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7.19 15:05최종 업데이트 24.07.19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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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외교부에서 열린 탈북 관련 타큐멘터리 영화 상영회에서 수미 테리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미국 연방검찰이 수미 테리(Sue Mi Terry) 미국외교협회 선임연구원을 16일 기소하면서 내놓은 공소장은 윤석열 정부의 한일 역사문제 처리 또한 일종의 여론 조성 작업에 기초했음을 보여준다.

뉴욕 남부지검이 작성한 공소장은 중앙정보국(CIA),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등에서 근무한 한국계 미국인인 수미 테리 선임연구원이 한국 정보당국과의 은밀한 커넥션 속에 명품백, 고급 식사, 자금 등을 제공했다고 알려준다. 그러면서 2023년 3월 윤석열 정부의 강제징용문제 처리와 관련해 벌어진 커넥션의 실상을 보여준다.


윤석열 정부는 전범기업들의 강제징용 배상책임을 떠안는 제3자변제 선언을 작년 3월 6일 박진 외교부장관을 통해 발표했다. 이때 외교부 관리는 수미 테리에게 접근해 이 사안에 대한 기고문을 미국 언론에 실어줄 것을 부탁했다. 공소장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2023년 3월 6일경, 피고 수미 테리는 대한민국 외교부 관리(대한민국 관리 3)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전화 뒤에 수미 테리는 대한민국 관리 3에게 대한민국과 일본 간의 지정학적 관계를 담은 기사들을 인용하면서 '이 주제에 관해 작성된 글들이 이미 많다'는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그런 다음, 테리는 '그래서 내가 글을 쓰려면 다음의 정보들이 필요하다'면서 한일관계에 관한 일련의 문제들을 열거했다."

수미 테리가 쓰게 될 글은 단독 기고문이 아니었다. 칼럼니스트 맥스 부트와 공동으로 쓰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기초 자료를 수집하지 않고 이 일을 윤석열 정부에 요청했다. 두 사람과 더불어 윤석열 정부가 함께 쓴 글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대한민국 관리가 보낸 답변과 대체로 일치한" 그 칼럼

공소장은 미국 시각으로 그달 7일 <워싱턴 포스트>에 실린 수미 테리와 맥스 부트의 공동 기고문인 '남한, 일본과의 화해를 위해 용감한 걸음을 내딛다(South Korea Takes a Brave Step Toward Reconciliation with Japan)'를 두고 "이 기사는 대한민국 관리 3이 보낸 답변과 대체로 일치했다"고 평한다. 두 사람 명의로 나간 글이지만, 실상은 윤석열 정부가 보내준 글과 거의 일치했다는 것이다.

공동 기고문은 전문적인 내용을 담은 게 아니었다. 한일 역사문제에 관해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관계를 토대로 윤석열 정권의 용기를 높게 평가하는 글이었다. 이런 기고문이 "대한민국 관리 3"이 보내준 내용과 거의 일치했다는 것은 수미 테리와 맥스 부트가 글의 작성자이기보다는 재가공자나 전달자에 가까웠음을 의미한다.

수미 테리는 기사가 나간 뒤에 "대사님과 국가안보실장님이 당신의 칼럼을 매우 좋아했습니다"라는 감사의 말을 들었다. (관련 기사: "대통령실 안보실장이 당신 칼럼에 행복해했습니다" https://omn.kr/29h9a

수미 테리의 공동 기고문은 2023년 3월 6일 제3자변제 선언 이전의 한일 관계를 "벼랑 끝(brink)"으로 평가했다. 그런 뒤, 윤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총리를 거명하면서 "지난 1년 동안 두 나라는 대규모 국제 행사를 계기로 그들의 지도자들이 세 차례 만나면서 벼랑 끝에서 멀어지려고 애썼다"라고 기술했다. 강제징용 문제의 원칙적 해결을 외면한 채 일본의 요구대로 역사문제를 봉합하는 윤석열 정부의 모습을 '벼랑 끝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으로 호평하는 글이었다.

기고문은 한일관계가 벼랑 끝으로 내몰린 계기를 문재인 정부에서 찾는다. 이 글은 "역사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마지막 주요 시도는 윤의 동료 보수주의자인 박근혜 대통령 때 있었다"라며 "그는 위안부들에게 보상하기 위해 일본과 2015년 합의를 체결했다"고 설명한다. 사과 및 배상 원칙을 배제한 채로 문제를 봉합하는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를 "역사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마지막 주요 시도"로 평가했던 것이다.

기고문은 그 같은 마지막 시도가 문재인 정부 때문에 무산됐다고 지적한다. "진보적인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에 취임하자마자 그 합의를 무산시켰다"고 말한다. 2018년 1월 9일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2015년 위안부 합의는 진정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천명한 일을 환기시키는 대목이다.

문재인 정부의 위안부 합의 파기를 거론한 뒤, 기고문은 2018년에 한국 대법원에서 강제징용 손해배상판결이 나오고 일본이 경제보복을 하면서 양국관계가 악화되는 과정을 설명한다. 이런 벼랑 끝 상황에서 윤석열 정부가 출범해 1년간 노력을 했다는 것이 기고문의 메시지다.

윤 정부의 한일 역사문제 접근, 절차적으로도 문제 있다
 
미 중앙정보국(CIA) 분석관 출신의 영향력 있는 대북 전문가인 수미 테리 미국외교협회(CFR) 선임연구원이 미 당국에 신고하지 않고 한국 정부를 대리한 혐의로 16일(현지시간) 미 연방법원 재판에 넘겨졌다. 미국 뉴욕 남부지검은 이날 공개한 공소장에서 외국대리인등록법(FARA) 위반 혐의로 수미 테리 연구원을 기소했다고 밝혔다. [미 뉴욕 남부지검 공소장 사진 캡처]연합뉴스
 
제3자변제 선언 닷새 전인 지난해 3월 1일, 윤 대통령은 취임 이후의 첫 3·1절 기념사에서 일본을 호평하는 발언을 내놓았다. 그는 일본이 "군국주의 침략자"에서 "협력 파트너"로 변했다며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과 연대하고 협력"하자고 역설했다. 그는 "이것은 104년 전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외친 그 정신과 다르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사실상 일본과 협력하는 것이 3·1운동 정신이라는 어이없는 발언을 내놓았던 것이다.

수미 테리의 기고문은 이 부분에 관해서도 언급했다. 기고문은 윤 대통령의 발언을 용감한 행동으로 봤다. '윤 대통령은 반일감정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는 게 기고문의 평가다. 한국 국민들의 보편적인 역사인식은 물론이고,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20세기 인류의 보편적인 저항 의식을 무시하는 글이었다.

수미 테리는 이런 글을 <워싱턴 포스트>에 실어 윤석열 정부에 힘을 실어주고자 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자발적으로 쓴 글이 아니라는 점이다. 

윤석열 정부의 역사문제 처리는 민심의 호응을 받지 못했다. 미일 정부와 한일 극우세력의 지지를 받았을 뿐이다. 윤석열 정부가 수미 테리에게 글을 청탁한 것은 자신들의 역사문제 처리가 미국 여론과 국제적 전문가들의 지지를 받는 듯한 인상을 조성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기고문은 그런 결과로 만들어진 워싱턴발 용비어천가, 일종의 자화자찬이라고 볼 수 있다. 윤석열 정부의 역사문제 처리가 내용뿐 아니라 절차적으로도 정당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유력한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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