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항상 사후적인 해석이지만 이름은 중요하다. 굳이 김춘수까지 들먹이지 않아도 그 이름은 누군가를 규정하기 마련인 것이다.

'부활'은 85년에 데뷔한 이래 해산까지 갔다가 다시 부활한 것이 한 두번이 아니다. 그것은 리더 김태원이 고집스럽게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해가며 연주활동을 계속 해왔기 때문이다. 근래에는 다시 이승철이 합류하여 8집 '새, 벽'(2002)을 내놓았다.

초기 부활 그대로는 아니었지만 상징적인 두 존재인 김태원과 이승철이 재결합한 것은 부활의 오랜 팬들에게는 진정한 부활로 여겨졌을 것이다. 하지만 며칠 전 부활의 새 보컬 공개 오디션 포스터를 보았으니 재결합은 오래 가지 못했나보다.

부활은 데뷔앨범 'Born Again'(1986)을 내자마자 '희야'를 히트시켰고 이들은 라이브 위주의 무명밴드에서 단숨에 인기 밴드로 부상할 수 있었다. 부활은 정통 록에 가까운 사운드를 구사하던 밴드였는데, 당시 김태원과 이지웅의 트윈 기타는 국내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연주가 아니었다.

이후로도 김태원은 자기 톤이 뚜렷한 몇 안되는 연주자중 하나로 남아있다. 게다가 여성적인 느낌의 이승철을 리드보컬로 두었지만 종종 김태원 자신이 메틀릭하고 거친 톤으로 노래를 하고 있어 이들의 음악적 지향점은 남성적인 헤비 사운드를 만드는 것에 있다는 것을 명확히 하고있다.

당시 재킷에는 'Rock Will Never Die'라는 문구를 비롯해 '라우드니스(Loudness)를 지옥으로 보내겠다', '김태원은 살아있는 지미 헨드릭스(JimiHendrix)다!' 등의 웃음을 유발하는 글귀들이 적혀있어 이들의 절절한 사명감(?)이 느껴진다.

두 번째 앨범 '회상'(1987)을 내면서 밴드는 김태원, 이승철을 제외하곤 모두 멤버가 바뀌었다. 기타리스트 이지웅은 이후 외인부대에서 활약하게 된다. 트윈 기타를 못 듣게 된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김태원의 곡으로 가득 메워진 이 앨범은 전작에 비해 더욱 감각적인 연주를 담고 있었다.

특히 '회상 II'나 '천국에서'같은 곡에서 김태원은 연주자뿐 아니라 작곡가로서도 수준급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서정적인 록발라드 '회상 III'(마지막 콘서트)의 리드보컬이 이승철이 아니었던 것은 이 앨범의 결정적인 실수라고 할 수 있는데, 더 좋을 수도 있었던 노래가 그 정도밖에 못된 것도 아쉽지만 이런 김태원의 행동은 이승철에게는 자존심 상하는 것이었을 게다. 당시 이승철은 여성팬들을 몰고 다니는, 개인적으로도 인기 있는 보컬이었으며, 그는 당연히 솔로활동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승철의 탈퇴로 한국록사에 남을 명반 두장을 만들어낸 부활은 일단 해체된다. 이승철은 부활시절의 곡들을 부른 라이브로 솔로 데뷔작을 만들었고 김태원은 게임이라는 그룹을 결성했다. 하지만 게임은 주목받지 못했고 김태원은 휴지기를 갖는다.

▲ 부활의 3집 '기억상실'(1993)
ⓒ kpopdb.com
그리고 김태원은 부활의 이름으로 새 앨범 '기억상실'(1993)을 녹음한다. 2집 이후 6년 만이다. 김태원은 '작은하늘'의 보컬이던 김재기와 함께 작업을 시작했으며, 2집의 멤버들이었던 정준교, 김성태가 합류했다. 건반은 '봄여름가을겨울'과 주목할만한 연주앨범을 녹음했던 최태완이 도와주었다. 명 엔지니어 마크 코브린이 녹음하여 사운드의 질감도 상당히 뛰어나다.

A면은 히트곡 '소나기'로 시작한다.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를 소재로 삼아 만들어진 이 곡은 그 애절함으로 무척 인기를 얻었는데, 김태원의 공간감있는 연주와 김재기의 호소력있는 보컬은 이 곡을 명곡으로 만들기 충분했다. 다음곡 '흑백영화'도 이 앨범에 담길만한 블루지한 곡인데 연주들 사이사이에 담긴 빈 공간들은 이 곡을 애상적으로 만들고 있다.

