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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우리나라 헌법 제1조가 밝히고 있는 말이다. 실로 불행스러운 일은 우리에게 '공화국'은 "국민이 대물림하는 왕 대신 대통령을 선출한다"는 의미로 다가올 뿐, '공익'이 전제된 나라의 의미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공화국'은 누구나 알다시피 republica, republique, republic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res'와 'publica'이 합쳐진 라틴어 어원이 말해주듯, 공화국에는 고대 그리스이래 공익 추구의 의미가 그 안에 담겨 있다. 지금도 로마자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republica, republique, republic 을 말하면서 자연스럽게 '공익'을 떠올리게 되지만, 우리는 공화국을 말하면서 공익을 좀처럼 떠올리지 않는다.

공익 개념이 비어 있는 공화국, 한국사회에서 공익의 공동체적 목표가 실종된 탓이 이 때문만은 아니지만, 이것이 중요한 결과를 가져왔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예컨대, 우리는 병역과 납세의 의무를 정서적인 차원에서 바라보는 데 익숙해 있다. 그것이 공화국 시민의 필수적 자격 요건이라는 점을 놓치곤 한다. 그 결과,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에 공화국 시민 자격도 없는 사람이 근대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현실을 사회구성원 대부분이 무감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요컨대,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이라면 응당 두 아들의 병역 미필에 비리가 없었다고 주장하는 대신에 두 아들이 병역 의무를 다 할 수 있도록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즉 체중을 줄이기보다 늘이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밝혀야 마땅한 것이다. 우리의 사회환경은 이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을 이끌어내고 비판하여 올바른 사회환경을 조성하는 일이 언론의 구실이라 할 때, 대부분의 우리 언론은 체중이 많아 병역을 필하지 않은 방상훈씨의 <조선일보>가 보여주듯 그 반대편에 있다.

딴 소리가 길어졌다. 아무튼 공익추구에 대한 사회구성원들의 인식 부족이 사익추구 집단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연결되어, 가령 <조선일보>나 한나라당의 성격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덧붙이기로 하자.

사익추구 세력인 <조선일보>의 예민하고 예리한 촉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8월17일치 사설 "검찰은 '김씨들' 입만 쳐다보지 말고"는 그들이 상황 변화에 얼마나 기민하게 반응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다.

사설 제목의 '김씨들'이란 이회창씨 아들의 병역 비리 의혹을 밝힌 김대업씨와 미국에 도피중인 김도술씨를 말하는데, 제목부터 '공익'이나 '공화국'과는 먼 딴나라의 말이다. 사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 조선일보 8월17일치 사설 <검찰은 '김씨들' 입만 쳐다보지 말고>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후보 아들 정연씨의 병역 논란이 관계자들의 증언 번복과 예상치 못한 새로운 주장들의 돌출로 갑자기 복잡하게 꼬여가고 있다."

용어 사용의 치밀성을 눈여겨보자. '병역 비리 의혹'이 아니라 '병역 논란'이고, 상식을 벗어난 병적기록부 변조라는 '새로운 사실이 밝혀진 게' 아니라 '새로운 주장들의 돌출'이다. 그런데 "갑자기 복잡하게 꼬여가고 있다"고 말해 <조선일보>의 불편한 심정을 드러내고 있다. 증언을 번복한 사람이 김도술씨가 아니라 김대업씨였다면 물론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 동안 이 땅에 없는 김도술씨를 빗대 김대업씨 증언에 물타기를 시도했던 <조선일보>가 두 사람을 등치할 수밖에 없게된 상황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사설은 "이제는 성문분석이 웬만큼 잘돼도 의혹의 전모가 산뜻하게 드러날 수 있을 것인지 장담을 할 수 없게 됐다. 두 사람이 지금까지 보여온 행태로 보아 과연 어느 한쪽이 분석결과에 흔쾌히 승복하고 진실을 털어놓을 것인지 믿기가 힘들게 됐기 때문이다"라면서 다시금 말을 번복한 김도술씨와 비교적 일관성을 보이고 있는 김대업씨를 등치시키고 있다. 또 성문 분석이 잘 돼도 의혹의 전모가 드러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비리 의혹'이 '비리'로 밝혀질 가능성이 희박함을 전제하고 있다.

