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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학교 인문계 고3 학생들의 경우, ‘작문’이라는 과목이 일주일에 두 시간 들어있다.

‘작문시간’, 평소에 여러 글을 접하고 싶었던 나는 작문이라는 단어에 귀가 솔깃했다. 그래서 학기 초 아무것도 모를 때 ‘작문’이라는 과목은 나에게 있어 매우 흥미롭게 다가왔다.

그렇지만, 작문교과의 실상은 내가 생각한 것과는 많이 달랐다.

아이러니 하게도 작문시간에 나는 ‘작문’에 대해서 아무것도 배울 수 없었다.

작문시간 맨 처음에 작문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작문시간에 공부하게 필요한 책이 있거든. 무슨무슨 출판사에서 나온 무슨무슨 문제지를 월요일 까지 꼭 사와라. 그리고 진도 나가면서 선생님이 프린트 나눠줄테니까 참고해서 공부하고 알겠지?”

나는 궁금해 졌다. 작문시간에 무슨 문제지를 푼단 말인가.

“선생님, 작문시간에 작문 배우는 것 아니에요?”

다소 당돌한 듯한 나의 질문에 선생님은 너털웃음을 지으시며

“글쎄다……. 원래는 작문을 배워야 하지. 아무래도 작문시간이니까 당연한거겠지?, 근데 너네는 고3아니냐. 하나라도 수능에 나오는 거 공부하는 게 좋지 안 그러냐? 게다가 작문은 언어에 관련된 것이니까, 언어영역 공부를 해야겠지.”

(뒤에 있던 친구) “그래도 나중에 우리 논술 같은 거 볼 때도 있으니까, 작문 배워둬야 하는 것 아녜요?”

“헐헐, 근데 너희들 중에도 논술 볼 얘들 있냐?, 내가 이렇게 보기엔 없는 것 같은데(농담)”

“글쎄다……. 다른 학교들의 경우도 그렇고 너희들 선배 형들도 그렇고 여태껏 작문시간에는 문제지 사가지고 언어영역 공부 해왔어. 그게 너희들한테 더 필요한 거고.

솔직히 이런 비교 같은 거 너무 당연하니까 굳이 말 한다는 게 우스운데, 재수생 형 누나들은 학원이나 독서실 가서 수능공부 만 해. 너희들도 알지? 너희들이 내신 공부 하느라고 시간 빼앗길 때 그 아이들은 언어영역 공부 하는데 너희들은 못하잖아. 간단한 예를 들어볼까? 지금 내가 사오라고 한 문제지도 그렇게 두껍지도 않아. 그리고 수록된 작품도 그렇게 안 많고. 근데 재수생들은 그것보다 세 배는 두꺼운 거 공부해. 그것도 완벽히. 걔네들은 시간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결론은 작문시간에 작문 배우는 것 보다, 언어영역 공부하는 게 너네 고3들한테는 이익이라니까.”

가벼운 농으로 끝난 대화. 갑자기 내가 실없이 느껴지는 것은 작문선생님의 말을 너무도 당연시 여기는 친구들의 눈치와, 나조차도 그런 분위기에서 당위적인 무기력함을 느끼게 됨에 따라서 일까?

사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작문선생님의 말씀이 지금의 내 처지에서 볼 때는 지극히 당연하고 정상적인 말일런 지도 모르겠다.

눈앞에 닥친 수능. 그 누가 강조하는 말인지 ‘인생을 결정 한다’는 수능을 앞에 두고 국어과 과목은 언어영역에 조금이라도 기여해야 한다는 일련의 암묵적 동의가 언제나 팽배하다는 것을 모르는바 아니다.

그렇게 나는 순응할 수 밖엔 없다. 우리는 더이상 작문시간에 작문을 배우지 않는다는 것을.

하지만, 내 사물함 안에서 빛도 보지 못하고 까끌까끌한 겉표지를 고대로 유지하고 있는 지극히 깨끗한 작문교과서와, 내 손때가 덕지덕지 묻어가는 작문시간 문제지의 대조적인 모습이 왜 이리도 내게 씁쓸한 뒷맛을 자아내게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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