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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산하기구 또는 특별기구 중에 ILO만큼 회원국에 대해 강력한 감시감독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기구는 많지 않습니다."
(질베르 웅보 ILO 사무총장, 9일 한국노총·민주노총 면담 발언 중에서)
지난 3일부터 14일(이하 현지시각)까지 스위스 제네바에서 187개국 노사정 대표단들이 참가한 가운데 제112차 국제노동기구(ILO) 총회가 개최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킨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의 일환으로 설립된 ILO는 100년이 넘는 유구한 역사와 더불어, 전 세계 노동 현안을 다루고 각 회원국의 협약 이행 상황을 점검하는 연례회의를 통해 체계적인 총회 시스템을 확립하고 발전시켜 왔다.
이번 총회는 본회의와 의제별 위원회 병행 방식으로 진행됐다. 본회의에서는 ILO 사무총장이 보고서를 발표했고, 이와 관련해 각국 노사정 대표가 연설을 했으며, 사회정의를 위한 글로벌 연대 관련 고위급 이벤트를 개최했다. 각 위원회에서는 ▲ 프로그램과 예산 ▲ 회원국의 ILO협약 이행 감시·감독 ▲ 생물학적 위험에 관한 협약·권고 ▲ 노동기본권 ▲ 양질의 일자리와 돌봄경제 ▲ 실효성을 상실한 협약 폐기 등을 논의했다.
ILO 총회는 단순한 회의의 의미를 넘어 ILO의 최고 의사결정기구로서, 이사회 및 사무국과 더불어 조직 내 3대 축의 하나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한국노총은 한국이 1991년 12월 9일 152번째 ILO 회원국으로 가입한 이래 매년 한국 노동계를 대표하여 총회에 참가하고 있다.
새로운 사회계약, 그리고 한국의 노동현실
▲ 6일 ILO 총회 본회의장 모습 ⓒ 한국노총
'새로운 사회계약'이라는 주제로 총회의 포문을 연 질베르 웅보 ILO 사무총장은 현재의 세계 노동상황에 대해 '양가감정(ambivalence)'을 느끼고 있음을 알리며 "모든 지역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팬데믹 이전 수준의 경제활동으로 회복이 이뤄졌고,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려는 중앙은행들의 효과적인 노력이 이러한 회복에 기여했다"라고 평가하고, "이런 회복이 노동자들의 구매력 회복으로 이어졌기를 바라고 있다"라고 밝혔다. 이어 그는 "작년 5%에 육박하던 세계 실업률이 2024년과 2025년에는 4.9%로 다소 줄어들 것으로 ILO는 예측하고 있다"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웅보 사무총장이 희망적 메시지만을 전하지는 않았다. 그는 "위기는 계속해서 다가오고 있으며, 희망적인 분위기는 순식간에 뒤바뀔 수 있다"라고 경고하며, "중동의 위기가 특히 심각하고, 가자지구, 예멘, 수단, 아이티, 우크라이나, 콩고 동부 등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주목하여야 한다"라고 역설했다. 이어 "새로운 사회계약을 통해 영구적인 평화, 부의 공유, 기회의 평등, 그리고 정의로운 전환을 이룰 수 있도록 생산적인 토론이 이뤄지기를 희망한다"라고 밝혔다.
한국 노동계를 대표하여 총회 본회의 연설에 나선 김동명 한국노총 위원장은 "웅보 ILO 사무총장이 추구하는 새로운 사회계약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확립되어야 한다"라며 "민주주의는 사회 구성원에 대한 존중을 밑바탕으로 하여야 하나, 현재 윤석열 정부는 친기업 반노동 정책으로 일관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김 위원장은 농성 노동자 유혈 과잉진압, 노조 회계공시에 대한 강제, 노동조합에 대한 지원 축소, 노동시간 유연화를 가장한 장시간 노동정책 시도, 각종 정부위원회의 양대 노총 배제 등을 반 노동정책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사례로 꼽았다. 김 위원장은 "지난 4월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정부여당이 역대급 참패를 기록한 것 역시 지난 2년간 노사관계와 노동시장을 초토화시킨 데 따른 당연한 결과"라며 "정부와 여당이 노사문제를 계층 간 대립구도로 보는 낡은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노총은 이에 앞서 민주노총과 함께 웅보 사무총장을 개별면담하여 근로기준법 5인 미만 적용, 노란봉투법, 최저임금 차별 적용 등 한국의 주요 노동 현안을 설명하고, ILO의 관심을 촉구하기도 했다. 이에 웅보 사무총장은 "작년 ILO 총회와 과거 면담을 통해 한국 상황에 대해 잘 알고 있다"라며 "계속해서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다"라고 답변했다. 참석자들은 ILO 감시감독 기능의 중요성을 언급하며, 그 밖의 외교적 해결 방법 등에 대한 이해와 고충을 함께 나누기도 했다.
