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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십 수년 전에 「개의 혼령」이라는 단편소설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불현듯 생각이 나서 찾아 읽어보니 가슴 한구석을 아릿하게 하는 작품이더군요. 여기에서 그 소설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소개할 수는 없지만, 개와 인간과의 밀접한 관계가 여러 가지 사건들과 함께 농밀하게 그려져 있더군요.

소년 시절의 한 충격적인 사건으로 말미암아 평생 동안 지니게 된 주인공의 개에 대한 죄의식의 파장과 그것으로부터 연유하여 파생되는 소설의 결말―애지중지하던 값비싼 개를 하루 아침에 보신탕 집으로 보내 버리는 부유한 인간의 위선과 변덕이 꽤나 허망함을 안겨 주기도 하는 그런 작품이었습니다.

내가 어떤 연유로 그런 작품을 쓰게 되었고, 그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과연 무엇인지를 찬찬히 되새기다 보니, 가끔 보신탕을 즐기며 사는 나 자신의 생활 방식이 조금은 무안하게 느껴지기도 하더군요. 인간이란 이런저런 형태의 미묘한 모순 속에서 살게 마련인가 보다는 생각도 슬며시 나래를 펴는 것 같고….

솔직히 말해 십 수년 전에 내가 쓰고 발표했던 그 소설을 거의 잊고 살았습니다. 신기하게도 보신탕을 먹으면서도 그 소설을 떠올린 기억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 대신 개에 대한 단편적인 여러 가지 상념들은 잠깐씩이나마 내게 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지요.

나와 비슷한 연배가 아니더라도, 시골에서 자란 사람들은 개와 관련하는 어렸을 적의 추억이 한두 가지씩은 있을 것입니다. 집에서 기르던 개가 어느 날 돌연 어딘가로 사라져버린 다음의 야릇한 공포를 수반하는 슬픔과 허전함―그것은 우리 세대가 보편적으로 경험했던 일일 것 같습니다.

개를 기르는 최종 목적이 '돈'을 만들기 위한 것임을 자각하고 승복할 때 알게 모르게 가슴을 후비는 듯했던 '가난'에 대한 어린 날의 그 슬픈 인식이 지금도 가슴에 멍울처럼 돋아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지막지한 방식으로 개를 잡던 저 '옛날'의 소름끼치는 풍경에 대한 기억이 오늘도 가슴 한구석에 통증 같은 음영을 드리우고 있는 경우도 많다면 많을 것입니다.

나는 지금 23평 짜리 연립주택에서 살고 있는 처지여서 개를 기른다는 것은 생각도 못합니다. 조건이 좋은 단독 주택에서 산다고 하더라도 개를 기르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집안에서 애완견을 기른다는 것은 내 적성에도 맞지 않는 것 같고, 족보 있는 값비싼 개를 기를 수 있는 호사스러운 팔자는 더욱 아니지 싶습니다. 개를 기른다면 똥개나 기를 텐데, 개가 종국에 가게 되는―아직은 보편적인 개들의 그 최종 운명을 생각하면 차라리 평생 동안 개를 기르지 않고 사는 것이 마음 편할 것도 같습니다.

연립주택 맨 뒷동의 한쪽 공터에다 개를 기르는 집이 있습니다. 나는 그 개들을 볼 때마다 애처로운 마음이 들곤 합니다. 노상 줄에 매여서 제 자리를 뱅뱅 돌며 사는 것이, 그 개의 최종 운명을 극명하게 암시해 주는 것도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개를 놓아서 기른다는 것은 너무 위험합니다. 멋대로 돌아다니다가 쥐약을 먹을 수도 있고, 익숙하지 못한 길에서 차에 치일 수도 있고, 무엇보다도 언제 어디에서 어느 귀신이 채갈 지 모르기 때문이지요.

