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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각 일간지는 18년 전에 발생한 허원근 일병 타살은폐사건을 비중 있게 보도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발표에 따르면 1984년 4월 2일 심야에 강원도 화천 전방지대의 육군 7사단에서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던 허원근 일병이 사실은 간부들이 내무반에서 회식 중에 다툼이 일어 발사한 총을 맞고 숨졌다는 것이다.

더구나 해당 간부들은 자신들이 초소를 이탈해서 음주한 사실을 감추기 위해 허 일병이 일과 시간 중인 오전에 자살한 것으로 꾸미면서 허 일병 사체에 총 2발을 더 쏘았고, 상급부대는 이 같은 은폐조작을 공모하거나 최소한 묵인했다는 것이다.

이회창씨 두 아들의 병역면제 의혹으로 온 나라사람들의 마음이 편치 않은 이때 전해진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거기다가 허 일병에게 사격을 가한 이유가 그가 끓여온 라면이 맛이 없기 때문이라는 이야기에는 숨이 탁 막혀 버린다.

과거 치안본부 대공분실의 밀실에서 박종철군이 고문살해당했을 때 치안본부장 강민창은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그러나 이런 어설픈 이야기로 박종철이 고문살해당했다는 사실이 덮어질 수는 없었다.

고문경찰의 숫자를 두 명으로 축소조작한 짓 역시 석 달여만에 탄로가 나고 말았다. 고문자들 이외에는 아무도 본 사람이 없는, 저 험한 치안본부 대공분실의 밀실에서 벌어진 만행이었건만, 진실이 드러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군은 달랐다. 내무반에 있던 10여명의 사병이 허 일병이 총격을 받는 장면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진실은 은폐된 채 18년이라는 세월이 흘러야 했다. 그 긴 세월 동안 허원근 일병은 군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나약한 사병일 뿐이었다.

뒤늦게 진상이 밝혀진 이 사건은 워낙 충격적인 일인지라 조선, 중앙, 동아 모두 상당한 비중을 두고 보도했다. 조선과 중앙은 동아와는 달리 이 사건을 독립된 사설로 다루며 보도했지만, 전반적인 보도내용은 극히 부실하고 실망스럽다. 이들 신문은 방대한 취재인력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과 중앙은 거의 연합뉴스의 기사를 받아쓴 정도이다.

중앙일보는 사설에서 이 사건을 인권의 측면보다는 군의 신뢰에 초점을 맞추어 다루어 군 문제에 대한 인식의 빈곤을 보여주었다. 반면 동아일보는 손효림 기자가 이 사건을 충실하게 취재하여 상세하게 보도했으며, 다른 신문들과 달리 [기자의 눈] 난을 통해 기무사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녹화사업 관련 현지조사를 거부한 사실과 전두환, 노태우 등의 조사불응을 비판한 점이 돋보였다.

특히 동아일보는 이 사건만을 따로 떼어 사설로 취급하지는 않았지만 8월 21일자 사설에서 전직 대통령들의 조사불응과 국가기관의 소극적인 태도를 비판하면서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의 활동시한과 권한강화를 강력히 촉구하였다. 이 같은 동아의 사설은 조선과 중앙이 이 사건의 재조사를 촉구했을 뿐,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의 활동시한과 권한강화 등을 외면한 것과는 뚜렷이 대비된다.

이 사건에 관한 동아일보의 보도도 조선이나 중앙에 비해 충실하기는 했으나, 충분히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먼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18년간 묻혔던 허원근 일병 사망사건의 진상이 밝혀진 시점은 이회창씨 두 아들의 병역면제와 관련된 의혹이 날로 증가하고 있던 때였다.

누구는 신의 아들로 형제가 면제를 받고, 누구는 전방에 끌려가 라면 잘못 끓였다는 이유로 죽음을 당하는 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현실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이나, 이런 유형의 사건이 필연적으로 몰고올 병역의무에 대한 저항 등에 대한 취재는 찾아볼 수 없었다. 병역비리 의혹에 대해서는 동아일보도 조선이나 중앙과 큰 차이 없이 극히 소극적으로 임했기 때문에 이런 기사를 기대하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을는지도 모른다.

다른 한 가지 문제는 보다 심각하다. 군에서는 매년 300여명의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고 있는데, 그 중 1/3 가량이 자살로 처리되고 있다. 이 중에는 물론 명백한 자살도 있지만, 사망 당시의 정황으로 보나 사망자의 평소 성격으로 보나 유가족들이 도저히 자살로 받아들일 수 없는 사건들이 많이 있다.

