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21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의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민주당 의원이 워싱턴 DC의 국회의사당 앞에서 '공공 주택을 위한 그린 뉴딜'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나는 선출된 공직자나 공인으로서가 아닌 한 명의 인간으로 말하는 겁니다. 엄마가 되고자 꿈을 꾸는 여성은 행복과 슬픔이 교차하는 느낌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아이들의 미래에 대해 알고 있고 우리의 행동이 아이들이 마주할 절망적인 가능성을 만드는 데 일조를 하기 때문입니다." -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Alexandria Ocasio-Cortez, AOC) 미국 하원의원
"우리의 민주주의는 정말로 지금 우리가 마주한 이 위기를 돌파할 수 있을까요?" - 장혜영 국회의원
나는 2020년 2월 16일 자 <경향신문> 칼럼을 통해 AOC 하원의원과 장혜영 국회의원을 소개한 적이 있다. AOC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국의 스타 진보 정치인이고 장혜영은 미 시사주간지 <타임>이 2021년 선정한 세계 100인의 떠오르는 인물 중 한 명이다. 둘 다 밀레니얼 세대로서 기후위기와 복합불평등, 그리고 평화공존 등 새로운 도전 과제에 대한 미래 정치를 상징한다. 그들은 취약한 존재들에 대한 비통한 마음을 가지고 의회에서 현 모순구조에 대해 송곳 질의를 하며 대활약을 했다.
하지만 다시 선거에 도전한 그들 앞에는 거대한 벽이 마주하고 있다. 나는 사실 승리 여부를 떠나 '밀레니얼 세대' AOC가 '조용한 세대' 조 바이든 대통령과 민주당 경선에서 멋지게 겨루는 모습을 보기 원했다. 하지만 소프트 파시즘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승리할지도 모르는 위험 앞에서 미국 민주당 주류들은 AOC가 목소리를 낮추고 오직 바이든 지지만을 해주길 요구하고 있다.
나는 사실 당선 여부를 떠나 밀레니얼 장혜영이 소위 586 운동권들과 진보의 대표 자리를 놓고 멋지게 겨루는 모습을 보기 원했다. 하지만 윤석열 행정부의 반(反)자유민주주의 통치 앞에서 한국의 민주당과 일부 기존 정의당 주류들은 장혜영이 오직 윤석열 심판만을 외쳐주기를 요구하고 있다.
세계화 물결 '루저'들, 트럼프 도구로 복수극
나는 이번 미국과 한국 선거와 그 선거를 주도하는 정당들에 점차 흥미를 잃어가고 있다. 그저 오래된 정치질서 간의 쟁투만 부각되기 때문이다. 다만 그 좁고 어두운 틈새에서 미래가치를 심는 이들은 그 성장을 응원하고 싶다. 미국 시민권이 없어 AOC는 후원하지 못하지만 장혜영 의원은 후원회장을 맡았다.
도대체 왜 미국과 한국의 이번 선거철에 유달리 미래가치를 대표하는 이들이 전면에 부상하지 못할까? 아니 한국은 미래를 선도하는 정치인에 주목하기는커녕 청년 후보들을 주변으로 밀어내거나 막장 공천에서 철저히 짓밟았다.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문제가 잘못된 걸까?
이에 대한 내 답은 오늘날 미국 민주당의 위기는 결국 운동으로서의 정당 역할을 잃어버리고 더 나은 공화주의적 가치를 세워나가지 못했다는 점이다. 미국 민주당은 80년대 선거에서 부단히 패배하는 소수정당이 되면서 당시 대세인 신자유주의를 주도적으로 수용했다. 나는 당시 이 길이 일부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정치란 연구실의 학문과 달리 시대적 제약 속에서 가능한 길(레이건 보수주의 속 진보)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주당은 일부 전술적 수용이 아니라 아예 신자유주의 가치와 문화를 온몸으로 수용하는 기득권 정당으로 변신했다. 그리고 선거 캠페인은 아래로부터의 운동이 아니라 고급 아르마니 정장을 입은 컨설턴트들의 마케팅 게임으로 변질했다. 다시 운동의 정치를 회복하겠다고 선언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실제로는 경제위기 책임이 있는 금융자본을 구제해 대마불사의 신화를 창출했다.
결국 세계화와 다원화의 물결에서 '루저' 취급을 받던 이들은 트럼프를 도구로 삼고 피의 복수극을 시작했다. 좌파 대신에 부동산 백만장자이자 내로남불의 나르시시스트가 기득권(Deep state) 해체를 주장하는 우파 포퓰리즘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한국 진보의 위기도 결국 운동으로서의 정당 역할을 잃어버리고 더 나은 가치를 세워나가지 못했기 때문에 찾아왔다. 과거 김대중 대통령 후보는 애초에 국제통화기금(IMF) 재협상을 주장하며 신자유주의에 저항했다. 하지만 일부 좌파까지 김대중 비난에 합류하면서 그는 대세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여의도를 활보하는 이들 중 그때 누가 그 왼쪽에서 싸웠는지 난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