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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오전 11시께 서울 종로구 대학로 백기완마당집에서 열린 개관식에서 참석자들이 박수를 치고 있다.
 6일 오전 11시께 서울 종로구 대학로 백기완마당집에서 열린 개관식에서 참석자들이 박수를 치고 있다.
ⓒ 김화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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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정권이기에 어느 때보다 더 백기완 정신이 필요합니다." - 김주환 전국대리운전노동조합 위원장

"아버지는 역사에 박제되는 걸 가장 싫어하셨습니다. 이곳은 박제와 기념의 공간이 아닙니다. 이 마당집은 오늘 싸움을 마무리하고 내일 싸움을 주도하는 모든 이들에게 열린 사랑방입니다." - 백원담 성공회대 교수 


6일 오전 10시께 통일문제연구소가 사무실을 '백기완 마당집(서울 종로구 대학로)'으로 새로 단장해 개관식을 열었다. 고 백기완 소장이 세상을 떠난 지 3년 3개월 만이다.  

비가 내리는 흐린 날씨에도 백 소장의 '노나메기 세상(너도 나도 일하고 올바르게 잘 사는 세상)' 정신을 기억하는 약 300여 명의 사람들이 좁은 골목길을 가득 채웠다. 백 소장이 결혼식 주례를 섰던 부부부터 고인과 연대한 노동자들은 물론 시민들까지 다양한 이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백 소장이 자신의 결혼식 주례를 서 줬다고 밝힌 이명재씨는 "오늘 개관식이 있다고 해서 경북 김천에서 올라왔다"며 "선생님께선 오직 정의의 관점에서 바른 소리만 하셨고, 우리 사회 참 많은 영향을 끼치셨다. 지금 윤석열 정부가 너무 못하는데 살아계셨다면 호통 많이 치셨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모든 노동자·민중의 언덕이자 거점"인 마당집
 
6일 오전 10시 30분께 서울 종로구 대학로 백기완마당집 앞 개관식서 '백기완 집 문 열었소'라고 적힌 만장을 들고 가는 김주환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전국대리운전노동조합 위원장.
 6일 오전 10시 30분께 서울 종로구 대학로 백기완마당집 앞 개관식서 '백기완 집 문 열었소'라고 적힌 만장을 들고 가는 김주환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전국대리운전노동조합 위원장.
ⓒ 김화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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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오전 10시 30분께 서울 종로구 대학로 백기완마당집 인근에서 마당집 개관을 알리는 터울림 공연이 이뤄지고, 개관식 참가자들이 흥에 겨워 하는 모습이다.
 6일 오전 10시 30분께 서울 종로구 대학로 백기완마당집 인근에서 마당집 개관을 알리는 터울림 공연이 이뤄지고, 개관식 참가자들이 흥에 겨워 하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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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 집 문 열었소'

오전 10시 40분께 개관을 알리는 만장을 든 노동자가 앞장서자 꽹과리·장구·태평소를 연주하는 놀이패가 뒤따르며 마당집 골목 한 바퀴를 돌았다. 가락에 맞춰 서로 손을 맞잡고 춤추는 모습이 낯선 듯 인근을 지나던 행인들도 잠시 멈춰 구경했다. 구성진 춤판과 노래가락은 개관식 내내 끊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마당집을 덮었던 제막식 천을 걷어낼 때도, 백 소장의 마지막 옷을 지은 이기연(질경이 우리옷 대표)씨가 천을 가를 때도, 판소리 명창의 공연을 듣고 고인을 기릴 때도 흥겨운 노래가 계속됐다.   

이날 개관식 축사에 나선 백 소장의 장녀 백원담 성공회대 교수는 "아버지는 1988년 '벽돌 한 돌 쌓기' 운동을 통해 이 마당집(당시 통일문제연구소)을 만드셨다"라며 "(대문 기둥) 돌에도 적혀있듯 이곳은 반독재민주화와 해방통일운동의 거점이 됐다"고 운을 뗐다.

이어 "이곳은 일상·전선에서 싸우는 모두를 위한 곳"이라며 "아버지는 자신을 역사에 박제하시는 것을 가장 싫어하셨다. 이 마당집은 박제와 기념의 공간이 아닌 내일의 싸움을 주도하는 이들을 위한 사랑방이니 언제든 오시라"고 말했다.

신학철 백기완노나메기재단 이사장도 "여기 오신 분들은 백기완 선생과 함께 싸워온 분들이고, 이 마당집은 여러분들의 집"이라며 "백 선생이 살아있을 때처럼 똑같이 민주·통일·노나메기 사랑방 구실을 할 테니 많이 사용해 달라"고 덧붙였다.  

임진택 명창은 '비나리와 질라라비' 불림 공연을 통해 개관식에 참석한 모두가 백 소장의 정신을 이어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여기 모인 우리는 딱 한 발 떼기에 목숨을 걸라는, 기죽지 말라는 선생님 말씀을 가슴에 품고 썩어 무너진 자본주의 문명 너머 세상, 돈이 주인이 아닌 일하는 사람이 주인인 세상을 만들고자 모였다.