어머니가 그 개들에 신경을 많이 쓰십니다. 개도 산목숨일 때는 정성껏 먹여줘야 한다는 말을 하면서 자주 개들에게로 가는데, 개들은 어머니 모습이 멀리 비치기만 해도 가로 뛰고 세로 뛰며 좋아 죽을 모습들을 하곤 합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남의 소유인 개들에 그처럼 신경을 쓰는 데는, 그 개들에게 명확히 예정되어 있는 최종 운명에 대한 속절없는 '동정심'도 자리해 있는 것 같습니다. "얼마 있으면 죽을 목숨이니 사는 동안에 더 잘 먹여 줘야지" 하시는 어머니의 말도 나는 들을 수 있었던 거지요.

개장수가 개를 잡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옛날처럼 여러 사람이 동원되어서 요란스럽게 때려잡던 풍경이 아니더군요. 단독 작업인데 일 처리가 순간적이고 간단하더군요. 무슨 조화인지 주눅이 들어 오금이 굳은 듯한 개의 네 발을 묶고 코와 입을 재빨리 고무줄 같은 것으로 묶어버리는데, 개는 금세 숨이 멎고…. 옛날 식이 아니어서 좋다는 말을 내가 했던 것 같은데, 그것은 개의 운명에 대한 내 측은지심의 또 다른 표현일 듯도 싶습니다.

최근에 들은 얘기인데, 요즘은 개를 죽이는 방법이 좀 더 발전되었다고 하더군요. 소나 돼지처럼 전기 충격으로, 순간 작업을 하는 경우가 많답니다. 그것도 다행이라면 다행일는지….

언젠가 한 번은 아내와 함께 어느 산책길에서 뜻밖에도 개 사육장을 본 적이 있습니다. 수십 마리의 개들이 사과 궤짝 같은 우리 속에 한 마리씩 갇혀서 사육되고 있는 광경을 보자니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더군요. 그야말로 산란용 닭장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최대한 운동량을 줄여서 단기간에 체중을 불리려는 술책일 터인데, 그렇다면 개들의 몸 속에 투입되는 약물은 또 얼마나 될까….

농약 속에서 자라는 채소와 과일, 성장촉진제 덩어리라는 닭, 도축장으로 실어내기 하루 전에도 돼지 몸에 주사제를 투입하는 양돈장이 많은 현실을 생각하면 개라고 약물 사용을 하지 않을 리 없는 일일 터였습니다.

때로는 보신탕을 먹으면서도 이 개가 어떤 식으로 키워진 개일지 궁금해지는 순간도 있지요. 그 산란용 닭장 같은 음산한 개 사육장의 풍경이, 사과 궤짝 같은 우리 안에 갇혀서 운신도 못하던 개들의 슬픈 표정이 자꾸 떠오르는 때도 있고….

어렸을 때 들었던, 내 뇌리에 각인 된 개의 울부짖음이 상기되는 순간도 있지만, '소리'를 잃어버린 개들의 막막한 '적막'이 내 뇌리에 잡히는 순간도 있지요. 옛날에 읽은 박범신씨의 단편은 인간의 잔혹성이 얼마나 다양하고 극대화될 수 있는가를 잘 보여 준다고 생각됩니다. 개들의 울부짖음에 의한 소음과 에너지 방출을 방지하기 위한 수법으로 꼬챙이로 개들의 귓구멍을 찔러 고막을 없애 버리는 작업 과정이 세세하게 그려진 소설이었습니다. 소리를 전혀 들을 수 없게 된 개들이 동시에 짖는 본능도 잃고 마는 끔찍한 내용의 그 소설을 읽으며 전율했던 기억은 지금도 내 뇌리에 무겁게 매달려 있습니다.

