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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분야나 마찬가지겠지만, 문화분야 취재 역시 사람 만나는 게 일의 절반이다. 아직은 순수와 낭만을 가슴에 품고 사는 예술가들이고 보니 취재가 술자리로 이어지는 일이 다반사. 이 기사는 그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대작(對酌)한 기록인 동시에 한국 문화계에 대한 기자의 인상기다....편집자 주

▲ 솔잎 막걸리 한잔에 파안대소하는 강태열 시인.
ⓒ 홍성식
그를 처음 본 것이 언제인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2000년 여름 혹은, 가을쯤이었을 게다.

스스로의 주량을 무시한 채 터무니없이 많은 술을 마시고 어처구니없는 주사(酒邪)를 반복하는 학생 시절의 버릇이 재발한 시기. 낮부터 새벽까지 취해있는 날이 태반이었다. 기어코 세상으로부터 무엇인가를 구하려했으나 그 희구가 아무 소용 없다는 것을 깨달은 자의 절망. 술 마시는 것 외에는 할 게 없었다.

'마시고 취하고 깨면 다시 마시고'를 반복하던 취생몽사(醉生夢死)의 나날들. 그 어디쯤에선가 무공(無空) 강태열(71) 시인을 꿈인 듯 만났다. 성성한 백발에 빠져있는 앞니, 여윈 팔다리와 그 위를 덮은 검버섯. 하지만, 그의 눈빛만은 감히 똑바로 쳐다보기가 송구할 만큼 형형했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앞 허름한 목로 아현호프. '육체의 쇠락이 정신까지 무너뜨릴 수는 없구나'라는 깨달음이 새삼스러웠다.

그날 강태열은 연약해진 21세기 한국문학에 관해 분통을 터뜨리며 쉬지 않고 안주 없는 소주와 생맥주를 들이켰다. 시력(詩歷)이 50년을 바라보는, 광주고등학교 재학 시절 영도(零度)라는 문학동인을 결성해 쟁쟁한 기성작가들의 기를 죽인 영민한 소년문사였던 강태열을 기자는 이렇게 만났다.

이후 후배 작가들에게 전해들은 그에 관한 이야기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대학시절 등록금을 털어 발행한 동인지에 이어령(전 문화부 장관)과 박이문 등이 작품게재를 의뢰했으나 '우리와 지향점이 맞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했고, 적지 않은 유산으로 출판업을 시작해 후배들의 시집은 숱하게 내줬지만 정작 자신의 시집은 "아직 때가 아니다"라는 이유로 한 권도 내지 않았으며, 군사정권 시절 모모한 사건에 연루된 것을 통탄하며 자그마치 10년 동안을 절필했다는 사연들.

손자뻘의 기자를 격의 없이 대하는 강태열의 너른 마음씀씀이 탓에 쓴 소주 한잔을 올리며 그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도 적지 않았다. '목마와 숙녀'를 쓴 박인환이 얼마나 근사한 댄디였으며, 시인 김수영의 취중 언행이 얼마만치 과격(?)했는지, 담대하기로 이름이 높은 청마 유치환의 배포가 어떠했는지를 듣는 술자리들은 행복했다.

잊을만하면 드문드문 이어지던 강태열과의 술자리. 그러던 어느 날 술에 익은 불콰한 얼굴로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술길을 따라가다 보면 우주가 보인다"고. "그 우주와 온전히 만나는 날 나는 사라져도 좋지 않겠냐"고.

아, 강태열에게 술이란 마시면 정신이 몽롱해지는 마취의 액체가 아니라, 우주와 교신하기 위한 매개체였구나. 그의 시 '어느 날의 박용래 시인은'이 떠오른 것은 그때였다.

저 친구 눈물 흘리네
나무 끝에 집 짓고 사는
까치를 보고
눈물 흘리네

왜 우는가

저 까치집 뒤 하늘이
너무 푸르구먼
우주가 너무 푸르구먼.


그날 강태열은 기자에게 자신과 세계를 파괴하는 술마심이 아닌, 우주와 그 속에 포함된 사람들을 포옹하는 주도(酒道)를 가르쳤다.

그러나 그 경지에 이르려면 아직도 한참 멀었음을 기자는 스스로 안다. 끝나지 않은 장마. 주룩주룩 비 내리는 오후면 취기 속에서 우주와 교신하는 시인 강태열과의 소주 한잔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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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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