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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경궁 경춘전(좌)과 환경전(우). 혜경궁 홍 씨는 경춘전에서 한중록을 썼고, 의녀 장금은 환경전에서 중종을 치료했다. 두 건물 역시 화재로 전소되었던 것을 순조 34년(1834)에 중건했다.
 창경궁 경춘전(좌)과 환경전(우). 혜경궁 홍 씨는 경춘전에서 한중록을 썼고, 의녀 장금은 환경전에서 중종을 치료했다. 두 건물 역시 화재로 전소되었던 것을 순조 34년(1834)에 중건했다.
ⓒ 최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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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공간에서 좌우대립이 극심하고 이런 현상은 문화계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측면에서 가장 극심했다. 군정청 편찬과장을 사임하고 서울대 문리대 교수로 자리잡은 가람은 학교 수업에 충실하면서 이제까지 해왔던 한글·역사·문화 분야의 강의와 저술활동에 열정을 쏟았다.

1947년 6월에 우리 고전 <한중록(閑中錄)>을 백양당에서 출간했다. 혜경궁 홍씨의 작품을 주해하여 펴낸 것이다. 조선 22대 왕 정조의 생모인 혜경궁 홍씨가 1795년(정조 19)에 쓰기 시작한 작품이다.

그는 이 책의 <해설>의 서두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이조 오백년 동안 가장 오래 수하시고 용상에 계오시던 임금으로는 영조대왕이다. 그 동궁 때부터 일생을 두고 놀라운 파란이 많은 가운데 가장 놀랍고 무서운 비참은 그 사랑스러운 세자를 뒤주에 넣어 궁정 한 옆에 내처 두고 이래를 굶기고 홀로 띄워 죽이고 사도세자라 일컫는 일이다.

사도세자는 영조대왕의 둘째 아드님과 영빈 이씨의 기출로서 영조 11년 창경궁 집복헌에서 납자 오시여 세자책봉이 되고 8세에 입학하고 9세에 약관을 당하고 15세에 대리를 보고 28세 되든 해 형조판서 윤로의 후종 나경언의 고변으로 드디어 죄인이 된 것이다. 이 사실이 실록, 기타 기록에 많이 적히어 그 시비와 곡직이 분분하지만 이 한중록처럼 절실한 기록이 없을 것이다.(…)

이 글월은 그저 만필로만 볼 것이 아니고 한 어떠한 작품으로도 보암즉하다. 여느 역사소설보다도 좋고 그 절실한 맛은 이를 것도 없고 그 침울반복한 정경은 우리 인생의 일면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주석 1)

가람이 이 시기에 <한중록>을 주해하여 펴낸 뜻을 헤아리기 쉽지 않다. 해방정국의 혼란기에 일어나는 각종 정치적 음모와 책략을 경계하고자 한 것인지, 그 즈음에 준비했던 원고가 완성되어서 간행한 것인지.

국립 서울대학 교수가 되어 국문학 개설과 시조론을 가르치고, 이충무공 순국 350주년기념 좌담회, 사육신묘보존회 등 민족문화사업에 열정을 바쳤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12월에는 선친이 돌아가셨다.

1949년 그는 엉뚱한 사건으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정부 수립을 전후하여 정당과 사회단체 등에서 그를 손짓하는 곳이 적지 않았다. 왜정시대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신조를 지켜온 명성을 이용하고자 하는, 일부 단체들이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발기인이나 성명서에 이름을 넣었다.

좌익문인 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에서 고전분과위원장으로 이름을 올렸다. 도용당한 것이다. 이로 인해 적잖은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와 관련 그는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7월 7일(목).
11시쯤 수도청 사찰과 사찰 제3계 김호익 외 4, 5인이 와, 내가 이왕 문학가동맹 위원장인 걸 힐문한다. 나는 가맹도 않고 한 번도 그 소임으로 출석한 일이 없었다 하고 휴지 뭉텅이를 꺼내 그 증거 서류를 찾았으나 얼른 보이지 않는다. 다만 문학가동맹서 출석해 달라고 그 회관 있는 곳을 그림까지 그려 보낸 편지 2장을 서원이 가지고 가며, 내일 좀 와 달라고 한다.

그후 촛불 아래서 자세히 뒤적이니 증거 서류 3편이 나온다.

제1은 1946년 1월 20일 조선문학가동맹 전국문학자대회 준비위원회서 1946년 2월 8일, 9일 양일간 종로청년회관에서 전국문학자대회를 개최하겠으니 참가하여 달라고 동봉한 가맹신청서를 제출해 달라는 편지의 가맹신청서가 그대로 있는 것이요.

제2는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회 서기국의 가맹신청서 제출에 관한 건이라 하고 귀하의 가맹신청서 미비로 인쇄에 회부치 못하고 있사오니 동봉신청서에 서명 날인하여 3월 15일까지 제출하라는 것과 기일까지 제출치 아니하실 때에는 가맹을 거부하시는 것으로 알고 처리하겠다는 가맹 독촉하는 편지가 또 그대로 있는 것이요.

제3은 1946년 3월 5일 전조선문필가협회 결성 준비위원회서 3월 13일 종로청년회관에서 전조선문필가협회를 창립하겠다는 엽서 청첩과 결성대회 취지서와 그 취지서의 결성준비위원엔 내 이름도 있는 것이다. 나는 그때 문필가협회 가입함은 서명 날인한 일은 있으나 문학가동맹엔 가맹을 않았으므로 일체 그 의무와 책임을 이행할 것이 없었다.

이 뿐더러 이 전후 내게는 알리지도 않고 무슨 단체 또는 개인으로서 내 이름을 팔아 쓰기를 종종 한다. 그러나 나는 그걸 일일이 석명도 아니 하였다. 퍽 귀찮은 일이다.

7월 8일(금).
수도청에 김호익을 찾아갔다. ……문학가동맹에 가맹치 않은 증거서류를 다 내보였다. 더 미안타 하고 경찰신문과 잡지에 애국정신을 고취하는 글을 많이 써달라고 한다. (주석 2)


주석
1> 이병기, <한중록>, <해설>, 백양당, 1947.
2> 최승범, 앞의 책, 58~59쪽, 재인용.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조문학의 큰별 가람 이병기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이병기평전#이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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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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