사실 나는 많이 기억하고 생각합니다. 개고기를 먹으므로 기억의 재생은 좀더 원활해지고, 생각 또한 더욱 명료해지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나는 기억의 재생이나 생각의 너울이 개와 관련하는 쪽으로만 국한되는 것도 아닙니다. 나는 쇠고기를 먹으면서도 아픈 생각을 떠올리는 때가 많습니다. 가끔 신문 지면을 장식하곤 했던 사건이 있지요. '물 먹인 소'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소의 체중을 조금이라도 늘리려고 과도하게 물을 먹인 다음 그 소를 팔고 도축했다는 얘기인데, 그 구체적 실상을 알면 정상적인 사람은 몸서리를 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몇 년 전 김상렬씨의 단편소설을 읽으며 나는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소의 네 다리를 꼼짝도 못하게 묶어놓고 소의 목구멍 속에다 호스를 집어넣고 기계로 물을 밀어 넣는데, 단지 그러기만 하는 줄 아십니까? 소의 뱃속으로 들어간 물이 온몸 구석구석으로 골고루 퍼지도록 곤장 같이 널찍한 몽둥이로 소의 온몸을 난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소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몸이 푸들푸들 떨고, 눈은 허옇게 뒤집어지는데, 마침내 그 눈에서는 눈물인지 그냥 물인지 모를 액체가 뚝뚝 떨어지고….

그 소설을 읽은 후 한동안은 쇠고기를 넣고 끓인 미역국도 먹기가 싫더군요. 그리고 또다시 '물 먹인 소'에 대한 보도를 접했을 때 인간의 잔혹함에 대한 한량없는 공포감과 분노 때문에 소화 불량을 겪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지금도 쇠고기를 먹으며 '물 먹인 소'를 떠올리는 때가 있습니다. 내가 지금 먹고 있는 이 쇠고기는 죽음 직전에 잔혹한 인간들에 의해 끔찍한 고통을 겪은 소의 고기는 아닐까? 지금도 이 세상의 어느 은밀한 구석에서는 그런 잔혹한 비밀 작업이 벌어지고 있지 않을까?

어렸을 때 태안천주교회 바로 아래에 있었던 소 도살장에서 추석 전에 소들을 도축하는 장면을 보았던 기억은 내게 일종의 멍에 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도살장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려고 뒤로 버티다가 어쩔 수 없이 끌려 들어가면서 시멘트 바닥에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던 소의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소가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도살장 안에서 머리의 급소를 정확히 때리는 작은 쇠망치 한 방에 큰 덩치가 벌러덩 넘어져서는 사지를 떨며 죽어가던 소의 모습…. 급소를 한번 더 때리고 칼로 목에 구멍을 내고 콸콸 쏟아지는 선지피를 양동이에 받던 장면….

거의 매일 저녁 백화산을 오를 적마다 등산로 초입머리 기슭에 자리한 한 집의 외양간 앞을 지나곤 합니다. 이제는 어른 소가 된 잘생긴 처녀 소를 매일 보는 것도 내게는 즐거운 일입니다. 여물통 앞에 서서 맛있게 여물을 먹거나 마른 볏짚 위에 편안히 앉아서 되새김질을 하는 소를 잠깐씩 들여다보곤 합니다. 소의 얼굴과 큰 눈망울을 보노라면 나는 잠시나마 무심의 평화를 얻는 듯 싶어 좋습니다.

얼마 전에는 쇠파리 떼가 소를 너무 괴롭히는 것 같아 모기약을 사 가지고 가서 외양간 근처 풀숲에다 숨겨두고 오갈 적마다 소의 몸에 약을 뿌려 주곤 했지요. 쇠파리들도 조물주로부터 부여받은 권리와 생존 방식으로 살아가는데 내가 너무 간섭을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가지면서도….

한번은 소를 보며 이런 양순한 얼굴과 눈을 가진 소에게 어떻게 그처럼 물을 먹이며 잔혹한 짓을 할 수 있을까, 우울한 생각을 하던 끝에 이 소는 언제쯤 도축장으로 끌려가게 될까―괜한 의문에 사로잡히기도 했지요. 옛날처럼 힘든 농사일에 동원되지 않으니 소의 하루하루는 그저 편안함뿐이지만, 오히려 그것이 소의 소용 가치를 반감시키는 것은 분명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소를 주인이 새끼를 뺄 목적으로 먹이고 있는 것인지, 이제 다 자랐으니 곧 정육점에 팔아버릴 것인지, 그것이 왜 그렇게 궁금해지는지….