사설은 "검찰은 좌충우돌하는 김대업-김도술씨의 입만 쳐다보고 있을 것이 아니라 수사인력과 기법을 총동원해 이 세 가지 의문을 신속히 풀어야 한다. 필요하면 상대가 누가 됐건 소환해 조사해야 하고, 정치권의 눈치는 더더욱 봐서는 안 된다"고 한 뒤, "중요한 것은 수사의 속도"라면서 결론 부분을 도출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조선일보>는 수사에 속도를 촉구한 것일까?

대선은 아직 넉 달이나 남아 있다. 국민 대부분이 후보자나 당의 정책보다 지역구도에 따라, 공익추구에 대한 인식도보다 정서적 흐름에 따라 후보를 선택한다는 점에서, 넉 달은 앞으로도 여러 번 엎치락뒤치락할 수 있는 시간이다. 특히 이회창 후보 아들의 병역 비리 의혹은 설령 그것이 계속 의혹으로 계속 남는다고 해도 이후보에게 치명적인 변수가 될 가능성이 크다. 이회창 후보 스스로 '비리가 발견되면 정계를 떠나겠다'고 배수진을 친 터다. 그 위에 정몽준, 이인제, 박근혜, 김종필, 이한동 등이 앞으로 어떻게 움직이는가에 따라 대선 판도는 아직 아무도 점칠 수 없는 상황이다.

이처럼 앞으로 대선구도에 변수가 많다는 점은 <조선일보>에겐 고민거리다. 공익추구 세력은 원칙에 의해 방향성에 변함이 없지만, 사익추구 세력은 사익을 최고로 할 수 있는 정치사회적 환경이 되도록 도모하는 동시에 그 자신을 어느 지점에 놓을 것인지에 대해서도 촉각을 계속 곤두세운다. 따라서, <조선일보>가 수사에 속도를 촉구한 것은 '이회창 카드'가 마지막 순간에 기우는 불운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사설은 이렇게 끝난다. "진실을 최대한 빨리 규명해 그가 물러날 상황이면 즉시 물러나고 그렇지 않다면 결백을 공인받게 해야 한다.
▲ 홍세화
ⓒ 희망네트워크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에서 차기지도자를 뽑는 대통령선거를 맞는 것은 국가와 우리 국민 모두의 불행이다."

과연 그럴까? 진실은 본디 '빨리' 규명되는 게 아니라 '정확히' 규명되는 것이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란 병역 비리 의혹이 계속되는 상태를 말할 터이다. 그것이 과연 '국가와 우리 국민 모두의 불행'일까, 아니면 <조선일보>의 불행일까? 그리고 그 씨앗은 누가 뿌린 것인가? 공화국 시민의 자격조건에 대해 물어야하는 까닭이다. <홍세화 -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저자>

덧붙이는 글 | 2002년 대선을 앞둔 시기, 신문의 편파·불공정·왜곡보도에 대한 감시운동을 위해 각계 전문가들이 자발적으로 나서고 있다. 민주화운동의 대표세대인 3,40대가 주축이 되어 결성한'희망네트워크'(www.hopenet.or.kr)의 <13인위원회의 신문읽기>는 매주 화, 목, 토 격일간격의 모니터링 칼럼을 이어가고 있다.

<13인위원회의 신문읽기>에는 홍세화씨를 비롯해 문학평론가 김명인씨, 소설가 정도상씨, 김택수 변호사, 권오성 목사, 중앙일보 문화부장을 지낸 방인철씨, 권오성 목사, 김창수 민족회의 정책실장, 한서대 이용성 교수, 대학생 오승훈씨, 민언련 사무총장 최민희씨, 한홍구 교수 등 각계 전문가가 함께 하고 있다.

독자로서 필진에 참여하고자하는 분들은 희망네트워크 홈페이지(www.hopenet.or.kr)「독자참여」란이나 dreamje@freechal.com을 이용.-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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