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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어렸을 때 속독법을 배운 적이 있다.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고등학교 입시를 위해서였다. 거창하게 얘기한다면 지덕체의 인간형을 육성하기 위한 학원체육교육과는 동떨어진 한국의 엘리트 교육의 병폐라고도 할 수 있겠다.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육상을 했었기 때문에 공부할 시간도 없었고, 공부하고 싶지도 않았다.

▲ <비판적 지성인은 무엇으로 사는가>1판 1쇄의 책표지
ⓒ 박철현
그런데 중2 때 불의의 사고로 트랙을 떠나고 보니까 갑자기 살길이 막막해졌다. 14살의 어린 나이, 아직 마스터베이션이 뭔지도 모르는 나이에 장래를 걱정해야 된다니, 이런 말도 안되는 교육시스템이 어디 있나? 문득 "학원체육 교육은 바뀌어져야 한다. 엘리트 체육 교육을 지양하라!"고 외쳐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보니 남들보다 2년 정도 느린 교육과정을 따라 잡기 위해서는 속독법이 필수였다. 마산의 경남대 앞 오거리에 있던 속독법 학원에서 3개월 코스로 배운 <기적의 속독 비법>은 특히 암기과목에서 효과가 대단했다.

남들이 국사/지리/사회 같은 것을 문제집 보면서 총정리니 찍기 해법이니 할 때 나는 아예 책을 펴놓고 한 2시간만에 다 읽고 다시 읽고 다시 읽고 한 4번 정도 읽으니까, 내용이 저절로 머리 속에 입력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지겨웠지만, 영광된 내 미래를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그땐 든 습관때문에 그럴지도 모르겠는데 그 이후 나는 책을 읽을 때, 대강대강 읽는 습관이 생겨 버렸다. 아무리 세밀하게 읽고 한자 한자 공들여서 읽으려고 해도 눈이 그것을 안 따라 준다.

의식은 "자세하게 읽어!"라고 명령을 내리는데, 눈이 지가 알아서 좌측 문장 1행 첫머리부터 우측 5행 마지막 마침표까지 1초만에 가버린다. 그래서 간혹 가다 오독한다는 말도 나오고 그렇다. 일전에 서평을 썼던 민경진의 <테크노 폴리틱스>나 <공익마케팅> 같은 책들도 다 설렁설렁 화장실에서 볼일 보며 읽은 것들이다.

아! 물론 변비 같은 것은 아니다. 여러 번에 걸쳐 나누어서 읽었다는 얘기다. 우리집에는 화장실에 책장 비슷한 것이 설치되어 있어서 속이 안좋아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으면 심심할 때마다 읽은 부분 또 읽고 뭐 그런다.

그런데, 나는 인터뷰에 관련된 책만큼은 설렁설렁 구렁이 담 넘어가듯 읽지 않는다. 책을 대하는 태도라고 보면 될 거 같은데, 인터뷰가 아닌 책들은 보통 작가가 지금 글을 읽는 나와 대화하기 위해서 쓰는 글이기 때문에, 내가 일종의 서비스 사용자가 된다.

내가 화장실에서 읽든 요가자세로 읽든, 읽은 다음 버리든, 다른 사람 주든, 불태우든 상관할 바가 아닌 것이다. 간혹 가다가 어떤 서비스 공급자(작가)들은 사용자의 클레임과 사용자의 행위에 대해서 불만을 표시하기도 하는데, 이해 안되는 꼴통 짓이다. <식스시그마> 정신이 뭔지 한번 생각해보시길 바란다.

그러나, 나는 인터뷰에 관련된 책을 읽는 독자는 한없이 겸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이 때의 독자는 사용자라는 입장보다는 <관찰자>라는 입장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인터뷰어는 인터뷰 대상자와 대화했던 것을 그냥 책으로 정리해서 내놓은 것에 불과하다. 독자에게 읽어주세요 라는 서비스 공급자의 마인드라기 보다는 <제가 지금 누구하고 이야기를 했는데요. 그 사람과 저와의 대화를 들려주고 싶어요>라는 볼런티어의 마인드가 더 세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안느끼는 사람도 많겠지만, 아무튼 나는 인터뷰에 관련된 책은 그래서 좀더 자세히 세밀하게 몇 번을 두고 읽어보려고 노력한다.

참고로, 내가 세상에 나온 인터뷰에 관한 걸작 시리즈라고 생각하는 것은 <히치콕과의 대화>라는 책이다. 프랑스 영화계의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던 누벨바그(새로운 물결)의 대표주자이자, 누벨바그의 아버지 앙드레 바쟁이 가장 아끼던 제자였던, 프랑소와 트뤼포가 서스펜스의 대가 알프레드 히치콕과 나눈 인터뷰를 정리한 책이다.

물론 브레히트 대화집이니 뭐니 하는 책들도 간혹 가다 본 적은 있지만, 사실은 어려워서 도중에 <관찰자>의 역할을 포기했었다. 그리고 요즘 관심을 가지고 보는 인터뷰 시리즈는 역시 일본 영화잡지 컷(CUT)의 4만자 인터뷰 시리즈이다.