매일같이 만나는 소에게서 정을 느끼고 소의 눈망울에서 평화를 느끼는 나도 쇠고기를 먹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소에게 물을 먹이는 인간들의 잔혹함에 대해 분노하고, 소의 고통을 상상하며 가슴 아파하면서도 나는 쇠고기를 먹었고, 먹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개고기도 먹습니다. 몹쓸 방법으로 개를 사육하는 인간들의 잔인성에 한숨짓고, 개들이 겪는 고통에 가슴 아파하면서도 개고기를 먹습니다. 개 도둑이 극성을 부리고 있는 세상입니다. 우리 성당의 신부님이 몹시도 귀여워하던 개들이 한꺼번에 세 마리나 사라져버렸습니다. 넓은 성당 구내에서만 뛰놀며 살라고 놓아먹인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자주 주인을 따라 성당에 와서 문 앞에 앉아서 같이 미사를 지내곤 하던 이 과장네 누렁이도 어느 날 사라져버렸습니다. 보신탕 집에 앉아서 혹시 그 개들의 고기가 아닐까 생각하면서도 나는 개고기를 먹습니다.

현재 기르고 있는 개를 지극히 사랑하는 나머지 개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 무지막지한 방법으로 개를 잡던 어른들의 잔인성을 목도했던 어린 날의 뼈저린 기억 때문에 개고기를 먹지 못하는 사람, 인간과 개 사이에 형성되는 그 정의 세계를 도저히 외면할 수 없어 개고기를 먹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런 경험과 정의 세계를 공유하고 인정하면서도 개고기를 먹는 사람도 있고, 아무 감정이나 생각도 없이 그저 탐욕적으로 개고기를 먹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이 세상엔 이런저런 사람과 이런저런 일들이 공존하기 마련입니다. 개고기를 먹는 일이 상 받을 일은 아니로되 흉이 될 일도 아니라고 봅니다. 개고기를 먹는다고 해서 누구나 다 정이 메마르거나 동물, 또는 생명에 대한 인식이 빈약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나는 개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인정하며, 그 명확한 이유들을 아름답게 보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이 존재해야 하고, 그런 사람들 때문에 이 세상은 더욱 아름다워질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들이 개를 먹지 않는 이유는 명확한 선(善) 지향의 '정신'이 될 수도 있겠기에….

얼마 전에 대전 둔산동의 이름난 보신탕 집에서 어머니 모시고 동생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할 때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을 보았습니다. 넓은 홀에는 손님이 가득했는데, 내가 가까이 볼 수 있는 자리에서 특이하다면 특이한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습니다. 젊은 남자 셋에 처녀인 듯한 아름다운 여성이 한 사람 앉아 있었는데, 그 아가씨는 처음부터 내내 전골 냄비에는 젓가락 한 번 대지를 않더군요. 세 남자가 열심히 맛있게 개고기를 먹는 것을 다사롭게 바라보기만 할 뿐….

아가씨에게 개고기 먹기를 강권하지 않는 남자들의 모습도 보기 좋았지만, 개고기 먹는 남자들을 미운 눈으로 보지 않고, 자신은 고기를 먹지 않으면서도 오래 끝까지 같이 앉아서 담소를 나누는 그 아가씨의 웅숭깊은 모습이 나는 참으로 매력적으로 보였습니다. 맛있는 냄새를 피워내는 전골 냄비 앞에서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는 그 아가씨의 인내심과 굳은 의지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나는 지금도 그 아가씨의 모습을 떠올리곤 합니다. 그 아가씨의 모습을 떠올리면 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 아가씨에게도 개고기를 먹지 않는 명백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나는 그 이유를 인정해 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아가씨를 아름답게 본 것처럼 명백한 이유로 개고기를 먹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아름답게 보고 싶습니다.

더 나아가서, 자신은 개고기를 절대 먹지 않으면서도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앉은 그 아가씨가 다사로운 눈으로 바라보아 주던 세 명의 행복한 남자들처럼 나도 개고기를 먹고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을 보면 그런 아가씨와 같은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개고기를 둘러싼 논쟁들을 보면 한가지 미묘한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개고기 음식이 거의 보편화되어 있는 우리 풍토에서도 개고기 반대파는 다분히 공격을 하는 양상이고, 개고기 옹호파는 어쩔 수 없이 방어를 하는 상황이라는 거죠. 대체로 그렇다는 얘깁니다.

