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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가 84년 군 복무 중 사망한 허일병 일병 사건과 관련, 8월 28일 "당시 사고 현장에 있었던 부대원 대부분이 이(타살 후 사건은폐조작)를 정면 부인"했다고 보도한 데 이어 29일자 초판에서는 "의문사위원회는 (결정적인 증언을 한)2명의 신원과 구체적인 진술 내용을 밝히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의문사위, "참고인 말바뀐 <조선> 인터뷰"

▲ 8월 20일 조사중간발표 기자회견에서 현장 지도와 고 허원근씨의 사망 모습을 담은 사진 등 브리핑 자료.
ⓒ 오마이뉴스 권박효원
<조선일보>는 28일 기사(허일병 부대원들 "조직적 은폐조작은 없었다")에서 ▲술자리에서 싸움이 없었다 ▲총기오발사고가 없었다 ▲사건이 은폐·조작되지 않았다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한상범, 이하 의문사위원회)의 주장을 정면 반박했다.

이를 위해 <조선일보>는 신원이 확인되는 부대원 13명 중 연락 가능한 9명을 인터뷰했다. 이 중엔 총을 쏜 당사자로 지목된 노모 중사가 포함되었는데 보도에 따르면 그는 "술자리가 다음날(8월 2일) 새벽 2시 30분쯤 기분좋게 끝났다"고 말했다. 또한 행정반에 있었다는 신모 상병은 "사고가 있었다면 20평 남짓한 막사 안에서 총소리를 못 들었을 리가 없다"며 "오전 9시 전후 집합 때 허 일병은 살아 있었다"고 말했다.

<조선일보>의 보도가 나간 직후 의문사위원회는 브리핑 자료를 내고 "허원근 일병의 타살 의혹을 뒷받침해주는 근거를 가지고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위원회는 "조선일보에 인터뷰한 모든 사람들을 조사했으며 우리에게 진술한 사람들이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말을 바꿨다"고 강조했다.

특히 의문사위원회는 노모 중사의 진술와 관련 "그 동안 위원회 조사에서 비교적 일관된 진술을 해왔다"고 밝혔다. 위원회에 따르면 노모 중사는 "소총으로 설칠 때 ○○○이 진술인을 말린 것 같다" "아마도 총에 장탄을 하여 위협할 때 뒤에서 껴안은 것 같은데 그때 내가 오발을 하였는지 어땠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등의 진술을 2~3회 반복했다.

의문사위원회는 "중간발표는 관련자들의 추가 진술을 얻어내는 데 목적이 있었는데 언론 취재가 참고인들을 움츠러들게 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참고인들이 위원회에 신분노출을 항의하기도 했다"며 "위원회는 특정 언론사에 참고인의 신원을 제공한 바 없다"고 강조했다.

"조사 진행 중이라도 핵심사안 밝혀라"

▲ 20일 중간발표 기자회견장에서 박래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3과장이 모형 총을 들고 사고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박효원
의문사위원회는 이날 브리핑 자료를 통해 "조사가 현재도 진행 중이므로 보도에 신중을 기해줄 것을 다시 한번 언론에 요청드린다"고 당부했지만 <조선일보>는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오히려 29일자 초판 사회면에는 관련 기사를 전날의 2배인 4꼭지로 늘렸다.

위원회는 "다음달 10일 최종 조사결과 발표에서 모든 것을 밝히겠다"고 약속했지만 <조선일보>는 사회면 머리기사(의문사위 "허일병 타살 은폐조작 증거있다" 구체적 내용은 공개 안 해)를 통해 "위원회는 대대장의 은폐조작 지시 여부 등 핵심 사안에 대해서는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며 진행 중 조사 내용의 공개를 요구하는 조급증을 보였다.

또한 <조선일보>는 이날 기사에서 당시 헌병대 조사와 부검 결과 등을 인용해 ▲사고 관련자 11명의 알리바이가 모두 성립됐다 ▲3발을 모두 다른 부위에 쏜 허일병의 (자살) 사격은 가능하며 타살일 경우 총탄 각도가 비슷하다 ▲허일병은 처음 1, 2차 총격에서는 치명상을 입지 않았으며 세 번째로 머리에 총탄을 맞은 뒤 사망했다며 사건에 대한 의혹을 추가 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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