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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삶 자체에 충실한 정열적인 남자

[소설]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비극 'Another Holocaust' 50화
16.05.17 18:42l

검토 완료

이 글은 생나무글(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짧은 머리에 연령대가 다양한 남정네들이 하나, 둘 쭈뼛쭈뼛 나타난다. 수용소에 수감된 다음 처음으로 만나보는 민간인이다.

"안녕하세요. 도움을 주신다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반죽 좋은 '1358'이 좋은 인사성을 보인다.

"그렇지 않아도 근처에 휴게소나 편의점 같은 것도 안 보여서 걱정 많이 했는데 다행입니다. 할머니하고 두 분만 계신가 보죠?"

역시 '1358'은 영악하다. 현재 상황 파악을 하는 데 힘쓰고 있다.

"네, 부모님 돌아가신 다음부터 쭉 제가 할머니 모시고 살고 있어요. 할머니께서 눈이 보이지 않아요. 그래서 제가 늘 붙어 있어야 하죠."

이제 묻지 않은 얘기도 덧붙인다. '1358'은 그때서야 마음을 놓는다.

"실례지만, 저녁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돈은 드릴 테니까요."

'1358'은 1만 엔 짜리 지폐 3장을 내놓는다.

"저희 집은 식당이 아닙니다. 저와 할머니를 모욕하려면 나가 주세요."

웃는 낯빛 친절을 보였던 집 주인 여자가 정색을 하면서 얘기한다.

"아니, 제가 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요. 그래서 돈을 꺼낸 것입니다."

"어찌 됐든 저희 집에 온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밥을 드리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모두 나가 주세요."

"진짜 죄송합니다. 더 이상 오해하지 마세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1358'은 무릎을 꿇고, 진심으로 사과한다. 사실 '1358'도 속으로는 3만엔 정도 주면 촌 동네 집에서 밥 정도는 해주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 3만엔 돈도 후쿠시마 한 마을에서 하룻밤 머물 때 이곳저곳 뒤져서 훔쳐온 것이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시골이면 시골대로 자존감과 그들만의 삶의 방식이라는 게 엄연히 있다는 점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젊은 여주인은 말없이 부엌으로 간다. 밉지만 밥은 해주겠다는 몸짓이다. '1358'은 꼼꼼하게 집안을 살핀다. 마치 도둑질하기 위해 무슨 값진 것이 없나 하는 호기심 가득 찬 눈초리로. 그가 벽에 걸려 있고, 사방에 널려 있는 각종 자료로 찾은 것은 그녀 이름은 '오마에 카라'이고, 서른네 살, 도시에서 살다가 수년 전에 이곳으로 왔으며, 주변에 남자 흔적은 없다는 점이다.

"이집은 남자 냄새가 하나도 없어. 오리지널 여자의 집이라는 거지. 매력 있네. 아예 여기서 저 여자와 살아버릴까?"

파트리크 쥐스귄트의 소설 '향수'에서 태어날 때부터 아무런 냄새가 안 난다는 이유만으로 버림받은 주인공 그르누이가 세상의 모든 냄새를 구분하고, 조화시키고, 만들어내는 것처럼, '1358'은 그 집에서 나는 냄새만으로 그 집과 그녀에 대해 모든 것을 파악이라도 한 양 앞서간다.

파트리크 쥐스긴트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향수>에서 주인공 그르누이는 세상의 모든 냄새를 알고, 그것을 만들어내는 재주도 가졌다. ⓒ 영화 <향수>

하지만 그것은 '1358' 속내 일부를 넌지시 비춘 사실 조각이기도 하다. 자신이 떠나온 오사카까지 까맣게 머나먼 길을 무작정 나서기 보다는 지금 눈에 보이는 그녀 집에서 머무는 것이 더 안전하고 합리적이라는 육감이다.

"오늘은 여기서 머물고, 내일 차량을 구하는 대로 떠납니다. 훔치든 아니면 어디서 구하든 두 대를 목표로 하고요. 여의치 않으면 자동차를 한 대라도 구해오는 대로 먼저 떠나는 것으로 알고 계십시오."