내가 지난번에 발표한 「우리 가족의 보신탕 외식」이라는 글은 우리 국민 모두 개고기를 먹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 위해 쓴 글이 아닙니다. 또 한번 보신탕을 먹게 된 우리 가족의 '사는 이야기'를 소개하자는 게 목적이었지요.

지난해 대장암 수술을 받으시고도 열심히 즐겁게 잘 사시는 팔순 노모님을 중심으로 우리 형제 가족이 남다른 우애 속에서 오순도순 단란하게 살아가는 모습과 보신탕집 주인아주머니 같은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하는 의도였지요.

그런데 그 이야기에 보신탕이 등장하므로써, 다시 말해 우리 가족이 보신탕을 먹는 이야기와 여러 가지 관련 사실들이 상세히 그려지므로써 다수 독자들의 관심이 온통 '보신탕' 쪽으로만 쏠리는 현상이 빚어지고 말았습니다. 무릇 글이란 종합적인 관점과 전체적인 파악을 필요로 하는 법인데, 다수의 '독자의견'들만을 놓고 볼 때는 그것이 완전히 무시된 형국이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내가 자초한 일임이 분명합니다. 글의 끝 부분에 일부 독자들이 내가 남을 속여 개고기를 먹게 한 것으로 파악하는 별 필요 없는 이야기를 사족처럼 달아서 독자 여러분을 더욱 자극했던 것 같습니다. 내가 그 이야기를 버리지 못한 것은, 아무래도 보신탕 이야기가 나 자신에게도 적지 않은 부담감을 주어서 뭔가를 보강하고자 하는 일종의 강박관념 같은 것의 작용 탓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개고기 문제가 우리 사회의 '뜨거운 감자' 같은 것임을 잘 알기에 내 글이 거친 논란도 불러올 것임은 훤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처음에는 글의 후반부에 오늘 이 글의 주요 내용을 쓰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지요. 그러나 글이 너무 길어지는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독자 의견들과 관련하여 어쩌면 또 하나의 글을 쓰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어서 결말을 그렇게 처리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던 거지요.

많은 논란을 훤히 예상하고 또 각오했음에도, 정도가 심하고 예리함에 당혹감을 가졌던 것도 사실입니다. 보신탕을 먹는, 또 그것을 공개하는 나에 대한 미움과 분노, 울울창창한 적개심들을 접하자니 섣불리 화약고를 터뜨린 것 같은 기분이며 후회도 만만치 않더군요. 우리 사회에서는 더욱 개고기를 먹는 자체만으로도 얼마든지 능멸과 증오와 적의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 확인에서 좀더 많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개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독자 의견 속에 투영된 갖가지 견해들을 명확히 헤아리고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면서도 일부 견해들에 대해서는 의아심을 갖게 되더군요. 오십이 넘은 나이에도 뭔가를 깨닫지 못하고 사는 나의 한계를 절감하면서도, 그것을 지적하는 견해 속에 지독한 편견과 독단이 개재되어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지요. 자기 기준에 충실한 것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일방적 판단에 얽매인 지나친 논설은 자기 기준에 대한 맹신을 표현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자기 기준이 확고한 사람일수록 그 기준에 대한 스스로의 검증 작업이 꼭 필요하지 않을까요?

상당수의 독자 의견들이 내 글의 끝 부분에 배치된 두 가지 에피소드―남들을 속이고 개고기를 먹였다고 파악되는 부분에 집중되어 있는 것에서는 웃음을 머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를 거짓말쟁이로 몰아가는 그 집중 공략에서 단순성(또는 순진함과 고지식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지요. 그 두 가지 에피소드(결국 에피소드일 수밖에 없는 이야기)에는 좀더 많은 전후좌우 설명이 필요한데 그것을 생략했기 때문에 생긴 결과겠지만, 나는 거짓말과 약속을 어기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며, 그 에피소드들에서 그때나 지금이나 아무런 양심의 불편을 느끼지 않습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또 나의 탐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닌 거짓말은 죄가 되지 않는다느니, 선의적인 거짓말은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따위 시정의 범속한 견해들에 빌붙어서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것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이미 글이 너무 길어지고 있으므로 피하지만, 간접적인 표현을 한가지만 하지요.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는다는 속담을 아시는지요? 그 에피소드들의 속내는 모두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은 이야기들일 뿐이랍니다.

