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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영희 한양대 명예교수 등 각계인사 44명은 31일 오후 서울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정부의 이라크전 파병안에 반대하며 '반전평화비상국민회의 및 반전평화캠프를 제안한다'고 밝혔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31일 오후 2시 명동성당의 들머리에 일흔 넷의 노 교수와 마흔 다섯의 여배우가 나란히 앉았다. 이 시대의 살아있는 지성이라 불리는 리영희 한양대 명예교수와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배우 장미희씨다. 10년만에 얼굴을 마주한다는 두 사람은 반가움을 숨기지 않았지만 곧장 비장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국민 모두 10억 아랍인의 적" / 김이연심 PD

두 사람 뿐만이 아니다. 오종렬 전국민중연대 대표·이오경숙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박형규 목사·손호철 교수(민주화를위한교수협의회)·만화가 박재동·가수 정태춘·최병모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회장·함세웅 신부(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등 각계의 주요 인사들도 이날 한 자리에 모였다.

손호철 교수는 양복 바지 위에 "Stop the War"라고 적힌 흰색 면셔츠를 입었다. 이김현숙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공동대표는 목각으로 만든 '비둘기' 블로치를 달고 나왔다. '이라크 침공 반대'와 '한국군 파병 반대' 결의를 다지기 위해서다. 이렇게 뜻을 모은 사람이 44명이다.

이들은 이날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부도덕한 이라크전에 참전하려는 정부의 정책에 결코 찬성할 수 없다"며 "각계각층이 함께 하는 '반전평화비상국민회의(이하 국민회의)'를 제안한다"고 밝혔다. 첫 회의는 오는 3일 오전 10시 30분 서울 광화문 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열린다.

▲ 박형규 목사가 '반전평화비상국민회의' 를 소집하게 된 배경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이들은 기자회견문을 통해 "각계각층 시민이 한자리에 모여 전세계를 뒤덮고 있는 전쟁과 폭력의 검은 그림자를 걷어 내고 세계와 한반도의 평화를 불러오기 위한 지혜를 모아내자"고 호소했다.

국민회의의 구체적인 안건과 구체적인 진행 계획은 2일 다시 발표된다.

이날부터 명동성당 뜰에는 국민회의 준비모임이 마련한 '반전평화 캠프'가 들어섰다. 캠프의 불은 낮에도 밤에도 꺼지지 않는다. 이곳에선 31일부터 다음 달 12일까지 반전평화 작은 콘서트·모의 전범재판·평화의 시 낭송회·반전평화 그림엽서 만들기·평화의 비둘기 시민 서명운동 등 시민들과 함께 하는 문화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반전평화'에 관심있는 시민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민주화의 성지'로 여겨지던 명동성당을 '평화의 성지'라는 상징적 공간으로 활용하겠다는 취지다.

명동성당도 이례적으로 이들의 뜻을 받아들였다. 그간 명동성당은 신도들의 종교활동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밤샘 농성을 불허했던 터다. 성당 측의 허가를 받아 낸 최열 환경재단 상임이사는 "박원순 아름다운 재단 상임이사 등과 성당에 찾아가 반전평화 캠프의 취지를 설명하고 허가를 받았다"며 "미사에 방해되지 않는 범위의 활동을 하겠음을 서면으로 약속했다"고 설명했다.

"우리 모두 반전·평화를 위해 '행동'합시다"
오는 3일 '반전평화 국민회의'… 12일까지 명동성당서 '반전평화 캠프'


이날 리영희 선생은 다음과 같이 명쾌한 '반전·반파병 연설'을 해 좌중을 압도했다.

"한 국가의 민족이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따라 존경받을 기회는 그리 흔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긴 세월에 걸쳐 국민들이 쌓아온 덕성의 결과로 인정받고 평가되는 것입니다. 우리 국민이 미 제국주의의 이라크 침략에 마음을 합쳐서 싸워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같은 민족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존경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미 동맹관계의 기초인 한미 상호방위조약에도 우리가 중동까지 파병할 의무가 없다는 것이 명백하게 나와 있습니다.

미국의 간악한 전쟁에 한국민이 공범자이자 방조자가 돼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국민은 평화를 사랑하며 민주적·인류애적·인도적인 감각과 철학이 있어 뛰어나다는 것을 세계에 다시 한번 과시해야 합니다. 바로 이때입니다. 우리 정부와 노무현 대통령은 크게 착각하고 있습니다. 부시 행정부는 오로지 미국과 물질적 이득만을 위해 결정하는 집단입니다. 인류애는 그들이 고려하는 가치가 아닙니다.

이것을 과연 노무현 대통령은 인식하고 있습니까. 이것이 왜 남북관계에 도움이 됩니까. 도움이 된다면 왜 도움이 되는지, 그런 묵시적·명시적 또는 문서로 된 근거가 있는지 국민이 알 수 있도록 제시해야 합니다. 막연하게 파병하지 않으면 미국의 대북한 정책에 대한 발언권이 없어질 것이라는 추상적인 논리로 파병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아니면 전쟁없이는 살 수 없는 군사자본, 석유자본, 오로지 힘의 오만에 가득 찬 부시 등 소수집단이 아닌 온 인류 공통의 염원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리영희 한양대 명예교수가 미술가 임옥상씨의 부축을 받으며 명동성당을 나서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리 선생의 마지막 말은 "우리 그렇게 행동합시다"였다. 최근 선생이 다 회복하지 못한 몸에도 불구, '반전현장'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선생이 먼저 몸소 '행동'하고 있는 셈이다.