돌봄경제 내 양질의 일자리 확보 시급
▲ 한국 노동계 관계자들이 9일 질베르 웅보 ILO 사무총장(가운데)을 면담하고 기념촬영했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필자. ⓒ 한국노총
양질의 일자리와 돌봄경제를 다룬 일반토의위원회는 3가지 부분에 초점을 맞췄다. 첫 번째는 유·무상의 돌봄 서비스가 제공되는 사회·경제·정치적 맥락, 돌봄노동자들의 다양한 유형, 그리고 돌봄경제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들이다. 두 번째는 각 회원국들이 양질의 일자리, 성평등, 보건서비스, 포용적이고 지속가능한 경제·사회 발전을 촉진하는 돌봄경제를 위해 취하고 있는 효율적인 방법과 차이들이다. 마지막으로 돌봄경제에 대한 정책 강화와 투자를 촉진하기 위해 각 회원국이 취해야 할 우선 사항들이다.
위원회는 이를 통해 5가지 결론에 이르렀다. 첫 번째, 활발한 돌봄경제는 각종 위기 상황 극복과 성평등 확립, 각종 차별을 해소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나, 이에 대한 사회별 편차가 지속되고 있다. 이에 돌봄경제 내에서 양질의 일자리 확보를 위한 조치들이 시급히 요구된다.
두 번째, 돌봄경제의 다양한 성격들을 강조했다. 가정 안팎의 보건·교육·사회 영역에서 상당수 노동이 여성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측면에 대해 다뤘다. 가사 노동자, 커뮤니티, 보건 노동자, 사회연대경제의 노동자들에 대해 중점을 뒀다.
세 번째, 위원회의 노사정 위원들은 노동은 상품이 아니라는 필라델피아 선언의 취지에 따라 돌봄 노동도 상품이 아니며, 돌봄노동자들은 양질의 일자리를 누릴 권리가 있고, 돌봄경제에 대한 투자와 이민노동자를 포함한 돌봄노동자 보호 촉진은 사회경제적 발전으로 이어진다는 점에 모두 공감했다.
네 번째, 돌봄정책에서 국가가 취해야 할 중요 역할, 민간 부문과 사회연대경제, 그리고 각 가구의 역할에 대해서도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위원회는 테크놀로지, 인구통계학, 환경 등 변화하는 노동상황을 감안하여 정부, 사용자, 노동자 단체를 위한 권고안을 마련했다.
마지막으로 돌봄 어젠다 발전을 위해 ILO가 연구, 국제통계기준, 실무지원, 정책가이드 등을 통해 글로벌 리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러한 역할이 사회 정의를 위한 글로벌 연합을 통해 이뤄질 때, 양질의 일자리, 지속가능한 발전, 정의로운 전환이 가능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밖에 참가자들은 양질의 일자리는 인권으로 간주해야 하며, 돌봄경제에 있어 감정노동도 고려해야 하고, 정신건강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여야 하며, 청소년·장애인 등에 대한 관심 역시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ILO 총회의 가장 중요한 기구 중 하나인 기준적용위원회는 '변화하는 일의 세계의 노동행정' 보고서를 논의했으며, 2023년 ILO 총회 특별결의에 따라 벨라루스에 요구한 ILO협약 87호(결사의 자유) 및 98호(단결권과 단체교섭권) 이행 상황을 심의하기 위한 특별 세션을 열었고, 24개국의 ILO협약 이행 상황에 대해 심의를 실시했다.
위원회는 노동행정 보고서와 관련해 변화하는 노동 환경의 위기와 기회에 대해 노동행정기관들이 갖는 중요한 역할을 강조했다. 또한 노동행정에 관한 협약 150호가 현재도 유효하고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는 협약임을 확인하고, 미비준 국가들이 이 협약을 조속히 비준해야 하며, 필요시 ILO로부터 정책 실무지원을 받을 수 있음을 강조했다.
위원회는 벨라루스가 ILO협약 87호 및 98호를 이행했는지 심의를 하면서 이례적으로 투표를 했다. 공식 투표 없이 공감대 형성을 통해 결론을 내리는 기존의 관례를 깬 것이다. 위원회는 투표를 통해 벨라루스 정부에 우려를 표하고, 회원국들이 이에 대응하는 액션을 취할 것을 권고하는 결론을 냈다. 투표까지 하게 된 것에 대해 기준적용위원회 노동자그룹 부의장인 마크 르망은 강력히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이밖에 24개 국가별로 ILO협약 이행 상황 심의가 이뤄졌는데, 이에 대해서는 모두 공식 투표 없이 공감대 형성에 따라 결론에 이를 수 있었다. 각 결론의 채택에 앞서 해당 국가 정부에 의견 개진의 기회를 주기도 했다. 모든 회의 내용과 결론을 수록한 전체 보고서는 3개 언어로 작성해 공식 ILO 홈페이지에 게재하게 된다.
