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동해 '묵호에 가면 거리의 개도 만원짜리를 물고 다니더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오징어, 명태잡이로 황금어장을 누리던 곳이 묵호다.
또한 묵호는 '돈을 깍지로 끌어오듯 벌었던 곳이 제빙공장과 목재소 였다, 고 한다. 워낙 많은배가 조업을 했고 어선 현대화가 시작되던 시기, 수협 소속의 제빙공장에서 만드는 얼음은 늘 부족 할 수 밖에 없었다. 어민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비싼 민간 제빙공장인 삼성제빙과 대원제빙에서 만드는 얼음을 쓸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제빙공장과 목재소가 대박을 터트리던 시기가 1970년대 중반 정도다.
당시 묵호 발한삼거리 최고의 명소는 바로 <묵호극장>이었다. 가수 윤향기와 윤복희의 어머니인 고전무용가 고향선(본명 성경자)이 공연도중 심장마비로 30세 나이로 사망한 사건이 있기로 유명했던 곳이며 수많은 사람이 영화와 쇼, 악극 등을 보며 기뻐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한 영동권 문화의 중심이었던 곳이다.
묵호극장은 극장 주인이 고려목재소를 운영한 관계로 톱밥을 난방용 난로 연료로 쓰면서 겨울철이면 연통이 달아올라 크고작은 화제가 발생하기 일쑤였다고.. 당시 극장을 자주 출입했던 권순일 (남,62)씨는 회상했다.
당시 읍내의 중요한 각종행사는 시내 중앙통에 자리했던 이 극장에서 치렀으며 묵호극장 옆집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던 현 강원도의원 김형원 (남,57)씨는 ' 영화 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시네마 천국>에서 촬영기사의 어린 친구로 나오는 소년 <토토>처럼 본인도 묵호극장 영사실에 수시로 드나들었다'고 기억했다.
개구석 앞의 문화극장, 보영백화점과 함께 영동권 최고의 번화가로 화려한 역사를 보낸 묵호극장은 겨울만 되면 크고 작은 불이 꼭 몇번씩 나다가 결국 묵호극장은 1978년 완전 전소하면서 화려한 역사를 마감했다.
우리 영동권이 전국적으로 부각될수 있었던 것은 1941년 묵호항 개항과 삼척탄광 개발이었으며 이로 인해 우리 국민들은 6.70년대 겨울을 따뜻하게 지낼수 있었다. 또한 당시 묵호극장이 명성을 떨치던 시기 명태와 오징어,꽁치 등 황금어장 덕에 가난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사진 동해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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