그러나 나는 모든 독자 의견들을 존중합니다. 따라서 개고기를 먹지 않는 분들, 모든 개고기 관련 사항들을 안타깝게 보시는 분들을 자극하고 또 상처를 준 것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내 글이 전체적으로 '예쁜 글'이 되지 못했음을 인정합니다. 세련되지 못하고 지혜롭지 못한 표현들에 대해서도 반성을 합니다. 또다시 그런 글을 써서 개고기를 먹지 않는 여러분들의 '아름다운 심성'을 훼방하지 않을 것임을 약속합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가능하면 많은 분들이 좀 전에 소개한 대전 둔산동의 보신탕 집에서 본 그 인상적인 아름다운 아가씨와 같은 모습이기를 바랍니다.

나는 가끔 개고기를 즐기긴 해도 몸보신을 위해 탐욕스럽게 먹지는 않습니다. 단백질을 늘 조심해야 하는 통풍 환자라서 많이 먹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나는 개고기를 적당히 즐기는 정도가 아니라 탐욕스럽게 먹는 사람들을 경멸합니다. 몸보신이라면 무슨 음식이든, 무슨 짓이든 가리지 않고 감행하는 속물들과 밀렵꾼들을 증오합니다. 자신의 얄팍한 이기를 위해 동물에게 잔혹한 짓을 일삼는 인간 말종들에 대해서도 늘 분노합니다. 그런 인간들에 의해 벌어지고 있는 슬픈 현실을 전혀 의식하지 않으며, 맘 편케 개고기를 즐길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소망합니다.

나는 내 아이들이 개와 관련하는 (내 소설 「개의 혼령」속에 묘사된) 아버지의 음울한 기억들을 이어받지 않게 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한편으로는 나의 가난한 형편 때문에 아이들이 개와 인간 사이의 그 밀접한 정의 세계를 체감하지 못하며 자라는 것을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훗날 어른이 되어서도 개와 인간 사이의 그 밀접한 정의 세계는 경험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군대 가서 군용견을 기를 수도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지금은 가족과 함께 아무 부담 없이 개고기를 먹는 내 아이들이 훗날 어른이 되어서 개와 인간 사이의 그 밀접한 정의 세계를 체감한 나머지 스스로 개고기를 먹지 않게 될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나는 내 아이들의 그것을 인정하고 존중해 줄 생각입니다.

그렇지만 개고기를 먹지 않게 된 아이들이 자신들의 기준으로 아버지에게 개고기를 먹지 말 것을 강요하지는 않기를 바랍니다.

거듭 말하거니와, 개와 인간 사이의 그 밀접한 정의 세계에 근거하여 개고기를 먹는 것을 자랑처럼 선전한 나를 비난하고 공박하신 독자 여러분의 그 견해를 나는 존중합니다. 여러분의 그 '심성'을 아름답게 봅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가끔 개고기를 원하시는 팔순 노모님을 모시고 가서 온 형제 가족이 보신탕을 즐기는 그 오붓한 가족의 화목과 소박한 즐거움을 버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것을 여러분이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덧붙이는 글 | 나는 내 글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모든 견해를 존중하는 뜻으로 어떤 의견도, 단 하나도 버리지 않고 모두 내 홈피의 '독자의견게시판'에다 옮겨서 보관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저런 의견(이견)이 있을 수 있음을 늘 인정하고 수시로 참고하면서 내 홈피 방문자들과 공유를 하기 위해서이지요. 의견을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하고, 이 긴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도 고마운 마음을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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