천주교인권위원회와 군의문사/군폭력대책위원회가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한 군의문사 사건도 현재 33건에 달하고 있다. 유가족들은 자신의 아들이나 동생이 허원근 일병의 경우처럼 자살로 위장된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한겨레를 포함한 어떤 신문도 이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끈질긴 노력 끝에 진상을 밝히는 실마리를 제공한 허원근 일병의 아버지 허영춘 선생에 대한 보도에서 한겨레와 동아가 그 분의 직함을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의문사지회장'이라고 소개하여 다른 의문사사건이 많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 고작이다.

많은 사람들은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하면 노근리 사건을 떠올린다. 그러나 노근리 사건은 당시의 무수한 학살 사례 중 하나일 뿐이다. 허원근 일병 사건 역시 군대에서 일어난 무수한 군의문사 사건 중 하나일 뿐이다.

허원근 일병의 경우는 강제징집에 의한 입대였기 때문에 녹화사업의 희생자가 아닌가하는 의문이 제기됨에 따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사건을 맡아서 조사하여 진상이 밝혀진 것이다.

허원근 일병 사건은 18년 전의 사건이 아니다. 불행하게도 최근에도 군대 내에서 자살로 처리된 의문사가 끊이지 않는다. 우리 군에서 전쟁을 치르지 않고도 수백 명의 젊은이들이 죽어나가는 데는 사회의 무관심도 일조를 하고 있는 셈이다. 군의문사와 군대 내의 인권에 대해 우리 사회는 합당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추기 : 이 기사를 송고하기 직전에 받아 본 조선일보 8월 28일자는 허원근 일병 사건 당시의 부대원들이 "조직적 은폐조작은 없었다"라고 주장했다는 것을 사회면(31면) 톱에다가 30면에 박스기사로 부대원들의 발언록까지 실어 크게 보도했다.

조선일보가 취재한 바에 따르면 부대원들은 내무반에서의 회식에서 싸움도 없었고, 총기사고도 없었다는 것이다. 진술자들의 증언이 의문사진상규명위의 발표와 일치하는 부분은 사건 당일 오전 10시에서 11시 사이에 2발의 총성을 들었다는 부분뿐이다. 그러나 조선일보의 발표가 진실에 접근하고 있지는 않다.

▲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왜 부대원들은 2발의 총성만 들었는데, 허 일병은 3발의 총을 맞았는지에 대해, 부대원들 역시 18년간의 사건 은폐와 무관할 수 없는 처지라는 점에 대해, 중대에서 상황보고를 안했는데 어떻게 대대에서 새벽 4시에서 6시 사이에 상황보고를 받을 수 있었는지 등에 대해 조선일보는 입을 다물고 있다.

이회창씨 두 아들의 병역면제 의혹에 대해 애써 이회창씨 측을 감싸고, 또 병역비리 논란이 군의 중립성을 해친다는 궤변을 펴 온 조선일보의 행태를 볼 때, 8월 28일자 보도를 통해 의문사진상규명위의 발표의 신빙성에 조선일보가 강한 의구심을 표한 것은 어둠의 자식의 억울한 죽음과 그 은폐조작과 신의 두 아들의 병역면제라는 극도로 폭발력이 강한 두 사건이 결합하는 것을 막아보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2002년 대선을 앞둔 시기, 신문의 편파·불공정·왜곡보도에 대한 감시운동을 위해 각계 전문가들이 자발적으로 나서고 있다. 민주화운동의 대표세대인 3,40대가 주축이 되어 결성한'희망네트워크'(www.hopenet.or.kr)의 <13인위원회의 신문읽기>는 매주 화, 목, 토 격일간격의 모니터링 칼럼을 이어가고 있다.

<13인위원회의 신문읽기>에는 한홍구 교수를 비롯해 문학평론가 김명인씨, 소설가 정도상씨, 김택수 변호사, 권오성 목사,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의 저자 홍세화씨, 권오성 목사, 김창수 민족회의 정책실장, 전 중앙일보 문화부장을 지낸 방인철씨, 이용성 한서대 교수, 권오성 수도교회 목사, 대학생 오승훈씨, 민언련 사무총장 최민희씨 등 각계 전문가가 함께 하고 있다.

독자로서 필진에 참여하고자하는 분들은 희망네트워크 홈페이지(www.hopenet.or.kr)「독자참여」란이나 dreamje@freechal.com을 이용.-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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