여기 모인 우리는 노나메기 세상을 꿈꾸며 한 번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던 선생의 89회 한살매(생애)를 기억하며 이 백기완 마당집이 모든 시민·노동자·민중의 언덕이자 진지가 돼 각자의 힘과 지혜를 고루 내놓고 쓸 수 있도록 집 문을 활짝 열어놓고 끝까지 싸우고 일할 것을 맹세한다." - 임진택 명창의 비나리와 질라라비 공연 중 일부 내용.


"어려울수록 살아나는 백기완 정신으로 반노동 정책에 맞설 것"
 
6일 오전 11시께 서울 종로구 대학로 백기완마당집 앞에서 열린 개관식에서 배가르기 행사가 이뤄지는 모습이다.
 6일 오전 11시께 서울 종로구 대학로 백기완마당집 앞에서 열린 개관식에서 배가르기 행사가 이뤄지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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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오전 11시께 서울 종로구 대학로 백기완마당집 1층 옛살라비(옛방)를 둘러 보는 문정현 신부
 6일 오전 11시께 서울 종로구 대학로 백기완마당집 1층 옛살라비(옛방)를 둘러 보는 문정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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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식이 끝난 후엔 마당집 앞 골목식당과 천막에서 집들이 잔치가 열렸다. 200인분의 약밥, 고사 시루떡, 진달래 꽃술과 막걸리, 김치겉절이와 홍어무침 등은 노나메기재단 후원자들과 비정규노동자의집 꿀잠의 기증으로 마련됐다. 사람들은 개관식이 끝난 뒤 삼삼오오 테이블에 모여 술잔을 기울이고 음식을 나눠 먹고,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잔치를 이어갔다.

이날 천막 앞에서 만난 김득중 전국금속노조 쌍용자동자치부 지부장은 백 소장과 2009년 쌍용차 정리해고 반대 투쟁 현장에서 연을 맺었다. 김 지부장은 <오마이뉴스>에 "선생님은 저희가 있던 평택공장과 (숨진)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의 빈소가 있던 서울 대한문을 10년간 오고 가시며 큰 버팀목이 돼 주셨다"며 "연초에 새해 인사를 드리면 선생님은 덕담과 세뱃돈을 주셨다. 힘든 투쟁의 한 해를 선생님의 격려로 시작했다"고 떠올렸다.

김 지부장은 "이 마당집은 저뿐 아니라 수많은 노동자와 민중들이 잠시 애환을 삼키고 주저앉을 때면 기운을 받아가던 곳"이라며 "지금 선생님은 계시지 않지만, 남아있는 저희가 윤석열 정부의 반노동 정책 속 노동자의 자존심을 지켜내는 싸움을 이어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개관식에서 '백기완 집 문 열었소'라고 적힌 만장을 높이 들었던 김주환 전국대리운전노조 위원장은 <오마이뉴스>에 "선생님께선 항상 비정규직 투쟁에 앞장서 주셨고, 저희가 선생님이 가실 때도 운구를 했었다"며 "마지막 순간에도 우리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기죽지 말고 힘껏 싸우라는 말씀을 주셨다. 그 말씀을 잘 따르겠다는 마음으로 만장을 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특히 윤석열 정권 들어 노동자 탄압이 거세지고 있는 지금 백기완 정신은 더욱 필요하다"며 "유독 어려운 상황일 수록 선생님의 노나메기 한 발 떼기 정신은 살아난다. 주변 사람을 북돋아 주고 이끌어준다"고 했다.

그러면서 "남은 자로서 선생님의 목숨 걸고 한 발 떼기를 위해 어떤 싸움을 이어가야 할지 고민이 깊어진다"며 "백기완 정신에서 그 답을 찾겠다"고 덧붙였다.  
 
6일 오전 11시께 서울 종로구 대학로 백기완마당집 앞 개관식서 만난 이명재·박성숙씨 부부가 1989년 서울 종로구 향린교회서 결혼할 당시 고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주례를 본 인연을 소개하며 보여준 사진
 6일 오전 11시께 서울 종로구 대학로 백기완마당집 앞 개관식서 만난 이명재·박성숙씨 부부가 1989년 서울 종로구 향린교회서 결혼할 당시 고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주례를 본 인연을 소개하며 보여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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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소장은 1932년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나 한평생 통일·노동·민중운동에 헌신했다.백 소장은 한일협정 반대운동(1964년) 백범사상연구소 설립(1967년) 후 유신헌법 철폐 100만인 서명운동(1974년)을 주도하다 긴급조치 위반혐의로 옥살이를 했다. YMCA 위장결혼 사건(1979년)으로 고문을 당했고, 권인숙 성고문 사건 진상 폭로대회(1986)를 주도한 혐의로 옥고를 치렀다.

백 소장은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중후보로 출마했다가 김영삼·김대중 후보의 단일화를 호소하며 사퇴했고, 1992년에도 대선에 출마해 완주했다. 백 소장은 이후 자신이 설립한 통일문제연구소에서 노동·통일문제 등에 힘써왔다.

태그:#백기완마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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