새로운 사회계약에 대한 공감대 형성
▲ 10일 김동명 한국노총 위원장이 ILO 총회 본회의에서 연설하고 있다. ⓒ 한국노총
이번 총회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향후 3년간 ILO를 이끌어갈 이사회 선출과 브라질, 네팔 등 국가 정상들이 참여한 '사회정의를 위한 글로벌 연합' 포럼을 꼽을 수 있다. 포럼에 참여한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브라질 대통령은 연설을 통해 "어떤 국가도 혼자만의 힘으로 전 세계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없다"라고 강조했고, 람 찬드라 파우델 네팔 대통령은 이에 호응하며 글로벌 연대를 통한 사회정의 실현을 지지했다. 웅보 사무총장은 "사회정의에 대한 지지와 노력이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뤄져야 한다"라며 "이는 우리뿐만 아니라 다가올 미래세대를 위해 중요하다"라고 강조했다.
웅보 사무총장은 총회를 정리하는 연설을 통해 총회 참가자 중 여성이 늘어난 것에 대해 고무적인 메시지를 전달했으며, 이번 총회가 필라델피아 선언(1944년) 8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가 된 것에 깊은 의미를 부여했다. 또한 그는 총회를 통해 팔레스타인이 겪는 고통에 대한 문제가 다뤄지고, 이에 대해 긴급한 해결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있었음을 상기시켰다. 그는 인도적인 도움의 필요성과 함께 모든 일이 인권과 노동자의 권리를 존중하여 이뤄져야 함을 강조했다.
웅보 사무총장은 "새로운 사회계약에 관한 논의는 지속적인 불안과 불평등 해결을 위한 액션을 요구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선택지가 될 수 없다"라고 역설했다. 그는 "지속가능한 평화, 부의 공유, 평등한 기회, 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새로운 사회계약의 필요성에 참가자들이 공감했다"라고 언급하며, 사회적 대화의 중요성, 기준 설정 프로세스 강화 등이 ILO의 가장 근본적인 요소로 남아있어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사회적 대화 채널 포기하지 않겠다"
▲ 11일 열린 기준적용위원회 회의 모습 ⓒ 한국노총
이번 ILO 총회는 전 세계 노사정을 아우르는 최대 규모의 국제 콘퍼런스답게 제네바 유엔 유럽본부와 ILO 본부에 마련된 다수의 회의장이 수많은 참석자들로 붐볐고, 공식회의 외에도 각국의 현안을 알리고 논의하기 위한 다수의 면담들이 회의장 곳곳에서 진행됐다.
김동명 위원장 등 한국노총 대표단은 싱가포르 노총, 일본 노총 대표단과 공식 면담을 했으며, 국내 외국계 기업의 노동조합 탄압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해당 국가 노총 관계자와 면담을 통해 향후 연대를 모색하기로 약속하는 등 실질적인 국내 노사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했다. 또한 중국, 타이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노총 실무자들과 만나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각자의 노동 현실을 해결해 나가는 모습들을 배울 수 있었다.
우리가 만난 해외 참가자들은 비단 노동자 그룹에 그치지 않았다. 총회 기간 중 국제노총 아태사무소(ITUC-AP)의 요청으로 아태지역경영자총연맹(CAPE)과 회합해 공동연구를 위한 방법론 등을 프리젠테이션을 통해 제시할 수 있었다. 이런 활동은 노사 간 대화를 강조하는 ILO 총회의 취지에 부합하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가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사회적 대화의 채널을 포기하지 않겠다"라는 김동명 위원장의 연설은 이번 ILO 총회에서 끊임없이 소통에 주력한 한국노총의 활동을 한마디로 정의했다고 볼 수 있다.
총회를 마치고 제네바공항에서 이륙하며 문득 숙연함을 느꼈다. 노사정 각각의 이해관계가 다르고 노동자 그룹 내에서도 추구하는 바가 다양한 현실에서, 이들을 모두 하나의 회의에 모이게 하여 함께 문제를 논의하고, 때로는 논쟁하고, 설득하는 무대가 105년째 흔들림 없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서.
▲ 오세일 / 한국노총 국제부장 ⓒ 오세일
필자 소개 : 이 글을 쓴 오세일은 영국 런던정경대(LSE)에서 유럽사회정책학 석사, 태국 국립행정대학원(NIDA)에서 개발행정학 박사학위를 취득 후 현재 한국노총 정책2본부에서 국제 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국제노동기구(ILO) 아태사무소(방콕)에 파견되어 사회보장 담당관으로 근무했으며, 독일 산재보험조합총연맹(HVBG)과 스위스재해보험(SUVA)에서 사회보험 실무연수를 했고, ILO 세계사회보장보고서(2014/2015) 발간 작업 참여 등을 통한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국제무대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제112차 ILO 총회에서 이사회 교체위원(2024-2027)으로 지명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