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9.16 10:54최종 업데이트 24.09.16 10:54
  • 본문듣기
사수만보는 '사진과 수필로 쓰는 만인보'의 줄임말입니다.[편집자말]
- ①편 <자기 얼굴에 총 4발 쐈다니... 두황이가 초인인가요?>(https://omn.kr/2a6dt)에서 이어집니다

나와 두황이는 3월 18일 성북서 정보과에서 몇 장의 서류에 서명하고 병무청 직원 한 명, 성북서 직원 2명과 승합차에 타고 강원도 춘성군의 103 보충대로 갔어요. "키는 얼마야, 몸무게는? 아픈 데 없지?" 이렇게 묻더니 신체 검사가 끝나더군요. 그리고 다음 날 3월 19일 삼척에 있는 68훈련단으로 갔어요. 6주간 훈련을 마치고 우리는 22사단 55연대에 배치되었고 나는 3대대, 두황이는 2대대가 되었어요. 연대본부가 있는 고성군 거진읍 반암리까지는 같이 갔죠. 우리의 마지막 동행이었어요.

1980년 겨레사랑연구회에서 만나 1983년 학회회장단 연합모임을 만들어 고대 학생운동을 한 단계 끌어올리려 한 두 사람은 여기서 영원한 작별을 하게 된다. 민간인통제선의 동쪽 맨 끝인 9검문소를 지나 김두황은 해안선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고 양창욱은 서쪽 방향의 산악 지대로 가야 했다. 둘은 이틀간 연대 보안반에서 조사를 받았고 양창욱이 5월 3일 3대대의 부식 차를 타고 출발하기 전 잠깐 만날 짬이 있었다. 둘은 연병장 한 귀퉁이에서 5월의 하늘을 바라보며 담배를 나눠 피웠다. 김두황이 "창욱아, 너 잘하는 '나는 돌아가리라' 한번 불러봐라, 갑자기 듣고 싶네" 하니 양창욱은 "너가 원한다면 못 할 것도 없지"하며 호흡을 가다듬고 첫 소절을 뽑았다.

나는 돌아가리라/쓸쓸한 바닷가로
그곳에 작은 집을 짓고/돌담 쌓으면
영원한 행복이 찾아오리라/내 가난한 마음속에 찾아오리라

양희은의 이 노래가 김두황이 들은 양창욱의 마지막 음성이었다. 김두황은 양창욱을 3대대로 떠나보내며 그의 호주머니에 청자 한 갑과 단팥빵 한 개를 넣어주었다.

내가 두황이의 죽음을 알게 된 것은 6월 19일이었어요. 부대 이발병이 소식을 알려주더군요. 온몸에 소름이 돋고 가슴이 꽉 막혀왔어요. 언젠가 위험이 닥치리라 생각했으나 이렇게 빨리, 이렇게 최악의 형태로 다가올지는 상상도 못 했어요. 화는 몰려온다고 두황이가 떠난 뒤 아버님이 1년 만에 돌아가시고 어머님도 곧 아버지를 따라가셨어요. 그뿐인가요. 친구 선모도 시간이 많이 흐른 뒤지만 평생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다가 세상을 등졌지요.

김두황의 주검은 6월 20일 고성의 간이 화장장에서 불살라져 유골함에 담겼다. 그의 형 김두원은 서울에 도착해 가족이 기다리는 서울 서대문 백련사로 향했다. 약사전 앞에서 기다리던 어머니는 유골을 보자 쓰러졌고 아버지는 땅을 치며 울었다. 사십구재를 마친 후 가족과 친구들은 백련산에 올라 하늘을 바라보며 유골을 뿌렸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북한산 옥천암을 향해, 형제들은 두황이가 태어난 마포를 바라보며, 친구들은 고대가 있는 안암동 쪽을 향해. 그렇게 23살의 꽃 같은 청춘은 멀리 떠나갔다. 그런데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버지와 함께 찍은 김두황의 모습. 얼마 남아 있지 않은 가족 사진이다. ⓒ 김두황추모사업회 제공


김두황이 죽은 뒤 1년 남짓 지났을 때 김두황의 부친은 집안에서 창밖을 보고 계시다가 허깨비처럼 쓰러졌다. 병원으로 옮겼으나 보름 정도 누워있다가 유언 한 마디 못하고 눈을 감았다. 당신의 나이 72세 때였다. 이어서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김두원은 이렇게 기억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는 하루 종일 막내 아들 사진만 쳐다보고 계셨다. 저러다 어머니마저 잘못될까 싶어서 두황이의 사진을 모두 치웠다. 어머니는 점점 말을 잃어가셨다. 큰형이 어머니를 청주에 모시고 계셨는데 두황이의 기일에 맞춰 서울에 모시고 가려고 채비하던 중이었다. 목욕탕에 들어가신 어머니가 나오지 않아 들어가 보니 어머니는 구석에 웅크린 모습으로 숨이 멎어 있었다."

