인 이곳에서 만나게 되니 청산되지 않는 역사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무거워 집니다.

최린이 반민특위에 기소되어 재판을 받을 당시, 최후 변론으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민족 대표에 한사람으로 잠시 민족 독립에 몸담았던 내가 이곳에 와서 반민족 행위를 재판을 받는 그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다. 광화문 네거리에 사지를 소에 묻고 형을 집행해 달라. 그래서 민족에 본보기로 보여야 한다."

기미 독립선언서의 최린, 그리고 이곳 방명록에 최린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밖에 눈에 익은 이름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박정희 정권에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이후락씨를 비롯한 한일 회담을 성사시킨 주역들, 현 김종필 의원 이름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일본과 관련된 고위관료들에 이름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곳은 오늘날 일본과의 외교적 관계에 있어서 상징적인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새차에 무사안전을 기원하고 있는 일본인들
ⓒ 안창규
끝으로 신사 안에 있는 고려집과 약광의 묘를 찾았습니다. 고려집은 그 흔적을 남겨 놓은 곳이었고 약광의 묘는 이곳에 정착했던 비운의 고구려 왕자 약광을 모셔놓은 곳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복을 기원한다고 하더군요. 곳곳에서 그 복을 기원했던 흔적들이 남아있습니다. 약광의 묘에는 고구려 탑이 있는데 약광의 묘 주위에는 합격과 번창을 기원하는 메시지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물론 한글로 된 것들도 쉽게 볼 수가 있죠.

▲ 약광의 묘
ⓒ 안창규
1000년 전 이곳을 찾아 왔던 사람들. 한반도 선진 문물을 전수했던 근원지였던 이곳이 오늘날 복잡한 현대사의 일면을 지니고 있다는 것에 1000년 전 우리 흔적을 찾았다고 좋아할 수만은 없음을 느낍니다.

흔적은 남아있고 그 흔적들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들을 말하고 있는 듯 합니다. 먼 선조들이 이곳에 정착하여 이들과의 바람직한 관계를 위해 많은 노력을 했을 겁니다. 아직도 그 영향이 남아 있는 모습을 보며 그 노력이 어떤 것이었는지 새삼 확인을 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복잡한 근대사의 한 단면이 되었지만 앞으로 고려신사의 진정한 의미를 찾는 건 우리의 몫이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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