"일단 밥 먹고 나서 연구해 보자고. 과연 지금 우리가 몰려다닌다고 해서 크게 도움이 될 게 있을까? 내 생각에는 아닌 거 같아."

'1358' 말본새가 진작 마음을 바꿔 먹은 모양새다. 그도 그럴 것이 목숨 걸고 탈출했다. 그리고 그렇게 탈출했으면 각자도생(各自圖生), 알아서 갈 길 가는 게 옳다는 논리다.

어차피 요시다, 가네다 그리고 한 둘은 꼭 함께 움직이려 하고 있는 반면 나머지 서너 명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입장이다. 굳이 같이 갈 이유가 없다. 여러 명이 여러 방향으로 흩어져야 살아남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높다는 논리가 설득력을 점점 얻는다.

재미있다. 서로에 대한 믿음으로 죽음을 무릅쓰고 탈출한 동패들이다. 하지만 탈출한 지 고작 이틀째 여덟 명이라는 작은 집단은 벌써 의견이 갈려 서로 다른 패거리를 만들고 있다.

구태여 윌리엄 골딩 소설 '파리 대왕'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똑같다. 소설에서처럼 아이들 의견이 갈려 살인과 광기에 휩싸인다는 것까지는 안 간다. 하지만 이렇게 멀쩡한 어른들조차 사소하게 갈라지고, 편 가르는 게 인간의 속성이자 한계인 점은 마찬가지다.

집주인 오마에 음식 솜씨는 남달랐다. 잘 된 밥은 기본이다. 별로 많지 않은 제철 채소와 약간의 소고기를 이용해 규동을 만들어 줬다. 풍부한 소스에 넉넉한 고명은 호사였다. 막 지은 밥을 덮치는 소고기 소스는 넉넉했고, 따스했다. 금방 한 그릇을 비운 '1358'은 밥을 더 달라고 한다.

"눈물이 날 정도로 맛있네요. 표고버섯과 팽이버섯은 물론 양상추와 가지가 곁들여진 규동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먹을 수 없는 오마에, 당신만의 작품입니다."

칭찬에 인색하지 않았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했다. 다른 사람들도 별반 차이가 없다. 워낙 맛이 있어서인지 오히려 8명 사내가 소리도 없이 먹는 데에만 전념한다. 그들에게 어쩌면 최후의 만찬인 셈인 규동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을 것이 분명하다. 그들 역시 같은 느낌을 충분히 나눴다.

그야말로 '밥심'은 세다. 밥 먹기 전 사내들은 서로 다른 속셈들을 몽땅 드러내 놓고는 따지는 데 급급했다. 하지만 식후에는 모두 너그러워졌다. 가네다들은 나머지 사람들이 어디로 가든 무사히 살아남을 것을 기원했다.

나머지 각자도생파들은 운동권 가네다들이 온전히 도쿄나 대도시로 들어가 수용소의 참상을 세상에 알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며 축원했다. 결정 나지 않을 것 같았지만 그렇게 다음날 일정은 가닥이 잡혀갔다. 밥이 주는 평화였다.

세상 어디에나, 무협지처럼 말하자면 강호(江湖) 어디든 선수들은 있다. '1358'은 선수였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가 생을 즐기듯 '1358'은 자신 삶을 제대로 사는 사람이다.

소설 속에서 먹물인 '나'는 무슨 음식을 좋아하냐고 조르바에게 묻는다. "아무거나 다 좋아하지요. 이건 좋고, 저건 나쁘다고 하는 건 큰 죄악이죠"라고 답했다. 왜냐하면 굶주리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란다.

그리스 사람은 아니었지만 '1358', 그에게는 음식 뿐 아니라 여성 또한 매한가지였다. 어떤 달콤한 혀로 집주인 오마에를 꾀었는지 다음날 아침 둘 사이가 심상치 않다. 심상치 않은 게 아니다.

