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9.23 11:53최종 업데이트 24.09.23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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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들도 희년 정신에 따라서 토지제도를 운영하는 것이 옳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사진은 서울시내의 모습 ⓒ 픽사베이


구약성서 레위기 25장에는 희년(Jubilee) 규정이 담겨 있다. 7년 주기의 안식년을 7번 지내고 맞이하는 해를 가리킨다. 50년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 희년이 되면, 모든 사람은 자기 가족이 처음에 분배받아 보유했던(그러나 불가피한 사정으로 매각하거나 방치했던) 자기 땅을 무조건 회복한다.

그와 더불어, 가난해져서 다른 가족의 머슴이 되었던 사람들도 희년의 나팔이 불리면 무조건 자기 가족에게 돌아간다. 사람들이 희년을 '자유와 해방의 해'라고 부르는 까닭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평등했던 사회상태가 점차 불평등해지더라도 50년째에는 원래의 상태로 완전히 리셋된다.

현대사회에 적용해야 할 희년 정신

레위기를 제외하고도 구약성서는 곳곳에서 모든 사람이 토지에 대한 권리(토지권)를 평등하게 누려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실제로 고대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 그 땅을 지파별·가족별로 균등하게 분배했고, 그렇게 성취된 평등한 토지분배 상태를 영구히 지속해야 할 의무를 지고 있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의무를 저버리고 토지 겸병(둘 이상의 것을 하나로 합치어 가짐)에 몰두했을 때 예언자들이 등장해 지주들을 맹렬하게 비난했고 그들의 행위가 국가 멸망을 가져올 것이라고 예고했다.

오래전 중동 지역의 조그만 민족에게 적용되었던 낡아빠진 규례가 복잡한 경제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현대인들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생각하기 쉽지만, 여기에는 현대사회에도 적용되어야 하는 중대한 원리가 들어 있다는 데 유의해야 한다. 그것은 평등지권(平等地權)의 원리, 즉 국가가 모든 사람에게 토지와 자연자원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평등지권을 말하면 사회주의 사회를 연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 원리는 사회주의와는 크게 다르다. 노력과 비용을 들여 만드는 생산물은 만든 사람에게 절대적·배타적 권리를 보장하는 사유재산제와 아무 모순 없이 결합되기 때문이다. 한국의 대표적 조지스트(Georgist: 19세기 후반에 활동했던 미국의 경제학자 헨리 조지를 따르는 사람)인 김윤상 경북대 명예교수는 두 원리가 결합한 사회를 사회주의와 구별하여 지공주의(地公主義) 사회라고 부른다.

생산물과는 달리, 토지와 자연자원에 대해서는 왜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권리를 보장해야 할까. 우선, 토지와 자연자원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 누구도 토지와 자연자원을 만들지 않았고 앞으로 만들 수도 없다. 마지막으로, 토지와 자연자원이 자산이 되면 가치를 갖는데 그것은 소유자가 아니라 사회와 국가가 만든다. 그러므로 고대 이스라엘 민족과 마찬가지로, 현대인들도 희년 정신에 따라 토지제도를 운영하는 것이 옳다(토지와 같은 성질을 갖는 자연자원과 환경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인류는 토지에 사적 소유권을 인정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자연자원과 환경은 아직도 사유제 적용의 범위 밖에 놓여있는 부분이 많지만, 세계 곳곳에서 자연자원을 사유화하고 환경을 독점적으로 이용하려고 열을 올리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런 상태를 유지하기는 어렵다고 봐야 한다.

토지와 자연자원의 사유화가 초래한 비극

지난 2021년 12월 11일 오후 창원 성산아트홀 건너편 도로에서 열린 경남민중대회의 모습. ⓒ 윤성효


천부자원으로 주어진 토지와 자연자원을 개인이 사유화해서 독점적으로 사용하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생산과 생활을 위해 토지와 자연자원이 꼭 필요하지만 권리는 없는 사람들은 소유자들에게 사용의 대가, 즉 지대를 납부해야만 한다. 경제가 성장하고 사회가 발달하면 토지와 자연자원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그에 따라 지대도 증가한다. 토지와 자연자원의 자산가치 또한 상승한다. 따라서 토지와 자연자원의 소유자들은 아무런 노력과 희생도 하지 않으면서 불로소득을 얻게 되는데, 그 불로소득은 날로 증가하기 마련이다.