타이틀곡 '기억상실'은 단절된 기억들을 단편적으로 떠올리는 듯한 가사의 조각들이 김태원의 블루지한 기타 연주 위에 흐르는 곡으로 기타리스트 김태원의 연주를 만끽할 수 있는 곡이다. 1분 정도 밖에 안되는 마지막 곡 01-08-01의 어쿠스틱 기타연주는 A면을 깔끔하게 마무리짓고 있다.

B면의 첫 곡인 '사랑할수록'은 '소나기'만큼이나 인기를 얻은 곡이다. 김재기의 보컬은 고음역으로 치솟으며 지난 사랑을 노래하는데, 그의 담백한 목소리는 담담하게 슬픈 이 곡에 무척 잘 어울린다. 연주곡인 '별'은 역시 드라마틱한 감정의 반전을 가지고 있는 블루지한 곡이다. 이렇게 조용한 곡에서도 연주에 따라 얼마든지 격정적인 전환을 묘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김태원은 직접 들려주고 있다.

'흐린 비가 내리며는'은 마치 풍경화처럼 들린다. 허스키한 김태원의 목소리가 돋보이는 곡으로 이 앨범의 숨겨진 명곡이라 할 수 있겠다. 우리말의 예쁜 어감을 살린 제목의 '그리운 그리움 그림'은 앞 곡을 이어받아 비슷하게 차분한 분위기로 앨범을 마무리짓는 연주곡이다.

이 앨범을 다 들어보면 김태원은 데이빗 길모어(DavidGilmour)나 게리 무어(GaryMoore)처럼 자신의 색깔이 분명한 기타리스트가 되고자 했던 것 같다. 김재기의 보컬도 중요한 요소이지만 어쩌면 김재기의 존재는 의도적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보컬이 빠진 음반이 성공하기는 매우 어렵다는 것을 김태원은 알고있었을 것이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 상업적 성공이 필요하다는 것은 밴드 '게임'의 실패에서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김태원은 기타리스트로서 초기에 비해 분명히 성숙했고, 그런 자기만의 톤을 담고 싶어했으며 그 결과물이 바로 이 앨범이다. 연주곡/보컬곡, 히트곡/비히트곡에는 관계없이 이 앨범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기타리스트로서의 자의식인 것이다.

또하나 이 앨범에서 주목할 것은 소리의 공간감이다. 헤비 사운드를 추구하던 초기 부활의 곡들에서 소리의 공간감을 느끼긴 어렵다. 하지만 이 앨범에서는 그런 것에 신경을 많이 썼는데 그 덕분에 그는 마치 캐멀(Camel)이 Stationary Traveller 앨범에서 만들었던 것 같은 매끈한 사운드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사실 여백이라는 것은 한국 전통 예술의 가장 기본적인 것이 아니었던가. 덕분에 색깔이 분명한 앨범을 찾기가 쉽지않은 가요계에서 이 앨범은 빛나는 존재가 될 수 있었다.

김재기는 이 앨범을 녹음한 직후 교통사고가 나서 죽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는데 그는 소나기의 소녀처럼 금방 가버린 것이다. 이후 공연은 김재기의 동생인 김재희가 보컬을 맡아주었으며 부활은 몇몇 공연을 하고 나서 그 멤버들 그대로 다음 앨범을 녹음하게 되었으니 그것이 '잡념에 관하여'(1995)였다. 하지만 부활의 미래는 그다지 순탄치 않았는데 2003년 현재까지 부활에서 두 장 이상 앨범을 녹음한 보컬이 이승철밖에 없다는 사실이 그 상황을 잘 말해준다.

이 앨범은 부활의 역사 중에서도 매우 독특한 위치를 점하는 앨범이다. 핑크 플로이드(PinkFloyd)의 명반들 속에서 블루지한 이색작인 Wish You Were Here(1975)가 대표작으로 당당히 꼽히는 것처럼 이 앨범도 부활의 앨범들 중 가장 독특한 앨범임에도 불구하고 명반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음악적 깊이를 가지고 있다. 기분이 나직하게 가라앉을 때 꺼내 들으면 좋을 것이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빈서재 출판사 편집자.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