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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인 기원전 400년경 위나라 잦은 전쟁으로 나라가 어려워지자 혜왕은 당대 왕도 정치론의 유세객이었던 맹자를 초청해 부국강병의 비책을 물었다. 맹자는 전쟁으로 부국강병을 꾀하려는 혜왕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고자 이른바 오십 걸음을 도망친 병사가 백 걸음 도망친 병사에게 '비겁한 놈'이라며 비웃었다면 어떻게 생각하겠느냐고 묻는다. 혜왕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오십 걸음이건 백 걸음이건 다 비겁한 것이라 답한다. 맹자는 이에 인의가 아닌 이웃나라들과 똑같이 전쟁을 통한 부국강병을 꾀한다면 어리석은 짓이라는 통렬한 가르침을 준다.

두 명의 장씨 총리서리 인준거부 파동을 보면서 우리 국민은 두 병사의 도망침과 같은 도덕성의 흠결을 보았다. 이들 양 장씨가 국정운영을 위한 어떠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인준거부는 정당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누가 오십보고 누가 백보인지는 얘기할 가치가 없다. 그리고 두 장씨가 서로 물고 뜯은 것이 아니라 인사청문회를 도입한 국회의원들이 그들을 훌륭(?)하게 검증해 냈다. 그런데 정말이지 이 나라의 주류라는 자들 치고 부동산 투기의혹, 자녀 국적 문제, 병역문제 등과 인연이 없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생각해 보면 참담할 뿐이다.

그러나 나는 반년도 남지 않은 임기의 총리 후보자에게 들이밀어지는 비수가 결국 그들 우리 사회의 지도층이라는 자들에겐 부메랑이 될 수밖에 없음에, 그것도 12월 19일 대선에서 적나라한 검증이 국민들의 손으로 이뤄낼 수 있다는 상상을 할 때 비로소 우리 사회의 작은 희망을 발견한다.

우리의 기억으로는 한나라당 서청원 대표는 97년 대선 때 이회창 후보의 아들들의 병역문제가 터지고 지지율이 급강하 할 무렵 후보직을 사퇴해야 한다고 성토했던 사람이다. 거대 야당의 대표가 되었다고 해서 그리고 의회의 과반을 넘긴 다수파가 되었다고 해서 병역의혹문제가 국민의 대다수가 비리가 있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는 '사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제왕적 대통령을 모시는 일개의 액세서리 총리에게 가했던 매서운 칼끝이 왜 국민들이 그토록 의심하는 자당의 후보 아들들의 병역문제 앞에서는 무뎌지다 못해 '방탄복으로 변신'하는가? 정치가 무슨 개그콘서트란 말인가.

또 아무리 '사실'이라 할 지라도 전과자의 입을 통해 밝혀지면 원인무효라는 법률이라도 있어서 그런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면 나라를 위해서 국민들의 알권리를 방해 말라. 그것이 나라를 위하는 길이요, 오십보가 백보를 욕하는 비상식을 극복하고 오만한 다수파라는 인식을 조금이라도 씻어내는 일일 것이다.

말 많고 탈 많은 병역문제는 검찰에 맡기자. 검찰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면 야당이 좋아하는 특검제를 도입해서라도 객관적으로 철저히 검증해야 한다. 이회창 후보와 그들 가족들의 문제에 왜 공당의 대표와 헌법기관인 국회의원들을 동원하는가. 그러니 보도지침 따위를 만들고 얼마 못 가서 꼬리를 내리고 사죄하는 패착만 두는 것이다.

우리 국민은 이제 DJ를 총기 있고 능력 있는 대통령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두 아들을 감옥에 둔 80 고령의 노부부의 얼굴에서 그늘이 사라지려면 시간이 흘러야 가능할 것이다. DJ를 볼 때마다 동물의 왕국의 늙은 사자가 떠오른다. 노쇠한 사자는 더 이상 밀림의 왕이 아니다. 하이에나에게까지 물어뜯기는 수모를 당하는 사자를 볼 때 DJ가 연상되는 것은 너무 불경한 일인가.

이제 DJ는 민주당을 탈당한 대통령답게 거국적이고 중립적인 내각을 여야 합의로 구성해야 한다. 특히 내각의 수장인 총리는 결국 공명정대하게 대선을 치를 관리형의 총리면 될 뿐이 아닌가. 미안한 얘기지만 DJ가 빠져줘야 한다. 병풍이든 북풍이든 기대하지 말고 순리에 맡겨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오기와 분노만을 가슴에 품은 채 자신이 이뤄낸 역사적 업적마저 다 상실할 뿐이다. DJ여 부디 혜왕의 어리석음을 되풀이 하지 말라.

우리는 두 총리서리의 인준거부로 인해 사회지도층에게 도덕성과 청렴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우치게 되었다. 양 장씨들에게는 개인적으로는 안된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주류라는 사람들의 일그러진 모습이 대선후보들을 적나라하게 검증하는 잣대로선 훌륭한 교훈이 될 것이다. 이제 그 훌륭한 반면교사적 교훈을 현실화시키는 일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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