김두황의 어머니는 막내 아들 사진을 볼 수 없게 되자 머릿속에 있는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서툴렀으나 점차 김두황의 모습을 닮아갔다. 또 어머니는 "내 가슴에 이 상처를 그 누가 알아주나. 그리움에 타는 마음 혼자 달래고 혼자 울면서 지새울 때…" 라는 일기를 되풀이해 써갔다. 다른 자식 앞에서는 슬픈 내색을 안 하시던 어머니가 매일 밤 글로 비통함을 적은 것이다.

김두황을 먹잇감으로 삼은 보안사

내가 5월 3일 자대로 가고 두황이가 이틀 동안 연대 보안반에서 어떤 조사를 받았는지 알 수 없어요. 자대에 배치되고 6월 18일까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도 알 수 없죠. 두황이는 성북서의 고문을 이겨내며 81학번 예비 지도부에 대해선 어떤 실마리도 건네지 않았어요. 어쩌면 보안사는 이것을 노렸을지도 몰라요.

김두황이 자살을 준비한 정황이나 조짐은 없었다. 낙천적 성격이기도 한 그는 주어진 환경에 최대한 적응하려고 노력했다. 4월 30일 신병 훈련을 마쳤을 때 김두황은 훈련 성적이 우수해 보병 제68훈련단장 문금주 준장으로부터 1등 상을 받았다. 사건이 일어나기 열흘 전인 6월 8일경에 김두황은 양창욱에게 편지를 보내 연대본부에서 했던 다짐대로 "웅변대회에 참가해서 특별 휴가를 얻어 나가자"라고 독려한다. 이 편지를 받고 고무된 양창욱은 연대 웅변대회에서 우승을 거둬 실제 포상휴가를 받는다. 그렇다면 갑작스러운 두황의 죽음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

훈련소 동기로서 두황과 자주 만났던 황 이등병은 의문사 진상 제1기 조사위에 나와 김두황이 했던 말을 진술했다. "보안부대 관계자로부터 입대 전 학생운동에 참여하던 동료들의 명단을 요구받았다. 하지만 주지 않았다."라고.

황 이등병의 말대로 보안사는 고려대 학생운동의 중심 노릇을 한 김두황을 주목하고 그의 진술을 탐냈다. 성북서의 이강수 형사는 고대 80학번 김희근에게 "김두황에 대해 더 조사할 것이 있지만 그냥 보충대로 떠나보냈다"라며 '아쉬워'했다라고 한다. 아바타방 사건을 수사하던 서울시경은 1983년 봄 문건 작성자를 여섯 명으로 압축하고 이 중 일부가 강제 징집된 것으로 파악을 했다. 서울시경은 이 정보를 보안사에게 건네주었을 테다. 보안사로서는 고려대 예비 지도부를 캐내고 '아방타방' 집필자를 찾기 위해서 김두황을 탐나는 먹잇감으로 바라보았음이 틀림없다.

당시 22사단 헌병대 송 조사계장은 이를 뒷받침하는 증언을 한다. 그는 2008년 1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 출석해 "김두황이 자대에 전입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보안대에 연행되어 학생운동 당시 사건들에 대한 조사를 여러 차례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이는 김두황의 지휘 계통인 중대장이나 대대장에게 들었다"라고 말했다.

22사단 55연대 보안반장이 의문사위에서 한 진술은 더 구체적이다. "특수 학적 변동자에게 수신되는 서신은 보안반 관계자에 의해 검열되었다. 또 해당 사병이 발송하는 서신은 소속 부대 간부들에 의해 사전 검열되었다. 또 보안반 담당관이 소속 부대에 은밀히 활용하는 망원들에 의해 동향이 수집되고, 소속 부대 중대장을 통해 한두 달에 한 차례씩 동향에 대해 정보를 수집했다"라는 보안반장의 증언에 비추어 보면 김두황은 혹독한 감시 상황에 놓였을 게다.