미야자끼 하야오는 그 4만자 인터뷰에서 자신이 왜 강하고 어린 소녀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는지, 그리고, 나는 것(혹은 하늘)에 왜 집착하는지 등등에 관해 잔잔하게 이야기한 바가 있다. 웃음이라는 것에 비주류의 철학을 가졌으면서도, 주류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일본 개그맨 콤비인(일본말로 오와라이 게이닌) <다운타운>의 마츠모토 히토시가 그가 생각하는 <웃음>이라는 것에 대한 철학을 읊은 것도 바로 이 4만자 인터뷰에서였다.

내가 생각하는 인터뷰의 힘은 위에서 언급한 관찰에서 파생되는 엿보기, 그리고, <통쾌함>이다. 대상을 직접적으로 경험해보지 않은 독자들은 문화비평가나 평론가들이 이야기하는 것들만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토대로 다른 이들과 논쟁하고 그런다.

그러면 그 다른 이들은 또다시 다른 문화비평가나 평론가들의 글들을 인용하면서 열심히 싸운다. 아! 물론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서 그 논쟁의 대상이 되는 <인물>은 간혹 가다 그 논쟁과 관계없을 수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의 경우 만신창이가 된다. 오죽하면 그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다음, 본인이 실제로 나타나서 이런 저런 해명을 해도, 거짓말쟁이니 뭐니 그런 걸로 오해를 사겠는가? 조금 밑에 나오겠지만, 문부식씨의 경우나 김규항씨의 경우가 그렇다.

그렇다. 인터뷰에는 그런 객관적인, 그러나 지극히 주관적인 비평가들의 글에서 느껴지는 인물의 모습과는 달리, 실제의 그 인물이 직접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을 때의 아우라를 맛볼 수 있다. 군데군데 등장하는 일상적인 언어들과 (웃음)이라는 괄호표시 등등이 인간적인 면모라면, 만신창이가 되어 가는 원인을 제공한 비평가들에게 날리는 일갈은 통쾌함을 선사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인터뷰를 즐겨 읽는다. 그리고 이번에는 지승호가 쓴 <비판적 지성인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읽어보았다. 아참, 화장실에서 읽어서 미안하다.

<2>

세상에서 제일 고단한 직업군에는, 글쟁이도 들어간다. 홍상수 감독의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나 <소설가 구보씨의 하루> 등등을 보거나 읽으면 글쟁이의 그 처참한(?) 현실이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스타 글쟁이들은 제 맘대로 써도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고 그러지만, 그것도 다 운에 의해서 좌우되는 법이다.

출판사를 잘 만나고 홍보라인을 잘 타는 것들 이런 것들이 원래는 다 운이다. 예를 들어 전여옥이 쓴 <일본은 없다>같은 말도 안되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현실은 운 말고는 독해할 방법이 없다. 이어령 교수가 쓴 <축소지향의 일본인> 라는 명저가 <일본은 없다>보다 덜 팔린 이유를 설명해보라고 한다면 도저히 설명할 재간이 없다. 누가 좀 설명해 주셨으면 한다.

그 글쟁이 중에서도 제일 고단한 글쟁이는 단연 인터뷰어가 아닌가 한다. 보통의 작가들이나 글쟁이들은 상상의 나래를 펴든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주욱 쓰면 되는데, 이놈의 인터뷰어는 인물과 대화를 해야 되기 때문에 방대한 사전지식을 가져야만 한다.

예를 들어 진중권과 인터뷰를 하는데, 진중권이 쓴 책들과 기사들을 읽지 않는다면, 도무지 이야기를 풀어낼 수가 없는 것과 똑같은 원리다. 딴지일보 접속 안하는 인터뷰어가 김어준과 어떻게 인터뷰를 할 수 있으랴? 김규항을 인터뷰하려면 철지난 시네21을 뒤적거려야 하고 쾌도난마도 다 읽어야 하고, 뭐 그렇다. 문부식을 인터뷰하려면 미문화원 방화사건으로부터 조선일보 인터뷰에 이르기까지 그 방대하고도 변화된 삶의 궤적을 찾는 철학적인 여행마저 떠나야 할 판이다.

그런 작업들을 해내는 인터뷰어, 나는 그를 존경한다. 왜냐면 그는 나 대신에 그들과 인터뷰를 해서 나에게 관찰만 하면 되게끔, 그리고 나의 변태적인 속성중의 하나인 보야리즘(관음증)을 충족시켜주고, 마지막으로 그간 오해해왔던 위의 사람들에 대해 본인의 말을 직접 듣게 해줌으로써 통쾌함을 선사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 "지승호"라는 인간이다.

<3>

한국의 서평계에는 이상한 흐름이 있다. 그것을 바로, 본문중의 내용을 서평자들이 마음대로 짜깁기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흐름과 작자의 흐름이 일치한다는 보장도 없이 그렇게 자기 맘대로 짜깁기한다는 것을 나는 이해할 수 없다. 혹은 출판사가 써준 원고를 적당히 비비고 짜서 현학적인 몇몇 문장들로 분칠한다.