토지와 자연자원의 소유자들이 얻는 불로소득은 어디에서 올까. 그것은 토지와 자연자원에 대한 권리를 누리지 못하면서도 생산을 통해 부를 창출하는 다수의 대중에게서 추출(extract)된다. 부가 추출되는 경로는 다양하다. 토지와 자연자원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부담하는 비싼 임대료, 높은 집값, 비싼 이자, 만만찮은 유틸리티 비용 등을 생각해보라. 앤드류 세이어(Andrew Sayer)의 책 <불로소득 시대 부자들의 정체>(여문책)에 따르면, 1980년대 이후 여러 선진국에서 확인되는 불평등 확대의 배경에는 불로소득 증가가 자리하고 있다. 결과는 금융 위기와 기후 위기가 동시에 진행되는 이중 위기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당연히 정립했어야 할 간단한 사회구성 원리 하나를 무시한 대가가 막대함을 알 수 있다. 영국과 미국 등도 그렇지만, 대한민국은 이 원리를 무시한 정도가 유독 심하다.

토지공개념 정신을 헌법에 담고 있음에도 토지와 부동산을 마음껏 끌어모아 거기서 불로소득을 얻으려는 행위를 사실상 방치해왔다. 그 결과 주기적으로 부동산 투기가 발발했고, 땅값과 부동산값은 선진국 최고 수준으로 올라갔다. 토지와 부동산의 집중 정도는 엄청나게 높아졌고, 토지와 부동산을 집중한 소수의 부자들은 투기 광풍이 불 때마다 엄청난 불로소득을 챙겼다.

불평등과 지역적 양극화, 가계부채 폭증, 기업의 지대추구 경향, 임대료 상승으로 인한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낙후 지역에 창의적인 사람이 들어와 활기를 불어넣고 나면 가게 주인들이 임대료를 올려서 활성화의 주역들이 밀려나는 현상), 거시경제 불안정성 증폭, 부동산 관련 공기업 직원들과 관료들의 부정부패 등은 모두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세금으로 평등한 토지권과 자연권을 보장해야

세계 지도속의 한국. 이러다가는 한국이 지도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 ⓒ 위키미디어 공용


대증적 해법이나 이기심에 부응하는 방안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진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기본 원리를 바로 세워야 한다.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토지권과 자연권을 보장할 수 있도록 제도와 법률을 만들거나 고쳐야 한다.

여기서 세금은 압도적인 중요성을 가진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미 사유화된 토지와 자연자원을 몰수해서 모든 국민에게 똑같이 나눠주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조세 제도를 활용하면 의외로 쉽게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토지와 자연자원(그리고 환경 사용)에서 발생하는 불로소득을 세금으로 환수해서 토지권과 자연권을 과다행사하는 행위를 저지하고, 거기서 생기는 세수로 그 권리들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똑같이 나눠 지급하면 된다.

이것은 평등한 토지권과 자연권을 보장하는 현대적 방법이다. 사실, 이 방법은 10여 년 전부터 우리 사회에서 다양한 형태로 제출되어 온 정책 대안이다. 공유부 기본소득, 기본소득 연계형 국토보유세, 기본소득 연계형 탄소세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합계출산율이 0.7대로 떨어지고 결혼 기피 경향이 완연하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 절망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음을 방증한다. 이러다가는 대한민국이 세계지도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간단한 원리 하나를 방기하면, 무시무시한 결과가 초래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대한민국 자본주의가 이처럼 심각한 상태에 놓였음에도 지금 한국의 정치권은 한가하기 이를 데 없다. 정부 여당은 법인세·종부세·상속세 등을 줄여서 부자들의 세금 부담을 덜어주느라고 여념이 없고, 앞장서서 이를 저지해야 할 더불어민주당은 대권 플랜 운운하며 중산층의 마음을 잡는다는 핑계로 정부 여당에 맞장구치느라고 정신이 없다. 꼭 그렇게 해야 정권교체에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인가. 더불어민주당의 정무적 판단이 도대체 어떤 정치학에서 나왔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조국혁신당과 사회민주당 등 소수 정당이 거대 양당의 감세 경쟁에 반대해서 약간의 희망을 안겨주지만, 현실적으로 그들이 얼마나 힘을 발휘할지 알 수가 없다. 위기의 시대에 원인을 정확히 진단해 국민에게 설명하고 국민과 함께 위기 극복에 나서는 유력 정치인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은 참으로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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