리 선생의 말이 끝나자 참석한 인사들은 "몇 시간에 걸쳐 설명해야할 내용을 단 5분에 다 말씀해주셨다"며 감탄했다.

이 자리에 모인 각계 대표들도 모두 "이라크 침공에 반대하며 이 부도덕한 전쟁에 우리가 동참할 필요가 없다"고 입을 모았다.

박형규 목사는 "지금 이라크라는 석유를 가진 조그만 나라를 미국이라는 세계 최강국이 온갖 첨단무기를 동원해 불법으로 침공하고 있다"며 "비록 정부는 파병방침을 정했지만 우리는 범국민적으로 반전평화국민회의를 소집해 반전운동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함세웅 신부도 "전쟁은 하느님의 뜻에 반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일"이라며 "인간의 이름으로 전쟁에 반대한다"고 강조했다.

김정헌 문화연대 공동대표는 "나는 원래 화가"라며 "아뜨리에에서 그림을 그려야할 사람이 여기에 나온 이유는 다 부시 대통령이 벌인 전쟁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김 대표는 "이 문화·예술인의 빼앗긴 봄과 예술을 찾아 와야겠다"고 밝혔다.

오종렬 전국민중연대 공동대표도 "대한민국 국민이 이 전쟁의 공범자가 될 수 없다"며 "가장 낮은 자리에서 반전평화의 대열에 함께 하겠다"고 소리를 높였다.

손호철 교수는 "'반전평화'라는 주제만으로는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었을 것"이라며 "'파병'에서 의견이 갈려 수가 더 적어졌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반전'이라는 주제로 내로라하는 각계각층 인사가 한 자리에 모인 건 이번이 처음이다.

손 교수는 "(국민회의가) 단기적으로는 이라크 파병을 막는 목적이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평화운동으로 연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손 교수는 현재의 반전여론을 '시민의식이 고양된 결과'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김현숙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도 "요즘만큼 시민단체들끼리 공감대가 빨리 형성되는 때도 드물었다"며 "이라크 전쟁의 부당성에 대한 공감대가 사람들을 이렇게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국민회의는 향후 국내 평화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한편 국외 평화단체와도 연계를 맺는 역할을 하게 된다.

▲ 명동성당 뜰에 마련된 반전평화캠프 앞에서 참가자들이 '전쟁중단 파병반대'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파병찬성의원 낙선운동은 정책선거 준비단계"
시민사회단체, 정부 측 '부적절' 주장 반박

반전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시민사회단체들은 "국민의 69.2%가 파병찬성 의원 대상 낙선운동을 반대한다"는 최근 보도(<한겨레> 3월 31일자)와 관련 "시민들의 뜻으로 존중해야 하지만 파병을 근거로 벌이는 낙선운동은 합법적 활동"이라고 밝혔다. 또한 파병찬반을 둘러싼 '국론분열론'에 대해 "한 가지로 통합해야 한다는 것은 획일주의적 사고"라는 입장을 보였다.

이태호 참여연대 정책실장은 "여론조사는 시민의 뜻으로 받아들여야겠지만 낙선운동이 불법으로 알려진 것은 문제"라며 "파병문제는 이후 의정활동 평가의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다. 소신껏 의사를 표명하고 그에 대해 책임지는 것이 국회의원의 자세"라고 주장했다.

이 실장은 보수우익단체의 '파병반대 의원 대상 낙선운동'과 관련, "어떤 단체든 의정평가활동을 평가하고 입장을 밝힐 수 있다"며 "그러나 이들 단체는 지금까지 낙선운동을 불법활동, 집단적 위협행위로 매도해왔다"라고 덧붙였다.

김제남 녹색연합 사무처장은 "파병에 대한 찬반이 반반인 상황에서 국민들이 낙선운동에 공감하기는 쉽지 않다"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김 사무처장은 "파병찬반을 두고 국민여론과 시민사회단체가 분열한다"는 주장에 대해 "파병해야 한다는 사람들도 이 전쟁이 불법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며 "한 의견으로 통일해야 한다는 논리는 획일주의적 줄세우기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손호철(서강대·정치학, 민주화를위한교수협의회) 교수는 현재의 낙선운동 움직임은 '진정한 정책 낙선운동'으로 가는 과정이라는 평가를 했다.

손 교수는 "일부에서 '비리' 여부도 아닌데 낙선운동 운운은 너무한 것 아니냐는 말들을 하는데 '비리'가 있는 사람은 애초 (국회의원이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니 낙선운동의 대상조차 될 수 없다"며 "낙선운동은 '비리 열전'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이어 그는 "진정한 낙선운동은 정책 비교에서 나온다"며 "지금의 낙선운동 움직임이야 말로 정책 선거, 정책 정당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준비 단계로서 의미가 있다"라고 평가했다. / 권박효원·김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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