누가 묻지 않아도 그냥 안다. 동종(同種)이라면 미묘하게 느낄 수 있는, 막 짝짓기를 마친 수컷과 암컷 사이라는 일종의 확신이 물안개처럼 스멀스멀 퍼지고 있다는 것이다.

감독 마이클 카코야니스 1964년 영화 <희랍인 조르바>에서 조르바(앤서니 퀸)는 자유롭고 정열적인 사내의 전형으로 나온다. ⓒ 영화 <희랍인 조르바>

"저희는 떠나겠습니다. 남은 분들은 어떻게 하실지 각자 결정하시고요."

요시다가 인사를 건넨다. 오마에 차를 빌려 타고, 가네다는 읍내에 나가 렌터카 1대를 끌고 왔다. 친구 이름과 함께 미리 외워 둔 일본 주민등록번호격인 '마이넘버'를 넣었더니 간단하게 해결됐다.

선불 3만엔은 '1358'이 전해준 돈으로 충당했다. 요시다, 가네다와 함께 세 명이 더 따라붙어 모두 5명이 도쿄행을 결정했다. 나머지 2명, 돗토리 동향 사람은 나뉘어 떠나기로 했다. 다만 '1358'은 그곳 도치기 여주인 오마에 카라 집에 남아 있기로 했다.

"무사히 도쿄로 돌아가길 바라겠네. 가서 동북수용소 실태를 까발려야 돼. 우리 같은 사람이 또 생기면 안 되잖아."

'1358'은 진심을 담아 가네다들에게 전한다. 신기하게 그 옆엔 오마에 카라가 바싹 붙어 예전부터 사귀어 온 애인처럼 군다. 그저 귀엽기만 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여자다. 푸름을 멈춘 나뭇잎이 빛바랜다. 한낮에는 아직 무덥지만, 가을이 짙어가는 날 떠날 사람은 떠나고 남을 사람은 남는다.

운전하는 가네다는 눈을 부릅뜨고 있다. 나머지 네 명도 한시나마 긴장을 놓을 수가 없다. 언제 어디서 검문이 들어올지 모른다. 아니 심하면 무장 병력을 만날 수도 있다. 수용소 탈출에다가 총까지 빼앗아 온 수감자들에게 벌써 발포명령이 내려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도치키를 거의 벗어났다. 일단 사이타마현까지는 무사히 가야 한다. 거기서 공동체본부 사람들과 만나기로 했다. 그때까지라도 아무 일이 없기만을 바라는 게 모두의 심정이다. 그러나 도망자들 바람은 꼭 어그러진다.

꼭 경찰들이 음주운전 단속하듯 크게 돌아나가는 언덕길 끄트머리에 군복에 총을 든 헌병들이 차량 검문을 하고 있다. 순간적으로 가네다는 차를 돌릴 뻔했다. 차를 되돌려서 달아나려고 했다는 것이다.

요시다가 말린다. 검문을 보고 도망치면, 금세 걸릴 것은 자명하다. 잘못된 일 없듯이 무조건 뚫고 나가야 한다. 그래야 사이타마현에도 갈 수 있고, 동료들도 만날 수 있다.

"어디서 오시는 길입니까? 그리고 도착지는 어딥니까?"

"아, 아키타에서 오는 길입니다. 사이타마현까지 갑니다."

육상자위대원은 신분을 확인한다. 미리 신분증까지 준비한 사항이라 거리낄 것이 없다. 잠시 무전이 있다. 아무 일 없다는 듯 자위대원은 경례를 붙인다.

리어 미러로 검문하는 자위대원이 멀어진다. 모두 겨우 안도의 한숨을 쉰다.

"거 봐. 그냥 부딪히면 되잖아. 겁먹을 필요가 없어."