과연 서평을 쓰기 위함인가 아니면 자신의 유식함을 과시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작가와 출판사와의 커넥션에 자신도 들어가기 위한, 다음의 자신의 책을 위한 장사인가?

서평은 말 그대로, 읽고 난 다음의 느낌과 독자들과 대화하려고 하는 작가의 마음을 인정한 후에 독자들에게 이런 글들이 있다는 것을 겸손한 마음으로 추천하는 것이다. 작가가 아닌 서평자의 현학과 상찬을 독자들은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지승호의 이 책을 여러분들에게 추천한다. 최근 몇 년간 혹은 몇 개월간 인터넷상의 평론가들(?)에 의해 오독되어지고 오욕과 욕바가지를 덤터기로 받아먹은 몇몇 인물들이 본인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풀어놓고 있다.

김규항의 페미니즘 논쟁과 B급 좌파로서의 정체성, 문부식의 우경화를 두려워하시는 분들에게 문부식이 직접 풀어놓는 생각(특히 60페이지), 그리고 진중권과 김규항의 그 미묘한 차이(?)와 강준만과의 논쟁 후일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던 변정수의 페미니즘에 관한 이야기(이 부분은 김규항의 인터뷰와 비교해서 읽어본다면 더더욱 흥미가 있을 걸로 생각된다), 그리고 변희재 등.

인터뷰가 끝나면 부록이 아닌 부록이 있다. 그건 바로 인터뷰어의 숙명, 항상 객체일 수밖에 없는 지승호가 풀어내는 자신의 이야기가 있다. 자신이 <주체적>으로 본 여러 현대사회의 아이콘들과 이모티콘. 미시적으로 그러나 지극히 쉽게 풀어낸 거시적인 통찰력이 빛나는 그 부록은 단언컨대 30분이면 다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칭찬이다. 그만큼 쉽게 쓰여져 있다는 소리다.

<4>

이 책에는 월드컵에 대한 김규항씨의 생각이 조금 나온다. 이 땅의 조금 왼쪽 지식인들은 월드컵에서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의 망령을 본다고 한다. 나는 전혀 생각이 다르다.

잉글랜드에서 노동자 계급을 달래주기 위해 축구라는 스포츠를 만들었건 어쨌건, 지금의 축구는 민족의 경계를 넘어섰다. 작년 월드컵에서 광화문에 모인 붉은 악마들 중에서 민족과 국가주의라는 거창한 대의명분에 휩싸여서 모인 사람들도 분명히 있으리라 보지만, 나는 그것들보다는 한국 국가대표팀의 축구가 재미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사람들이 그렇게 미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재미에는 국가주의니 민족주의니 끼여들지 못한다. 재미라는 관점에서 박노자씨나 김규항씨가 월드컵을 다시 접근해 보았으면 한다. 어떻게 보면 재미라는 것은 가장 개인적이며 가장 B급 좌파적이지 않은가?

지승호씨가 월드컵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김규항씨의 의견에 동조하면서 계속적으로 월드컵과 월드컵의 붉은 악마들을 비판적으로 보는 질문들을 한 것은 조금 비판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만, 월드컵을 너무나 인상적으로 본 김어준의 인터뷰는 그 비판의 마음을 상쇄시켜 준다. 절묘한 밸런스다.

첫머리에 적힌 지승호의 첫문장이 와 닿는다. '나는 정식으로 글쓰기 공부를 해본 적이 없다'라는 문장이다. 나는 지승호씨가 초창기 당시 그가 마음대로 쓰고 싶어서 어쩔 수 없었던 그 시절의 '재미'와 감정의 분출을 계속 유지하시기를 기대한다.

객관과 합리라는 것에 길들여진 인터뷰어의 진리를 과감히 깨부수는 감성과 재미의 인터뷰어, 그리고 대상과의 관계를 적절히 버무려 내어서 독자들에게 통쾌함을 선사해주는 인터뷰어가 되길 진심으로 원한다. '재미'라는 것을 잊지 않으시길 부탁드린다.

<5>

최근 그의 인터뷰 모음집 2탄이 나왔다. <세상을 바꾼 아티스트>라는 제목의 책이다. 한국의 지인이 국제우편으로 부쳐 주셨다. 다시 둘의 대화를 들어보고자 한다. 인터뷰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나가고 있는 지승호의 건승을 빈다.

비판적 지성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 지승호의 누드토크

지승호 지음, 인물과사상사(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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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부터 도쿄거주. 소설 <화이트리스트-파국의 날>, 에세이 <이렇게 살아도 돼>, <어른은 어떻게 돼?>, <일본여친에게 프러포즈 받다>를 썼고, <일본제국은 왜 실패하였는가>를 번역했다. 최신작은 <쓴다는 것>. 현재 도쿄 테츠야공무점 대표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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