내게도 보안사의 손길이 뻗어왔어요. 9월에 특별휴가라면서 22사단에서 보안사 과천분실로 끌고 가더군요. 심사 장교 권 00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너가 여기 온 것은 아무도 몰라. 말 듣지 않으면 쥐도 새로 모르게 죽여서 월북 기도하다 죽었다고 철책에 버려놓으면 끝이야"라고 협박했어요. 여러 날 동안 가둬 두고 자술서를 쓰게 했어요. 쓰고 또 쓰고 완전히 발가벗겨졌죠. 마지막에 태극기 앞에서 서약을 시켰습니다. 거부할 방법이 없었죠. 심사를 마치고 내가 그들의 입맛에 맞게 개조되었다고 판단했는지 충무로 진양분실로 보내더군요. 거기서 고대생을 담당한 박준현이 세 가지 과제를 주었어요. 그중 하나가 겨레사랑회,사회학회,학회장단 모임의 체계도를 보여주면서 이 도표상에 나온 사람의 현황을 파악해 오라는 지시였어요.

양창욱이 과천분실에 불려갔을 때 그는 김두황의 죽음으로 여전히 충격 상태였다. 보안사는 양창욱과 김두황이 단짝임을 알면서도 그에 대한 녹화공작에 착수했다. 사실 양창욱에겐 김두황의 죽음 이전에 더 큰 아픔이 있었다. 입대한 지 보름도 안 돼 양창욱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다. 양창욱이 군에 끌려가고 입었던 옷이 집으로 배달되자 양창욱의 아버지는 몇 날 며칠을 울었다. 자신이 마포경찰서 정보과장을 지냈던 터라 이 험한 시국에서도 자기 아들은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들이 끌려가자 몸과 마음이 허물어졌다. 결국 그는 갑작스레 세상을 뜨고 말았다. 양창욱은 자대 배치 후 불과 열흘 만에 접한 아버지의 소식에 안타까움과 죄스러움을 금할 수 없었다. 불과 두세 달 사이에 양창욱은 큰 슬픔을 겪은 처지였으나 보안사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프락치로 활동하라고 강요한 것이다.

두황의 죽음은 밀알이 되었어요. 그는 고대 학생운동의 조직 노선을 학회 중심의 대중 노선으로 바꿔내고 81학번 예비 지도부를 비밀리에 키웠죠. 80년대 고대 학생운동은 두황이를 빼고 설명할 수 없어요. 그는 죽어서도 밀알이 되었죠.

1984년 4월 17일에 열린 김두황 추모식. 이날 추모식 후 격렬한 교문 돌파 투쟁이 있었다. ⓒ 김두황추모사업회 제공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친구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제일교회에서 두황과 함께 공부하던 송진휴는 "백련사 장례식에서 너무 많이 울었어요. 눈이 퉁퉁 부을 정도였지요"라고 회고한다. 김두황의 경제학과 동기 손학붕은 1983년 5월 대동제 시위로 서대문구치소에 수감 중에 이 소식을 들었다. 그는 "면회 시간에 두황이 죽었다는 얘기를 듣고 2사 18방 내 방으로 돌아갈 때 다리가 후들거리고 심장이 쿵쾅거렸다"라고 기억한다.

일반 학생들에게도 이 소식이 전해지며 학내 분위기가 술렁거렸다. 하지만 학내에 '짭새'가 득실거리던 상황에서 공개 추모식을 열 수 없었다. 1983년 12월 전두환이 이른바 '학원 자율화 조치'를 내걸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상주하던 경찰과 보안사, 안기부 등 여러 기관이 학내에서 철수하면서 학내 분위기에 숨통이 트였다. 대학마다 이름이 조금씩 다르지만 '자율화추진위원회'를 만들고 총학생회 부활을 모색했다.

'고려대 자율화추진위원회'는 1984년 4월 13일 창립식을 하고 4월 17일 '고 김두황 학우 추모식'을 연다. 2천 명의 학생이 민주광장에 모여 김두황이 평소에 했던 "바보 같은 사람이 운동을 하는 것이다. 역사의 물줄기에 보태는 물방울 하나면 된다"라는 말을 되새기며 그의 영혼을 기렸다. 추모식이 끝나자 '싸우자'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김두황의 영정과 관을 앞세우고 교내 행진에 이어 교문을 돌파해 대오는 지금의 제기동 사거리까지 진출했다. "김두황은 타살됐다. 진상을 규명하라", "강제징집 철폐하라, 녹화 공작 중단하라"라고 외치며 최루탄을 난사하는 경찰과 맞섰다. 이날의 시위는 고대 학생운동에서 서울의 봄 이후 최대의 시위이고 제기동 고개까지 진출한 유일한 시위였다. 또 강제징집과 녹화공작으로 발생한 군 의문사 문제를 부각하는 계기가 되었으니 김두황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밀알 노릇을 한 셈이다.