가장 소심하게 긴장했던 요시다가 운전하는 가네다에게 건넨 말이다. 가네다는 속으로 피식 웃는다. 다행은 다행이다. 무장병력 검문을, 관문이라면 관문을 온전하게 통과했다. 가네다는 날카로워 진 신경을 다스리는 듯 가속 페달을 힘껏 밟았다. 그 현장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작은 길은 사라지고, 도호쿠고속도로를 만났다. 이제 이 길로 30분만 가면 사이타마현이다. 조금 비좁을 것 같기도 했지만 5명 사내들은 기분이 달떴다.

"그대로 직진! 누가 우리를 막을 쏘냐! 우리 앞에 장애물은 없다!"

요시다가 마음껏 외쳐본다. 후쿠시마에서 탈출해 며칠을 헤매다 이제 도쿄로 들어설 수 있는 그 기분이 가득 담겨진 목소리다. 차창문을 활짝 열고, 있는 대로 모든 바람을 맞는다. 이게 바로 자유의 바람인가 보다. 이 바람을 통해 동북수용소의 존재와 강제 수감돼 있는 사람들 얘기를 모두 실어서 전국에 알리리라. 요시다와 가네다는 동시에 염원한다.

공사 중인가? 갑자기 차선이 줄어든다. 가네다는 속도를 줄인다. 계속 점점 줄어든 차선 막바지다. 커다란 철제 바리케이드로 길이 막혔다. 가네다는 급히 차를 돌리려 한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온통 암녹색 뿐이다. 완전 무장을 한 수십 명 자위대원들이 총을 겨눈다. 되돌아 갈 길에는 톱니모양 주행저지선이 깔려진다. 이내 찢어지는 금속성과 함께 확성기가 시끄럽다.

"너희들은 포위됐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도대체 어쩌다가 이런 상황이 됐는지 알 수 없다. 지금은 잡힐 것이냐 달아날 것이냐를 결정해야 한다. 하늘에는 몇 대인지 굉음을 내며 헬리콥터까지 낮게 날아다니고 있다.

가네다에게 섬광처럼 스친다. 첫 번째 검문 당할 때 당국에서는 가네다 일행이 탈주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넓은 곳으로 유인했다. 그렇다면 광활한 곳으로 꾀어내서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순식간이다. 성마른 겐이치가 총을 든다.

"나는 잡힐 수 없어. 다시 돌아가서 방사능 처리하는 데 끌려다니느니 죽는 게 나아."

차 밖으로 뛰쳐나가서 저들에게 총질이라도 하고 죽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길길이 날뛰는 그는 더 엄혹한, 겨냥된 총구 앞에 무릎 꿇는다. 요시다는 결정한다. 일단 사상을 펴기 위해 항복하는 게 낫다는 판단이다.

"투항하겠다. 자위대원들을 물려 달라."

"전 대원 10보 후퇴! 10보 물러나라!"

자연스럽게 가네다들이 가지고 있던 M16 소총 3자루는 모아진다. 그리고 운전했던 가네다부터 요시다, 겐이치, 다카하시, 히노루가 차례로 차에서 내린다. 모두 머리에 손을 얹고, 나란히 무릎 꿇는다.

장교로 보이는 한 사내가 가네다들이 다른 무장은 없는지 확인한다. 완전한 무장해제를 확인한 장교는 대원들을 부른다. 가네다 일당을 한꺼번에 체포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체포는 없었다.

"슉! 슉! 슈슉! 슉! 슉! 슈슉!"

'사일렌서'라고 불리는 소음기를 통해 나는 소총 소리가 빗발친다. 마치 요인암살이라도 하듯 무릎 꿇고 있던 가네다 일행에게 총탄은 비수처럼 박힌다. 모두 양미간 사이 이마 한 가운데를 꿰뚫고는 골수를 사방에 쏟아낸다. 다른 한발은 여지없이 심장을 관통해 죽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피비린내가 자욱하다.

"사격 중지, 누구야! 어떤 놈이 사격한 거야! 저들은 항복한 사람들이야!"

장교의 외침은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다만 죽음만 남았을 뿐이다. 가네다와 요시다를 포함해 생존자는 없다. 모두 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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