가장 뜨거운 시간에 진화위 앞에 서는 이유

고대 민주광장에 있는 김두황 추모비 왼쪽이 김두황의 추모비고 오른쪽은 강제징집으로 숨진 6명의 넋을 기리는 진혼비다. ⓒ 민병래


2018년 저는 새 인생을 시작했어요. 뇌출혈로 죽음 문턱까지 갔다가 돌아왔어요. 덤으로 살게 된 남은 삶을 두황이를 위해서, 죽음의 진실을 밝히는 데 쏟기로 했어요.

양창욱은 제대 후 복학하지 않고 곧바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고려대 선배인 노회찬과 함께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을 만들고 '백기완대통령선거운동본부' 일과 '민중의 당' 활동을 했다. 현실 사회주의 몰락 후 그는 1998년 노동 현장을 나와 협동조합 운동에 뛰어들었고, 40대에 들어서는 학원을 운영했다.

그러다 겪은 뇌출혈. 아내와 밥을 먹던 중에 일어난 사고여서 응급 대처가 가능했다. 깨어난 날 그의 눈 앞에 또렷하게 떠오른 게 친구 김두황의 얼굴이었다. 그는 후유증으로 약간의 언어 장애를 갖게 되었으나 자기 남은 삶을 김두황 죽음의 진실을 밝히는 데 쏟기로 했다. 2000년부터 18년 동안 회장을 맡고 있던 김두황추모사업회 일을 제대로 꾸리기로 했다. 그는 먼저 "김두황 열사를 기릴 수 있는 상징물을 만들겠다"라는 의지를 밝힌다. 고대 총학생회, 고대민주동문회, 문무대 109인회, 고대민주동문회 국회모임 등이 뜻을 같이했다.

일본군 위안부 소녀상을 조각한 김서경 작가에게 의뢰해 디자인을 뽑았다. 설훈 전 의원이 중재하며 교섭을 지원했으나 학교 측은 흉상이나 부조로 김두황의 모습이 들어가는 형태를 반대했다. 김서경 작가가 다시 음각 형태로 디자인을 제시했으나 이마저도 고대 당국이 난색을 표했다. 결국 빗돌에 자전거를 탄 김두황이 어머니에게 꽃을 바치는 안으로 최종 결정되었다. 김두황의 추모비는 2020년 10월 17일 마침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저는 3년째 고려대 80학번 동기들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어요. 두황이의 형이 오랜 세월 노력했지만 외면 당했어요. 2022년에 제가 대신 나서 진화위 2기에 두황이 사건의 진실 규명을 신청했지요. 3년이 지났으나 아무 진전이 없네요. 진화위는 2025년 5월로 활동이 끝나죠. 이제 시간이 별로 없어요.

진화위 앞에서 김두황 진실규명을 외치는 양창욱 그는 3년째 일인시위를 하고 있다. ⓒ 민병래

진화위 앞에서 일인시위를 하는 김두황의 친구 홍기원 홍기원은 김두황 평전을 2023년에 펴냈다. ⓒ 민병래


김두황의 친구 진창원이 진화위 앞에서 일인 시위를 하고 있다. ⓒ 민병래


김두황의 가족이 "김두황 의문사의 진실을 밝혀달라"고 수십 년간 노력했지만 결실이 없었다. 2000년 발족한 의문사위에서는 보안사가 자료 협조를 거부해 조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진실 규명을 할 수 없다는 판정이 내려졌다. 가족은 2005년 출범한 진화위 1기에 다시 진실 규명 신청을 했으나 여기서도 조사가 부실하자 신청을 취하해 버렸다. 가족은 지칠 대로 지치고 상심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김두황 추모비 설립을 이뤄낸 양창욱은 가족을 대신해 2020년 12월에 출범한 진화위 2기의 문을 두드렸다. 치밀하게 준비해 2022년 진실규명 신청 서류를 접수하고 그다음 날부터 홍기원, 진창원 등 고려대 동기들과 매주 수요일 11시 30분에서 12시 30분까지 한 시간 동안 일인 시위를 했다. 지금까지 3년 동안 한번도 거르지 않고 이어오고 있다. 2024년 여름, 대한민국은 숨이 막힐 정도로 뜨거웠다. 한낮 단 몇 분만 햇볕 아래 있어도 숨이 턱턱 막히고 살이 익어 나간다. 그럼에도 양창욱이 가장 무더운 시간을 택한 것은 김광동 진화위 위원장만이 아니라 진화위의 많은 직원에게 일인 시위의 뜻이 전달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40여 년에 걸친 김두황 가족, 양창욱과 80학번 동기들의 싸움은 빛을 볼 수 있을까? 과연 김두황 의문사의 진실은 규명될 수 있을까?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2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